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혁명
빌렘 플루서 지음, 김현진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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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언론에 대한 관심이.. 영상매체가 가지고 있는 권력관계로 넘어가더니.. 결국 여기까지 왔다;; 물론 발표의 압박으로 읽게 된 책이긴 하지만.. 어쨌든 플루서.. 나는 잘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이 분야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의 다른 책인 『피상성 예찬』도 읽어봐야겠다. 여튼 각설하고..

 플루서는 인간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상징의 도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고대에는 바로 그림이었다고 한다. 즉 동굴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은 상징의 도구였고, 그것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 의미하는 그림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상징의 도구는 글자인데, 플루서는 글자란 단순히 그림을 행으로 풀어쓴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종의 그림인 글자의 발명은 장면들을 과정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글자의 발명과 함께 역사가 발명된다고 한다. 즉 역사적 의식이란 글자의 탄생 이후에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글자는 모든 대상이 정보가 되어 문화라는 저장창고에 쌓이게 되는데 이는 점차 비대해진다. 이 시기에는 역사주의적 선형문화모델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는 정보의 와해, 망각, 죽음 등에 대해서 침묵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굴 벽화의 탄생이 제1의 그림의 혁명이었다면, 지금의 시대는 제2의 그림의 혁명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테크노 코드의 탄생이다. 즉 과거의 글이 그림을 개념으로 풀어놓은 것이라면, 테크노 코드는 개념에서 그림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예컨대 한 장의 사진은 하나의 사정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사정을 의미하는 하나의 장면에 관한 일련의 개념들에 대한 그림인 것이다. 즉 제2의 그림의 혁명은 글을 대체하게 되며, 탈현대적 인간은 세계에 관한 이론을 의미하고자 애쓰는 그림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즉 우리가 일상을 가장한 텔레비전 영상에 둘러쌓여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죽은 이후 수많은 변화가 생겨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글에는 현실과는 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몇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림의 홍수에 대한 설명이다. 분명 지금의 시대가 그림의 홍수라고 표현할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송신자의 폭정과 수신자의 소비자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요즘 뜨는 UCC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는 새로운 그림의 혁명으로 인해 글자를 알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그림 즉 테크노 코드를 모르게 됨으로써 문맹으로 전락한다고 이야기하였지만 초등학생들도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리는 걸 보면 그 문맹의 수준이라는 것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튼.. 테크노 코드에 관한 그의 논의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나 그가 죽은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변한 것들이 너무 많기에.. 현실에 안 맞는 부분이 몇 있다는 단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별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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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패러독스 - 존 롤스를 통해 본 정치와 분배정의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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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봤던 ‘Brave Heart’의 마지막 장면에서 멜 깁슨이 ‘Freedom’을 외치는 장면은 자유라는 것이 개인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짓밟힌 사회가 얼마나 암울한 것인지에 대해서 어린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자유라는 가치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지만 한국사회에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오직 소유권(재산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세금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극단적 시장경제주의자들로서 제도언론과 재벌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에 기득권층이다. 이들에게 정치적 자유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 집회, 언론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그저 ‘친북좌파’들의 ‘국가정체성’을 흔들기 위한 테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패한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북한의 위협을 들먹이며 가장 반자유적인 국가보안법을 옹호한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현재 집권하고 있는 노무현 및 열린우리당 세력인데, 이들은 분명 정치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으나,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기반한 경제정책을 펼치고 있다.

내가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첫 번째 부류의 자유주의자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그 시효가 지난 반공주의와 시장근본주의라고도 할 수 없는 친재벌적 정책만을 가지고 있는 수구 기득권층일 뿐이다. 두 번째 부류의 자유주의자들은 분명 정치적 영역에서 그들에게 동의하지만 그들이 집권 이후 보여준 일련의 경제정책들에 대해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그들의 경제정책은 많은 국민들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신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들이 추진하는 개혁에 대해 심각한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손호철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시대에 정치권력을 획득한 것은 크나큰 비극이었다.

나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롤즈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자유주의(저자는 책에서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에 대해서는 상당히 동감하는 부분이 많다. 저자는 아렌트의 입을 빌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단지 생존의 문제인 경제영역의 사적 개인을 넘어 표현의 문제인 정치영역의 공적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정의론』이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개념들 예컨대 원초적 입장, 무지의 베일, 차등의 원칙, 정의의 두 원칙 등에 대해서 설명하며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단순히 롤즈의 의견을 요약한 것을 넘어(이에 있어서는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염수균, 천지, 2001)를 추천한다.) 그에 대한 반론과 그리고 그 반론들과 롤즈의 이론의 접점들에 대한 나름의 고민이 함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그리고 자유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은 채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꼭 한 번쯤 읽어보고 과연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자유주의가 진짜 자유주의인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정의로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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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60년의 한국정치 - 1945~2005
손호철 지음 / 이매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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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되는 유례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한국사회는 황석영 선생이 말한 것처럼 급속도로 87년의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나아갔고, 탄핵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었던 4.15 총선에서 민주개혁세력을 대표했던 열린우리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과반수 정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은 결코 87년이 아니었다. 분명 2004년 국민들의 투표행태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갈등 축을 통하여 나타났지만 87년과는 다르게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성격을 급속도로 바꾸어 놓고 있는 신자유주의였다.

