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픔치약 거울크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01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평점 :
이전 시집『당신의 첫』보다 대부분의 시가 호흡이 길어졌다라고 해야하나
특히나 2부의 마지막 시「맨홀 인류」는 100~134쪽에 이른다 긴 호흡의 비명은
있을수 없듯이 비명 이후의 정황들이라고 해야할까 여전히 어둡고 쥐들이 들끓는
세계에서 길어올리는 시를 읽어나가기란 즐겁지 않다 하긴 즐겁고 유쾌하자고
시를 읽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통스러운 짧은 행간들 속에서 비슷한 고통에 대한
동료의식으로 순간이나마 위무를 받는다고하면 되려나
눈과 마음에 들어오고 침착된 부분을 무작위로 조금 옮겨와 본다
빗이 거울을 부르고 거울이 빛을 부르고 빛이 나를 부르고
나는 방에 갇혀 있는 거울에 갇혀 있는 나의 슬픈 눈동자에 갇혀 있는
나에게 거울크림을 바르고 천천히 지워져갔다
그리하여 내 몸이 몇 개인지
몇 개가 더 죽을 수 있는지
땅은 물렁물렁하고 발걸음은 건들건들하고
공기는 끈적끈적하고 가슴은 우글우글하고
당신의 유령이 거미줄처럼 내 영혼을 채가는 곳
내가 나에게 명복을 빕니다
나는 죽은 몸들을 타고 앉아
남은 몸 몇 개를 재워보네
그리움도 자고 의심도 자고
아직 열지 못한 목구멍도 자고 다 잠들라
너는 죽어서 무엇이 되고 싶니?
나는 죽어서 테두리 없는 것이 될 거야!
구멍의 건축을 둘러싼 이 괴상망측한 구조물이 덜그럭덜그럭 걸어간다. 나는 암소나 암캐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짚지도 않고 이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어간다. 나는 '없음'이라는 주형에 들이부어진 반죽이다, 직립한 사운드다. 불안이 침범하기 쉬운 취약한 구조다. 마침내 승리할 '없음'을 위해 나날이 경배하는 나여! 나의 살이여! 인도 사람들은 '그대 안의 신에게' 나마스테라고 인사한다. 누가 이 주형에서 지금 막 떠진 내 몸에 고리를 걸어 슬픔의 방아쇠를 당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