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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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강명 작가 책을 두 권이나 다 봤다.

거의 앉은 자리에서 독파 수준이다.


지난 주에 친구집에서 본 책은

<한국이 싫어서>


제목 백만 프로 공감

엎드려서 두, 세 시간 보니 다 본 듯 해서

이렇게 읽게 하는 힘은 뭐지 궁금해서


일요일 새벽 12시부터 5시까지 본 책은

<호모 도미난스>


그래서 오늘 엄청 힘든 하루였다ㅠ


예전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웃기지만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크루서블>(작가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이럴 수가. 유명한 아자씨인데...)

이런 책들을 밤에 앉은 자리에서 다 봤다.

그리고는 짝짝짝 박수를 쳤던 기억이 여러 번.

재밌어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고 읽다 보면 빠져들어서

그랬다.


<호모도미난스>는 이우혁의 <퇴마록>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꽤나 열심히 읽었는데

자율학습 시간에 읽다가 사회 선생님한테 이런 쪽지를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면 모를까 이런 책을 자율학습 시간에 왜 읽는 거니?'


그때는 무슨 이런 고리타분한 말씀을

이라고 생각했지만

읽어보니

도스토예스프키도 재미있다.

<죄와 벌>은 어느 살인자의 참회 이야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살해한 자식은 누구일까요

정도로 요약된다.

내용 자체는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여기 도덕적인 문제가 개입해 들어가며 주제가 확장되는 형식이다.

<퇴마록>은?

정말 열심히 읽었음에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충분히 다양한 역사적 고리들이나 맥락들이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왜 <호모도미난스>를 읽고 나서 떠오른 게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퇴마록>이었을까?


소설은 몇 번의 반전이 있다.

사건 해결의 핵심을 이루는 반전이다.


전체 내용은

내가 말하는 대로 따르는 마법(대신 전염병성 바이러스)를 얻은 자들의 이야기다.

과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가 이 소설의 중심


지배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배 욕망을 자제시키는 데 능력을 쓰는 사람도 있다.

주인공은 선한 자

그가 어떻게 호모도미난스가 돼서 맞서 싸우는가 정도로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맞서 싸우다 부딪히는 몇 번의 딜레마에서

반전이 중요하게 기능한다.

주인공 시현이 힘을  얻게 된다든가

쿤이 알고 보면 이쪽 편이었다는

반전이 그 주다. (이건 대박 스포일러이무니다ㅠ)

 

어딘가

영화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설정은 무엇이고 문학적인 설정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들어

까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페스트 역시 급박한 전개를 하면서도 이런 반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서다.

아직 다시 안 읽어서 뭐라 말은...)

어쨌든

실제 인생은 이런 반전이  없다

흐르는 대로 흘러간다.

내가 쌓은 탑이 나에게 무너지고

내가 쌓은 탑을 누군가 우러러 본다.

그러니까 실제 인생과는 다른 스펙타클

이런 측면에 '영화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 같다.

영화는 두 시간에 내용을 해결하기 위해 '반전'을 잘 사용한다.


그럼에도 소설은

흡입력 있고

어떻게  궁금하다.


그러나 소설을 덮어도 실은 상관없다.

 인생과는 무관하다.

(밤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덮어도 상관 없구나.)

소설 속에서 누군가 말하는 대로 하건 말건...

나는 내일 회사에 가야하고

아마 회사에서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고

고무줄처럼 늘어진 일상 속에서

끊어지지 않기 위해 버팅기는 힘 정도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이유는?

덮으면 다시 읽기 힘들다

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덮고 일주일이 지나면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설정은 휘발되고 인물은 누가 누군지 헛갈리므로

영화관에서 우리를 가둬놓고 어떤 설정인물들을 주입하는 것과 달리

소설은 덮으면 끝이다.

페북을 보고 네이버를 보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소설은 덮인 채로 그 자리에서 멈춘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 이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의 소설은

현실과의 관계성은 떨어지고

대단히 미적인 경우도 있고(<눈에 대한 백과사전>이 그런 게 아닐까)

내 현실은 그런 것들 속에서 수영하다가는

물에 빠져 죽기 십상이다.  


어쨌든

이 책은

결국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김진명퇴마록의 이우혁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캐릭터 면에서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던 한국 문학은 이제 장강명을 받아들인다.


