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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은사의 친구로 김영갑이란 사람을 알고 있었다. 내 은사는 그를 제주백수라 부른다. 제주도에 미쳐 그 섬에 들어간 지 20년이 된 사진작가. 그저 그렇게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예술가 중의 하나로 뇌리에 입력된 게 전부였다.
그를 다시 만난 건 미장원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엇다. 드르륵 잡지를 넘기던 중 낯익은 사진 몇 컷이 눈에 들어온다. 파노라마 사이즈만을 고집하는 김영갑 작가의 사진이었다. 그는 몇 해전 루게릭이란 몹쓸병에 걸려 이젠 카메라 셔터도 누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굳어가는 근육을 풀기 위해 두모악이란 갤러리를 손수 열었고 책을 펴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알라딘에서 그의 책을 주문하고 사흘을 기다렸다. 책 곳곳에 삽입된 그의 사진들, 아무런 설명도 부가되지 않는 사진들을 보며 탄성과 슬픔이 밀려왔다. 하늘, 갈대, 바람, 수평선, 나무 등이 전부인 그의 사진은 ‘저 한 컷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난 일요일 감정을 가라앉히고 그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연초 일출을 담기 위해 마라도를 찾은 어떤 작가들은 카메라 셋팅에 시간을 허비하고 바람과 바람 사이로 잠깐 고갤 들이 미는 해를 캐치하지 못한다. 이내 운이 없었노라고, 건질 게 없노라며 푸념하며 떠난다. 그들이 건질 것이 없다고 하는 마라도에서 김영갑은 일주일을, 한 달을 머문다.
그의 촬영 작업은 인고 그 자체다. 프레임 중앙에 수평선을 놓고 위는 하늘 아래는 바다, 그리고 원하는 사진을 얻을 때까지 같은 프레임으로 계속 촬영한다. 속전속결로 한 두 컷에 대어를 건지려는 얄미운 생각으로는 명장면을 담아내기 힘들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읽으면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도 가슴 한 켠은 시원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삶을 관조하는 지혜를 얻는 듯 했다. 영개비와 함께 한 일요일은 그보단 조금 비통했다. 내 지인이, 가족이 앓고 있는 듯 가슴이 아팠다. 난 모리의 제자처럼 영개비를 일요일마다 찾아가 말 벗이 되어주고, 그가 전하는 삶을 영위하는 자세들을 책으로 엮어낼 수 없다. 아니 적어도 그의 갤러리에 걸려 있을 거미줄조차 치워줄 수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누구의 손길도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순수한 사람과, 바람, 돌에 끌려 정착했던 제주가 뭍사람들에 의해 발전과 변화라는 허울로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통해 했던, 실로 제주와 일체가 되었던 그. 제주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제주에 안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에게는 제주가 있다. 그리고 제주에는 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