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1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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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만에 책을 보면서 크게 웃었던 것 같다. 너무나 억지스러운 우연들이 맞아들어가지만 결코 거북스럽지 않았다. 약소국 그랜드 페윅이 뉴욕을 침공해 미국에게 전쟁에서 승리해 약소국들이 중심이 된 세계평화체제를 수립한다는 이 기막힌 발상은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우습지만 또한 결코 우습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은 냉전시대이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핵이라는 무기는 이 세상이 언제 한 줌의 재로 변할지 모르는 공포의 시대로 만들었다. 아마 저자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이 공포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는 긴 어둠의 터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냉전이라는 이름 속에서 각 진영에서 강대국들이 벌인 횡포는 많은 약소국들의 정치적, 경제적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이었으며, 약소국인 아일랜드 출신의 저자로서는 그런 현실이 너무나 싫었을 것이다. 강대국들은 UN을 만들어 모두의 이익을 실현시키는 것처럼 속였지만 결국 이사회에 포함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언제나 강대국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약소국들이 중심이 되어 두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을 감시-감독 할 수 있는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이 책의 내용은 획기적이었고, 너무나도 즐거운 상상이었다.

 지금은 냉전이 끝났고 미국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체제가 황혼에 접어든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시기에 저자가 펼쳤던 이러한 상상력이 다시금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상이 단지 상상에 그친다면 안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구체적 내용은 추상적 구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신자유주의가 몰아치는 비문명적이고 야만적 천민자본주의의 시대에 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문명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즐겁고, 유쾌한 상상을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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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비판사회이론의 흐름
현택수 외 지음, 김호기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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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사회이론은 김호기 교수가 정리한데로 “협의로는 기존의 방법론과 사회이론의 ‘정통적 합의’에 대한 비판을 뜻하며, 광의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판사회이론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의 전통을 계승하며 또한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비판사회이론가들은 좌파적(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근대적이라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도 있지만)이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책에서는 월러스틴, 라이트, 기든스, 홀, 하비, 푸코, 부르디외, 투렌, 하버마스, 오페, 안데르센이 소개되고 있다.


개괄적 소개서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책은 각각의 인물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쉽게 여러 학자들의 주요 주장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단점으로는 그들의 그런 주장들이 어떤 배경에서, 그리고 각각의 주장들이 어떤 상호연계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내 수준이 부족해서인지 글이 어려운 것인지 몰라도 이 책에서 처음 접하는 학자들 예컨대 에릭 올린 라이트나 데이비드 하비 그리고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의 대한 소개 글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나 앤서니 기든스 그리고 미셜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위르겐 하버마스 등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학자들이 펼쳤던 근대성과 탈근대에 대한 논의들은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나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논의들이 이들의 이론적 기획에 의해 구성된 사회이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했을 때 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이론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돕는데 꽤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며 나 같은 하수들이 한 번 쯤 읽어 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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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의 위기 - 화이트칼라는 자본주의로부터 어떻게 버림받고 있는가?
질 안드레스키 프레이저 지음, 심재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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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97년 외환위기가 한국에서 발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이트칼라가 된다는 것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며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화이트칼라들의 삶은 어떠한가? 그들은 언제나 쫓기며, 미래를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중산층 이상의 삶을 바라는 대부분의 우리들 역시도 그런 사회현실의 변화 앞에서 언제나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보다 먼저 신자유주의 개혁이 이루어졌던 미국에서의 화이트칼라들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프레이저는 <뉴욕타임스>나 <포브스>와 같은 유명한 언론에 비즈니스 기사를 기고하는 칼럼니스트로서 화이트칼라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은 사회적 변화를 통해서 노동자의 삶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많이 닮았다. 물론 리프킨의 그 책은 기계의 발달과 그로 인해 노동력의 필요가 감소하는 블루칼라를 좀 더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책은 기계의 발달이 화이트칼라의 삶을 어떻게 기업에 종속시켰는지를 보여준다. 화이트칼라는 발달된 통신기계의 덕택(?)으로 출근한 상태이든, 퇴근한 상태이든 언제든지 회사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가정과 직장의 구분선을 뭉개버리기에 충분하였다. 7/24 즉 일주일에 7일을 일하고, 하루에 24시간을 일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상태가 되게 되는 것이다. 즉 과거에 한 명의 노동자가 일주일에 5일 하루에 8시간밖에 일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과거 노동자 3~4명이 하던 일을 한 명의 노동자가 과도하게 떠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많은 화이트칼라들이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대량해고 당하고 그 해고의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즉 생존을 위하여 각각의 화이트칼라들은 자신의 여가는 고려하지 않은 채 기업에 충성하는 충견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화이트칼라들의 삶은 마치 고대 노예의 삶과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되었다. 고대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여 매를 맞으면서 일을 했다면, 현대의 화이트칼라들은 핸드폰과 노트북 등 통신시설에 묶여서 호출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기업들이 보다 더 많은 이윤추구를 위하여 기존에 화이트칼라에게 제공되던 수많은 혜택들 예컨대 복지혜택이라든지, 퇴직금이라든지 다양한 것들을 폐지하고 임금상승을 억제시키는 등 화이트칼라들은 구조조정이라는 서바이벌의 장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그 서바이벌의 장은 더욱더 좁아지고만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처해 있는 화이트칼라와의 인터뷰들은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숨이 너무나 갑갑해졌다.


