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여느 공간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입체적이다. 나무들이 당신을 에워싸고 위에서 짓누르며 모든 방향에서 압박한다. 경치를 가로막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한다. 당신을 왜소하고 혼란스럽고 취약하게 해놓은 다음, 마치 낯선 사람들의 무수한 다리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사막이나 초원에 서면 광활한 공간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반면, 숲에 서면 당신은 오직 그걸 감지하는게 고작이다. 숲은 거대하면서도 특징 없는, 게다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다.
- P75

몇 해 동안 미국인들이 차에 잔뜩 싣고 엄청난 거리를 달려 경이로운 자연풍광의 입구까지 와서 결국 원하는 것은 미니 골프를 하거나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이라는걸 간파한 상인들에 의해 이 마을은 번성했다.  - P164

이 15개 명소 중 9년이 지난 지금 남아있는 것은 3개밖에 안 된다. 대부분 다른 것들ㅡ신비로운 저택, 힐리빌리 골프장, 모형 자동차 경주장로 대체되었고, 이것들 역시 앞으로의 9년 동안 차례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미국식이기 때문이다. - P166

 미국에 있는 어떤 것도 그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상품이나 사업도 끊임없이 새로 개조하지 않으면 더 크고, 새롭고, 그리고 거의 항상 더 추한 것에 의해 잠식당하고, 버림받고, 밀려나고 만다. 그래서 오래된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좋은 것이다. 60년이 지나서도 조용히 숨쉬면서, 잘난 체하지 않으면서도 찬란하고, 창설정신에 충실하면서 세계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다행히도 의식하지 않은 채 버티어 오지 않았는가. 그건 정말 기적이다. - P168

브라질의 밀림에 살아 정글 너머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석기시대의 인디언들을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로 데려와 높은 건물들과 차, 지나가는 항공기, 자신의 단순한 삶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를 보도록 했을 때 오줌을 함부로, 그리고 일제히 누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제야 그들의 느낌에 공감이 간다.
기묘한 대조였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있을 때는 숲이야말로 무한한, 그리고 온전한 우주였다.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이니까. 실제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물론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 활발한 도시와 복잡한 공장들, 붐비는 고속도로가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눈이 미치는 범위 안의 모든 것이 나무인 곳에 있으면 숲이 지배를 한다. 프랭클린이나 하이어왜시, 그리고 심지어 개틀린버그마저도 숲의 거대한 우주 속에서 그냥 잠시 도움을 주는 정거장 같은 곳에 불과하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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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떠나는 사람은 익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즐기고 함께 길을 가는 동행이나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외에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입장이 된 것을 즐긴다. 주저해왔던 일을 결행하기 위하여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길건 짧건 어느 한동안에 있어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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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과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그와 달리 걷기는 눈의 활동만을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아니 길이 거기에있기에 걷는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그것은 오직 순간의 떨림 속에만 있는 내면의 광맥에 닿음으로써 잠정적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는 행위다. 걷기는 어떤 정신상태,
세계 앞에서의 행복한 겸손, 현대의 기술과 이동수단들에 대한 무관심, 사물에 대한 상대성의 감각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즐기는 센스를 새롭게 해준다. 스티븐슨이 생각하기에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 P21

자동차 운전자나 대중교통의 이용자들과는 달리 발을 놀려 걷는 사람은 세상 앞에 벌거벗은 존재로 돌아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인간적인 높이에 서 있기에 가장 근원적인 인간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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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 P9

세계를 이해하고 남들과 나눔으로써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고유한 자질은 수백만 년 전 인간이라는 동물이 직립하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과연 인간은 직립하여 두 발로만 걷게되면서부터 손과 얼굴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렇게하여 수천 가지 운동이 가능해짐으로써 의사소통의 능력과 주변환경을 조종할 수 있는 여지가 무한히 확장되었고 그와 더불어 두뇌가 발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P9

인간이라는 종(種)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아 구랑은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류가 아득한 옛날부터 자동차를 타고 와서 땅 위에 내려서는 중이라고 믿고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지금까지 인간은 늘 똑같은 몸, 똑같은육체적 역량, 변화무쌍한 주변환경과 여건에 대처하는똑같은 저항력을 갖고 있다. 오만한 오늘의 사회는 그 오만 때문에 호된 벌을 받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이 가진 능력은 네안데르탈인들의 그것에 비하여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기 위하여 발로걸었고 지금도 걷는다. 인간들은 전신으로 세상과 싸우면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재화를 하루하루 생산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마도 인간이 개인의 육체적 기동성과 저항력을 오늘날의 사회에서만큼 적게 사용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걷기, 달리기, 헤엄치기 등 육체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에서 생겨나는 인간 고유의 에너지가일상생활 속에서 노동, 장소 이동 등과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일은 극히 드물어졌다.  - P10