 이유가 뭘까


물론 그런 한국문학의 보수성을 몹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약간  아쉬워지는 느낌도 있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가버린 건가

그런 탐미적인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던 시대는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같다.

요새는 차라리 에세이집을 보는 듯 하다. 잠깐 폈다가 덮어도 내용전개를 떠올릴 필요 없는.)


한편으로는 소설의 본래의 기능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래서 다음에 어쨌는데

라는  기능에 집중하는  수도

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싫어서>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밀접하게

지금  현실

말이다.

지하철에 낑기는 일상 속에서 존엄은 무너지고 모두가 그렇게 살며 

도저히 아무리 해도 이 일상은 내 힘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래서 다들 떠나고 싶어 하는

이 현실

말이다.

 

(이러니까 호모도미난스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나 싶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치열한 경쟁 현실이 호모도미난스 같은 인종을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누구나 공감할 법하다.)

소설 읽다가는 너 물에 빠져 죽어

라는 이 한국 사회 현실을 떠나는

나의 이상을 대신 실현해주는 한 주인공이 <한국이 싫어서>에 나온다.

카타르시스 파바박

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호모도미난스>도 그런 측면이 있구나.

내가 하라면 하는 사람들. 그게 뭐든 이유도 조건도 없이.


이 내 맘대로 되는 것 없는 세상에

장강명 소설이 잘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럼 나는 왜 옛날에 '마의산'이며 '크루서블'을 밤새서 읽었을까.

그때는 좀 더 여유로운 나날이었나.)





2015년 8월 1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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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백과사전 - 눈보라 속에 남겨진 이상한 연애노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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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도 소설이 가능하다는

아마 포스트모던하다는 표현을 수도 있을 같다

짧은 단락들

서로 아주 유기적이거나 이성적인 연관성은 떨어지지만 눈이라는 하나의 맥락으로 묶여있으며

감정적으로는 그외에도 어떤 결합이 보인다

설명하자면 많은 말이 필요하고 신비가 스러져버리지만(만지면 눈이 물이 되어버리듯이)

이대로 두면 아름다운

결정 같은

 

어떤 디테일들이 그리웠다.

소중히 여긴다는 그런 감정들이 들던 디테일

 

소설이 감정의 전염이라면

소설은 정말 연애소설인셈이다.

 

여름에 읽었는데 여름용 독서로도 좋다.

의도한 건 아닌데
무의식의 발현이었는지도
읽다보면
하얗고 차가운 눈이 저절로 떠오른다.



2015년 7월 3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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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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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만화 '뽀빠이'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말라깽이 올리브는 어느 날 먹성이 아주 좋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이렇게 외쳐요. "당신의 머리카락은 스파게티 가락처럼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 사이는 샌드위치 속의 베이컨과 계란 사이처럼 가까워요." 그때 저는 전문 용어로 돈오돈수의 경지에 고고히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보는 먹보같이 사랑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계산적인 사람은 계산적으로 사랑하고, 깨끗한 사람은 깨끗하게 사랑하겠구나.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이 뭔가를 아주 좋아하면 세상만사를 그걸로 설명할 수도 있구나.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돈을 좋아하는 사람 눈에는 세상이 온통 돈으로 보인다고. 그때 이후로 줄곧 제게 남은 문제는 하나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저는 뭔가를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하나의 사랑에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세계 전체를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모든 것에 답을 구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결국 디테일입니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디테일로 기억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사라 에밀리 미아노의 '눈에 대한 백과 사전'에 나오는 한 남자의 편지에서처럼요.

그래서 "책을 왜 읽어요?"라는 질문에 저는 무수히 많은 디테일로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충동, 능력, 게으름, 타성, 우정, 불안, 고통, 회한, 슬픔, 욕망, 상상력, 기억, 위로, 정체성, 공감, 재탄생, 창조, 이 모든 것에 대해서요. 저는 이러한 디테일을 책을 통해 조금씩 배운 듯 합니다. 저는 책을 읽고 한 발짝씩 나가며 거기서 배운 디테일들로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일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거래되는 세상에서 사랑만은 유일하게 거래할 수 없습니다. 사랑만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됩니다. 삶은 이 세계에서 내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어?"라며 삶을 수수방관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오늘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바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힘 있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아닐까요? 나의 삶은 유한하지만 애쓰고 있다는 것. 

p.16-18



나는  읽는  좋다시원한 바깥에서 나무는 한들거리고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뭉게뭉게한 데서 책이나 읽음 좋겠다는   소망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수밖에 없다책은 사유의 기록물이라인간이 사유하는 이유는원생동물처럼 사유하며 꿈틀꿈틀대는  아니라사유한 것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라결국  사유가 어떤 행위가 돼야 한다어떤 행위를 할까계속 책을 읽고 있는  아니라 그래서 이제  하지???