  국민들은 민주개혁세력을 지지하였지만 금세 개혁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고 있는 것은 자유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가진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있으나 열린우리당의 개혁은 국민들의 삶의 질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지 않은 정치적 개혁에 국한되었을뿐 아니라 이러한 개혁조차 냉전세력에 의해서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민경제는 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걸었고, 어떠한 개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국민들의 삶의 질은 그대로 혹은 악화되면서 극심한 개혁피로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참여정부에 대한 낮은 지지율로 나타났다.

  손호철 교수는 계속 실패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 속에서 정치와 경제에서의 두 개의 전선을 강조하며 한국 민주주의가 실패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금 갈등이 정치에 집중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정치가 진보정당의 성장을 통해 경제영역에서의 갈등이 더욱 첨예해 질 수 있는 진보-보수의 구도로 개편될 때어야만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사회의 구성세력을 냉전세력이나 민주개혁세력과 같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전선에 입각해 냉전적 보수세력(한나라당), 개혁적 보수세력(열린우리당, 민주당), 진보세력(민주노동당, 사회당)으로 나누고 서민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경제정책에서의 차별성이 더욱 중요하며 앞으로의 한국정치는 이러한 갈등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동감하지만 투표를 통해서 정치사회의 구성세력이 결정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러한 정치사회 내의 변화를 바라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빨리 사회적 협약 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 되어 노동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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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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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정치적 영역에 국한시켜 봤을 때 민주화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조야한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구축했던 이승만에 대한 4.19학생혁명, 개발독재패러다임을 통하여 유신체제를 구축했던 박정희에 대한 부마항쟁, 그리고 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전두환에 대한 87년 6월 항쟁 등 해방 이후의 한국사는 권위적인 국가와 민주화 세력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었다.


어떤 이는 권위주의세력을 타파하고 민주화 세력이 결국 한국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민주화는 종료된 프로젝트인가? 나는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민주화는 유효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분명 87년 6월의 함성으로 제한적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마저 구체제 기득권세력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저항의 중심에는 조·중·동으로 불리는 한국의 메이저 신문사들이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이 부자신문들의 추잡한 과거를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이야기하는 동아일보사가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를 내팽겨 친 사실과 같은 친일언론으로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보여준다. 혹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냐고 반문하며 부자신문을 옹호한다. 물론 그런 강압의 시기에 그들의 그러한 논조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부자신문들이 그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민족지라고 주장하는 그런 뻔뻔함이다. 반성을 모르는 이런 뻔뻔함이 결국 그들을 오만한 독선자로 만든 것이다.