도시의 혼잡과 그 혼잡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상의 무수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동차가 일상생활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우리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거의 남아도는 군더더기 장식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조건은 움직이지 않는 앉은뱅이 조건으로 변하여 그 나머지 일들에는 온갖 인공 보철기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오늘날 육체란 손보아야 할 비정상적 대상 혹은 다듬어야 할 초벌구이쯤으로 여겨지는가 하면 심지어 육체를 제거해버리고자 꿈꾸는사람까지 있다한들 놀라울 것이 없다. 각 개인들은 여러 가지 활동에 있어서 육체적 에너지보다 신경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한다. 육체는 현대의 발뿌리에 걸리는 불필요한 장애물이다. 육체는 주위환경에 작용하는 그것 본래의 고유한 활동들의 몫이 제한된 만큼 점점 더 부담스러운 대상으로 변한다. 이처럼 육체의 중요성이 점차로 줄어들면서 인간은 세계관에 상처를 입고 현실에 작용하는 범위가 제한되며 자아의 존재감이 감소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약화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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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1934 1 1 태어난 전혜린 작가의 에세이다. 강경애 작가의 소금과 함께 빌려온 책인데, 이전부터 읽어볼까 하던 책을 강경애 작가와 동시대의 여성작가라는 이유로 함께 빌려와 그동안 밀어뒀다가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강경애 작가가 20세기의 시작 부근에 태어났다면 전혜린 작가는 그로부터 30 태어났다. 둘의 처지는 몹시 달라 법학자라는 꽤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로 유학을 떠난 최초의 여자일 것이다.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생의 한가운데' 번역한 사람이고, 강사, 교수로 살며 독문학을 한국에 소개한 최초의 여성이지 않을까 싶다.

완전히 다른 생을 여성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강경애 작가의 글은 너무 힘든 반면 전혜린 작가의 글은 나의 대학 생활이 떠오를 정도다.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 뮌헨의 슈바빙가에 대한 설명은 정말 나의 대학생활과 다르지 않아서, 그녀가 먼저 세계, 한국에서 전쟁이 나고 온갖 곳이 부서지는 동안 그녀가 다른 세계에 대해 그녀가 느꼈을 괴리감 같은 것들을 떠올려보게도 된다. 완전한 이방인이었을 것이나 정신적으로 세계에 편입될 있었던, 댄디한 세계를 먼저 처음으로 접한 한국 여성.

 

웃기게도 나는 거의 강경애 작가의 환경에 가깝게 태어났으나 가정의 극진한 애정과 기대로 예술대학을 다니며 전혜린 작가가 겪었을 법한 젊은 시절을 보낼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강경애 작가의 글보다 전혜린 작가의 글이 현실적으로 와닿는 면이 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나의 현실에 대한 불안은 다른데, 어쩌면 그녀는 조국의 현실을 그것으로 껴안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직은 초반을 읽고 있는데, 그냥 읽지 않고 반납할까 했던 책을 읽으며 나중에 소장할 있다면 소장하고 싶어졌다. 지금 시대에 살아도 같은 100 한국의 여성의 언어.

 

자기 삶을 미치도록 산다는 , 지금 기로에서 읽기 좋은 글이다.

 

글을 읽는 이유는 나의 상황을 조금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울림 속에서.

 

 

그리고 잠시 놓아두었다 김누리 교수의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읽고 책을 펼쳐들었다. 우연히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2권이었다. 김누리 교수의 글이 지금 시대의 독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전경린 작가의 에세이는 과거 전후 시대 독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가 살았던 대학가의 분위기, 그리고 지금 독일을 형성한 것들 사이를 생각하게 된다. 전쟁 우리나라, 급성장, 자본주의, 경쟁이 가득한 세상,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이유, 그리고 앞으로는 뭘까.

 

 

전혜린 작가의 글을 오늘(20200515) 모두 읽었다.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는 , 문장이 약간 어색할 때는 있지만 그건 시대에 유행한 양식일 하므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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