 

이게  읽기의 종착점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다르다사유하는 것과 행동하는 .

 

사유는 혼자 하는데행동은 누군가와 하게 되므로.



책은 특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보려는 데서 시작됩니다. 책은 말만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을 애써 표현하려는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 말하기 어려운 것이야말로 말을 하게 하는 열정의 토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삶에서 책이 차지하는 중요한 의미일 겁니다. 

-p.90


우리에겐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어떻게 생기는가 깊이 성찰했던 사람 중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자면 의지는 명령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 즉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혼의 무게로 치자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영혼을 단단한 핵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고유한 행성이 되고 또 그만한 무게와 자신만의 중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맘껏 세상에 흩뿌려 보지 못한 사랑의 무게, 열정의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지 때문에 편안함을 잃게 될 수도 있고, 단잠을 자지 못할 수도 있고, 수입이 줄어들 수도, 쓸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고 그것을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현실을, 그리고 시간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합니다. 

-p. 44

 

 요새 정혜윤 작가에게 관심이 생겨 행복해지려고 책을 빌렸다나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복하니까그러면서 배울 수도 있으니 좋아서 행복해서 빌렸지만결국 그렇다그래서 뭘하지?

 

경제적으로 말하자면구름 뭉게뭉게한 데서 책만 읽으면 배가 고파지고 그럼 배를 채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하지만 바깥으로 나가 행동하며 돈을 벌다보면내가 만나는 세상은 서글프다 작가의 책을 읽고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읽으며 시장의 논리라는 것은 전혀 별개임을 듣긴 했는데정말 시장의 논리는 아주 다른 별세계다그곳은 '' '이득이외의 다른 가치는 거의 소멸 상태인 곳이다나는 '시장 논리이외에 '다른 가치'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다들 정의를 말하고 인간성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힐링을 말하는데그가 행동하는 것은 '시장 논리' 따라서 '' 위해서만 행동한다다른 가치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아마 내가 말로 벌어먹고 사는 데서 살아서일 테지만그러니까 그들의 '' 그들의 '문자' 그들의 '언어' 그들의 '행동사이의 거리야말로 별세계라 나는  거리를 가늠하다 지쳤다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하게  사람처럼.

 

그래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 생각하는  말고 누군가를 만날 

 

그때말이다.

 


게으름은 '자기 자신을 얕보는 정신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남을 무시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도 무시합니다. 이 무시는 말로는 겸손의 모습을 띱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는 할 수 없어요.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알겠어요?" 자기를 무시하는 인간은 속으로 남도 무시하고 싶어 합니다. "너도 별 수 없는 인간이잖아."란 말이 바로 그런 겁니다. "너도 별수 없잖아." "인간은 누구나 그래." 이런 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말에서 전 생애에 걸친 변명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겐 좋은 능력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능력입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능력 말입니다. "무지하니 그만두겠어."가 아니라 "무지하니 더 해 봐야지.", "무지하니 배우겠어."라고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가 계속 노력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떤 분야에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가 하는 점입니다. 넘쳐 나는 재능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들라크루아는 화가는 천재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생각, 즉 지금까지 말해진 것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p.58-59



비극적이게도 세계와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없는 불일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각자 자신의 조건과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의 조건과 한계를 넘어섭니다. 이 근본적인 비대칭성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 살 수 있습니다. 선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 혹은 의도했던 것보다 놀라운 결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략)

실제로 우린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 중엔 알고 한 것도 있고 모르고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언가를(가장 중요하게는 자기 자신을) 죽이기도 하고 키우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게 한 마리를 바다에 돌려보내는 것도 모두 다 함께 오랫동안 행하면 진화의 흐름을 바꿔 놓습니다. '선택'이야말로 운명이란 말을 대신합니다. 요샌 운명이란 말도 너무 고전적으로 들립니다. ('운'이란 말이 더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는 것, 그래서 뭔가를 선택하는 게 바로 삶입니다. 