부자신문들은 해방 이후부터 대부분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그러했듯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탈을 쓴 반공주의로 자신들을 무장하였다. 그들이 일제에 영합하여 얻을 수 있었던 기득권에 대한 불만의 소리는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공산주의적 발언이었고, 이는 처단의 대상이었다. 애초부터 정당성을 가지지 못했던 이들은 타협의 공간을 가질 수 없었으며, 정당성이 부재한 만큼 더욱더 공격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 기득권세력으로서 부자신문들은 권위주의정권들의 시녀로서 국민들을 우민화하고 권위주의정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공산주의세력으로 매도함으로써 반공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에 만연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민주적 논점을 가지고 있던 언론들은 권위주의정권의 폭력 앞에 하나 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권위주의정권에 기생함으로써 살아남은 부자신문들은 더욱더 친권위주의적인 논조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부자신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경우 땡전뉴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독재정권의 대변인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이러한 방송은 80년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내 광주시민군들이 방송국에 불을 지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권위주의정권에 빌붙어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부자신문들은 87년 이후 혼란기를 겪게 된다. 반세기 동안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주었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몰락은 그들이 오랜 시간 향유했던 그 많은 기득권들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로 그들에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부자신문들은 이제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대기업 즉 자본의 대변인으로서 모습을 바꿔나갔다. 그들의 기존 논조였던 반공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유지하며, 거기에 시장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 나갔다. 해방 이후 오랜 시간 권위주의정권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들은 폐지시켰고, 그 덕에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던 부자신문들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적시하고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친북=반미라는 꼬리표를 만들어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사회적 의제를 그들의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쟁점화 시킴으로써 그들의 이익을 지켜가도록 하였다.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정권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이 분산되었고, 의회의 힘은 더욱더 강력해졌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립이 이루어짐으로써 많은 국민들은 정치가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이 되기를 바라였으나 부자신문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앗아가는 위험한 일이었다. 의회 내에서 노동자·서민의 정당이 탄생하여 그들이 정권을 창출한다는 것은 곧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부자신문은 이를 막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정치권과 함께 지역주의 감정을 부추기는 행동에 함께 나섰다. 정치권과 부자신문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가 87년의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부자신문들의 횡포는 지금도 너무나 강력하다. 합리적인 의사소통과 그를 통한 대안의 모색은 민주주의사회에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또한 필수적인 장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신문들은 친북과 반미라는 무기를 통하여 소통의 장을 짓밟고 있다. 손호철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87년의 민주주의 즉 절차적 민주주의 조차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제한적이며 국가보안법을 옹호하고, 소통의 장을 왜곡시키는 부자신문들이 지금의 힘을 가지는 한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진보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편집권의 독립이라든지 점유율의 제한 등도 필요하다며 고려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제한은 심한 갈등을 불러올 것이고,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종이신문의 영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진보세력의 대안언론을 만들려는 노력이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부자신문들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진보세력이 창출하지 못한다면 그것의 효과는 극대화되지 못할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부자신문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오마이뉴스를 한국에서 6번째로 영향력 있는 매체로 만들 수 있었다.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에 대한 노력 그리고 새로운 컨텐츠를 개발해야 하는 것이 한국 진보세력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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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Volume 1, No. 1 - Summer 2006, 창간호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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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코 알라딘을 배회하다 이 책에 대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많은 고민을 했다. 일단 "아시아 각국의 문학과 예술, 사회를 읽어내고 그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취지를 가지고 창간"되었다는 말에 읽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지만.. 바로 신청을 결심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내 책장에 있는 아직 다 읽지 못한 『창작과비평』봄호와 여름호가 애처로운 에너지를 발산했기 때문이다. 아아.. 아직 저것도 다 못 읽었는데.. 괜히 신청했다가 책장만 차지하는 거 아닐까..라는 고민이 들었지만 신청한다고 어차피 다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서평단에 신청을 했고 서평단으로 뽑히게 되었다..ㅋ 일단 알라딘에게 너무 고맙고.. 아직도 애처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녀석들에겐 미안한 마음 뿐이다..;;

 우리에게 아시아는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니.. 나에게 아시아는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나에게 일본에 대한 또는 중국에 대한 기억은 여러 조각 존재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아시아는 나의 기억 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던 기억들이 분명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일 뿐이었다. 정치학도로서  유럽의 EU를 보고 떠올릴 수 있던 화두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이룩할 수 있으며, 분단체제하의 한국의 시민사회는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결국 내 상상력의 지도는 '동'아시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한반도로 혹은 미국이나 유럽을 배회하였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 포천시에 살고 있다. 공장들이 밀집한 지역을 지나가는 버스를 타면 그 버스 안에 태반이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외국이 노동자이다. 오히려 한국인이 이방인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게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접했지만.. 그리고 그들과의 동질성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가끔 난 그들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예전에 버스에서 졸다가 깨니 내 앞에 한 할아버지 같은 분이 계셨고, 나는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눈을 제대로 뜨고 보니 내가 자리를 양보한 사람은 내가 상상했던 할아버지가 아니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 순간 내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낚였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자 나의 이성은 나를 질타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그가 외국인 노동자이긴 하지만 분명 자리를 양보 받을 만큼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느냐고..

너무 내 경험을 일반화 시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아시아는 분명 그 거대한 대륙 아시아이지만, 감각적으로 느끼는 아시아는 동북아라고 불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그 지형일 것이며, 동남아에서 건너 온 외국인 노동자는 뭔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로 인식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시아>의 존재의 의미를 높게 생각한다. 만약 내가 <아시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인도네시아 작가의, 몽골 작가의 글을 평생을 살며 단 한 번이라도 접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짧은 소설이나 시 한 두편으로 아시아인들의 소통을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아시아>는 나의 상상력의 지도를 확장시켜주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기재하기 때문에 지면의 제약이 너무 크며, 이 좁은 <아시아>가 드넓은 아시아를 전부 흡수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첫 발을 내딛은 것이기에.. 난 <아시아>의 지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을 많이 접하지는 못해 본 아해인지라 <아시아>에 실린 작품들의 수준이 높은 수준인지, 그리고 번역이 잘 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내리지 못하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시아를 아시아로 볼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소통의 매개체로서 <아시아>의 작품들은 모두 다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가난한 대학생 주제에 계간지를 세 개나 받아보고 있는 실정이라 정기구독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접할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반갑게 맞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계간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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