이 책의 부제는 ‘화이트칼라는 어떻게 자본주의로부터 버림받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화이트칼라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피폐화 되어지는 데에만 초점을 맞출 뿐, 그런 현상이 왜 나타나고 있는지 원인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그나마 있는 설명이라고는 미국의 경제상황 악화라는 너무나도 단선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너무나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며 마지막 장에서 자위한다. 경영자들이 지금의 이러한 시스템이 기업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노조가 활성화 된다면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너무나도 파편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읽는 동안 사람의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이 책 속에 나와 있는 그들의 삶이 결국 내 미래의 모습이 아닐지, 아니 그러한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고 그런 삶을 갈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지 수많은 두려움이 내 마음 속을 어지럽혀 놓았다. 그렇지만 언제나 모순에 의해 세상이 변해가는 것처럼, 이러한 모순이 또 다른 세상을 펼쳐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상을 다시 그리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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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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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책 제목을 보고서 순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이루고 있는 두 명사, 노동과 운동 이 둘은 한국사회에서 희망이라는 단어와 결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동춘이 『전쟁과 사회』라는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성격을 규정짓는 가장 큰 바탕은 바로 반공이데올로기에 기초한 48년 체제이다. 이런 한국사회에서 신성한 ‘근로’라는 말 대신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녀석들은 친북좌파세력이며, 감히 ‘운동’을 하는 녀석들은 혁명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급진주의자였다. 그런 나쁜 것들을 모두 모은 ‘노동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악의 원천으로 취급 받고 있다. 그런 한국사회에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고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2003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시절 나는 뉴스를 핑계 삼아 공부를 하지 않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화물연대의 파업 그리고 어느 은행인지는 모르지만 한 은행의 파업을 보며 마치 애국자라도 된 듯 국가손실액을 들먹거리며 그들을 비난했었다. 그랬던 내가 그 다음 해 4월 30일과 5월 1일을 거리에서 보냈다. 무슨 투철한 의식이 있어서 430Mayday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이 사회에 분노해 있었다. 2003년 화물연대가 파업을 해서, 은행이 파업을 해서 입게 된 손해들을 상세히 보도했던 언론은 한진중공업의 김주익,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등 6명의 열사들이 왜 그 길을 가야만 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었다. 그 6명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언론에, 사회에 속고 있었다는 분노, 그 분노가 나를 430Mayday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에 고등학교 친구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나에게 했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지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야 편향되었던 내 사고가 중간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다.

