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레네 감독, 사샤 피토에프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견고한 과거의 성을 가득 채운 무한한 현재들 -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고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는 것은 미궁처럼 이어진 부조리한 꿈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수께끼 같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아름답고 몽환적인 카메라의 시선이나 움직임이 무척 유려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과 그 안을 채우는 사물들이 꽤나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독특한 시간이미지이다. 그 시간이미지는 미궁이기도 하며 동시에 부조리한 꿈이기도 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카사레스가 소설 안에서 보인 환상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의 혼동을 근사한 유럽적 분위기로 재탄생시켰다. 이미지의 혼동이라는 테마를 물려받아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를 보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 영화가 포착하는 시간이미지는 더 강렬해지는데, 전개의 비논리성이 다소 정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상당히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시간의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다. 무엇이 어느 것의 앞에 위치하고, 무엇이 어느 것의 뒤에 위치하는지 알기 위해서 이 영화를 백 번 돌려본다 해도 아마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남자 X의 진술 속에 펼쳐지는 많은 이야기들과 여자 A의 끊임없는 부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로 일어난 일이고 무엇이 단순한 가정 혹은 짐작에 불과한 일인지 파악해 낼 수 없다. 이렇게 관객이 이 영화 안에서 길을 잃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의 묘사적인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되는 이미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바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알랭 로브 그리예인데, 그는 남자주인공 X의 내레이션을 통해 진실로 있을지도 모를 사물들조차 무색하게 지워버릴 정도로 세부적인 기억의 묘사를 시도한다. X는 A에게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들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는 심지어 가끔 제시되는 이미지와도 불일치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X의 진술과는 달리 열려져 있는 문 앞에 A가 서있는 장면이다. X는 나타나는 이미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내레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닫혀 있었다고 애타게 외친다. 그의 간절한 내레이션을 듣는 관객은 그 때쯤이면 도대체 이 엇갈리는 진술 속에 존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되어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불일치와 모호함 속에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지 않느냐는 지표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해 있다. 그렇기에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미지들은 현재에 진행되는 일이며 동시에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분열이 바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에의 갈증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헤어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진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영화가 갖는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을 반짝이듯 보이는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 연극 장면에서부터 제시된다. 관객으로서는 놓치기 매우 쉽지만,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대사는 연극의 대사와 일치하며 주인공들의 밀회의 공간인 대저택의 공원 역시 바로 연극의 배경으로 제시된다. 이 연극 장면은 앞으로의 영화 전체의 줄거리를 압축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이미지이며 동시에 상영되고 있는 연극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적인 이미지이다. 이렇게 이 영화 안에서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는 합착되어 있는데, 그렇기에 이 장면은 결정 이미지로 기능한다. 이 연극 장면은 마치 거울과 같은데, 영화라는 작업 안에 다시 연극이라는 작업이 내포되어 있는 상태로 영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결정이미지를 통해 관객은 단순히 등장인물들끼리의 진술에서만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속의 사건 그 자체들 속에서도 불일치와 식별불가능성이 발견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대사의 일치는 기묘하게도 연극과 영화 속의 두 핵심주인공에서만 일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지나가는 대사 역시 그냥 흘릴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장면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와 닮아있거나 혹은 동일하다.

 

  이렇게 영화 전반에 이미지들의 혼동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로브 그리예와 알랭 레네의 시간을 주제로 한 만남의 특성이 그대로 영화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감독인 알랭 레네의 경우 전작인 『내 사랑 히로시마』를 통해 현존하는 과거라는 시간이미지의 테마를 보인 바 있다. 그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과거의 실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로브 그리예는 알랭 레네와는 다른 시간이미지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현재의 첨점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로브 그리예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항상 영원한 현재를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현재들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고, 순간순간이 항상 다채로운 현재로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치 등장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존재하게 된 이미지들은 다양한 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현재를 분배해주고, 그러한 결과로 서로 다른 현재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일종의 다우주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상식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영원한 현재들의 공존은 영화 안에서도 여러 예시적 장면들로 상징된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X가 A를 알았다 주장하지만 A는 X를 알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현재 역시 그러하다. 또한 총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과 달리 그것을 인물들은 부정하고, X가 밀회의 장소에서 도피하다 사고로 죽었음을 암시하는 장면과는 달리 X가 멀쩡히 살아 A와 어디론가 떠나는 후반의 장면들도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된 암시들은 서로 상반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말했듯이 이 영화는 로브 그리예만의 것이 아니다. 로브 그리예의 다소 산만할 수도 있는 다채롭고 생명력 넘치는 수많은 현재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계를 방랑하지 않는다. 이 순수한 현재들을 대저택이라는 한 공간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알랭 레네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레네는 시간을 견고하고 웅장하게 서있는 바로크 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레네의 영화에서 분명히 굳건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이 바로크적 성 안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은 마치 퇴적되듯 성 안에 쌓인다. 그러한 기억의 퇴적, 견고하게 존재하는 기억의 정체는 맨 처음 펼쳐지는 연극 대사로도 제시된다.

 

  “몇 초만 더, 그것은 응고되어 갑니다. 영원히, 대리석의 과거 속으로. 돌에 새겨진 이 정원처럼. 이 건물, 방들은 이제 버려졌고,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아마도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그 많은 복도를 따라서 당신을 만나려고. 가면 같은 얼굴의 울타리를 거쳐서 주의 깊고 냉담한 얼굴들을 거쳐 당신 앞에 선다.” 그리고 연극은 여자배우가 “자, 이제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라고 말하며 끝난다.

 

  성 안에 쌓이는 기억들은 무엇일까? 그 기억들은 바로 성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모든 현재들일 것이다. 알랭 레네가 제시하는 시간의 견고한 성 안에서 로브 그리예의 무한한 현재들이 마치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이 영화 전체에서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메라는 이 성 안에 퇴적될 기억들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사람들의 대화를 열심히 쳐다보며, 초반에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멈추기까지 한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 닮았으며, 그들이 겪는 만남도 서로 유사한 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일지도 모르며, 이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은 성의 기억들일지도 모르겠다. 

 

  알랭 레네와 로브 그리예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해도 그들의 합작이 이런 근사한 이야기, 공간, 그리고 기억이미지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시 현재와 과거가 아무리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본 정체에 있어서는 베르그송의 생각처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영화 속의 성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현실이자 과거인 방문객들의 기억들을 자신의 내면에 퇴적시킨다. 그렇기에 처음 보면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이라 생각할 정도로 직선의 공간인 성은 자신의 응고된 기억을 엿보려는 자들을 퇴적된 기억의 조각들과 화강암의 포석들 사이에서 미아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다소 장난스럽게도, “당신은 이제 길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깊은 밤에, 나와 함께.” 라며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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