한국사회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언론에 비추어진 세상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면이 많이 있다. 언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성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 앞에서는 언제나 심하게 기울어진다. 그러나 그 기울어짐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그것이 심하게 기울어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 사회의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앞으로 노동자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있을 경우,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언제나 노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에게 11.4%라는(연대 다음) 엄청난 등록금 인상률을 선보였던 총장이 부장급 직원들이 노조를 탈퇴하지 않는다면 단체협상을 할 수 없다고 하였고, 우리 학교(이문)에서는 교직원들의 파업이 벌어졌다. 당연히 그 파업으로 인해 도서관과 취업 관련 센터의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등 학생들에게 많은 불편이 돌아왔다. 이에 도서관과 취업 관련 센터 등 학생들과 긴밀하게 관련된 부서에 대한 업무재개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불편을 겪는 학생들이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의 요구가 노조의 파업중지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총학생회가 한 파업반대 행사 중 백지대자보가 있었는데 누군가는 ‘노조 X새끼’라고 적은 사람도 있었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노조위원장을 불태워 죽여야 한다는 등 정말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들이 오갔다. 이런 학생들의 모습은 분명 한국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 학교 학생들이 보여준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맞는 모습일까? 한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 너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지? 노조가 파업하면 그냥 별 관심 안 갖고, 그러다나 너희가 파업할 때 대봐, 아무도 너희한테 관심 안 가져... 이게 답이 아닐까?

최장집 교수는 『위기의 노동』서문에서 현재와 같이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해 노동이 배제되는 민주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동자들의 비중과는 다르게 노동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위상은 너무나도 낮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약간 상회할 뿐이고, 노동자들의 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은 전체 299석의 중 9석의 의석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언론, 자본 등 다양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노조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하며,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귀족노동자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몇 천 만원의 연봉을 받는 노동자들이 귀족이라면 수십억의 연봉을 받는 임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노조의 힘이 너무 강하다 하지만 단체행동을 위해 생계를 걸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를 당해도 지노위-중노위-···-대법원, 3년의 시간을 허비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사용자들에 힘보다 강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언론의 입장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노동운동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의견에 일견 동의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거리로 내쫓기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반면에 투기꾼들은 앉아서 불로소득을 챙겨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노동운동은 한국사회에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의 조건이 붙어야만 할 것이다. 노동운동이 자신들만의 임금을 올리기 위한 경제투쟁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운동이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80년대 노동운동이 곧 민주화운동이었듯이 지금 시대에서는 공익을 위한 실천이 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최근에 한겨레신문에서 우리 학교 86학번 임명배 선배님이 노조 위원장으로 계신 캠코에 관련해서 기사가 나왔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노조의 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경제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내의 비정규직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때, 노동조합의 투쟁이 사회적 공익을 요구할 수 있을 때여야만 노동운동은 한국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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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 2007-06-2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main.php
입니다.
건강하세요 ^^
 
영화가 된 철학
크리스토퍼 팔존 지음, 김성민 외 옮김 / 인간사랑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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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여 있는 공간에 돈을 내고 들어간다. 그 어두운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빛이 거대한 스크린에 투영될 때 모든 사람들은 오직 그 스크린으로 자신의 모든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와 같이 영화감독이 만든 그림자에 빠져든다. 20세기 중반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영화는 플라톤이 말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화란 실재의 세상과 동떨어져 사유를 방해하는 것으로서 악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의 횃불과 영화는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은 자신들이 바라보고 있는 횃불에 비친 그림자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지만, 우리는 영화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

마오쩌둥은 글을 모르는 인민들에게 정치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공산당 홍보 영화를 만들어 농촌을 돌아다니며 상영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단지 하나의 오락거리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세상은 감독이 설정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감독의 의지대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세상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감독이 생각하는 수많은 정치와 철학이 꿈틀거리고 있다. 지금처럼 영화(를 비롯한 영상물)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 속의 정치와 철학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횃불에 비친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가 된 철학』은 철학이란 삶의 구석구석에 대한 질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철학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일상성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과의 긴장 속에서 자신과 연계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영화를 철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영화를 단지 감독이 재구성한 또 다른 하나의 일상이 아니라 불편함과 긴장감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식, 존재, 윤리, 사회, 과학, 논리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다양한 영화들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면서 철학사에 족적을 남겼던 다양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설명한다. 책에서 사례로 드는 영화들이 거의 대부분 보지 못했던 영화라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이 책은 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잘 풀어 놓은 좋은 철학 입문서라고 생각된다.

결론 : 빨리 영화나 한 편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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