-p.66-69



  

 책에서도 "그렇게 살아도 돼요?"라는 질문으로 마지막을 맺는다.

 

그래도 된다가 답이다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내가 만난 세상은 내게 그렇다고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 바보 !" 오히려 내가 만난 세상이었다어쩌면 내가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해서일  있지만한들한들 책을 읽고 책에서 말해준 가치에 따라 행동하려 하면 자꾸 행동반경은 좁아져만 간다 

 

 

그러니까 너무 아름다운 얘기만 해서 때로 화가 났다.

 

 

 세상은  아름답지만  추악하기도 한데그것을 어쩌란 말인가요

 

계속 밀고 나가라구요?

 

정말요?

 

정말요?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고 어찌할 수도 없는 세계 속에서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연인이 세계입니다. 사랑하지만 경멸도 하는 연인이 세계입니다. 날 사랑해주었으면 하지만 받은 만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연인이 세계입니다. 우린 나름대로 불만을 안고 삽니다. 그 불만은 세계가 나를 충분히,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입니다. 

(중략)

우린 그렇게 고백합니다. 너무나 어리지만 노회하기 그지없는, 너무나 늙었지만 순진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향해. 자기 언어가 조금 섞인 낯선 언어로. 이 사랑을 멈출 수 없다고. -??

 

 

나는 여전히  단계다. (물론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해서겠지그래서  거야 마음이  커서  어떤 책을 찾겠지어떤 사유의 기록물을)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  빡치고 그런데도 좋고

 

그렇다.


좀 더 생각해보니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2015. 7. 2. 17:21

한 영화 감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쁜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너희들은 바라보기만 해. 보여주는 건 우리가 다 할 테니."라며 관객들을 구경꾼,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영화라고요. 그런 영화는 인간성에 위배된다고요. - P26

우리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은 원형이라고 할 만한 어떤 하나에서 시작되어 계속 덧붙여집니다. 능력을 사랑이란 말로 바꿔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엔 두 사람이 만나 셋이 되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동안 나머지 한쪽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어떤 것, 새로운 세계관이든 잊을 수 없는 경험이든 진리든 뭐든 제3의 것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최초의 만남에 뭔가를 계속 덧붙일 때 가능합니다. 최초의 만남, 감탄, 호기심에 계속 뭔가를 더하는 것, 나와 뭔가가 만나 새로운 것이 태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사랑하는 자의 능력입니다. - P55

인간은 간단한 질문 앞에 너무 많은 말로 대답하는 존재입니다. 그 너무 많은 말이 삶입니다. 삶이 게딱지라면 이것은 너무 많은 말을 담은 게딱지들입니다. 질문은 간단해도 대답은 길고 수다스러운 것, 선택은 단순해보여도 선택 이후의 행동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복잡한 것. 그것이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은 저에게 게딱지 무늬의 비밀, 수다스럽고 장황하게 펼쳐지는 삶을 보여줬습니다. - P71

레마르크의 ‘개선문‘에는 라비크가 조앙 마두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은 언제나 외톨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고독한 것만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근처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그렇게 고독한 것은 아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늦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책에 눈길을 돌립니다.

지금 우리는 "네가 무엇을 가졌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의 시대를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 상관 말고 나 좀 위로해 줘."가 유행인 시대를 산다는 게 더 맞을 듯도 합니다. - P215

거의 비슷하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뉴스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떻게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인 걸까요?
(중략)

"여기서 무엇이 나올지 누가 알 수 있겠어?" 참 놀라운 말 같습니다. 이 질문으로 인간을 바라보면, 인간이 그토록 다양한 삶을 살면서도 내밀하게는 그토록 비슷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속으론 그토록 비슷하면서도 삶은 그토록 다르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인간은 신의 무한한 변주"란 스피노자의 말마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신의 무한한 변주이면서 인간은 서로서로의 무한한 변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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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의 게임 클럽 오딧세이 (Club Odyssey) 1
올슨 스콧 카드 지음, 백석윤 옮김 / 루비박스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제목처럼 엔더는 게임을 합니다.

488페이지 분량 중 40페이지를 남겨둔 448페이지까지 엔더가 게임을 하는 내용입니다.

남이 게임하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다보니

스타크래프트 중계 방송을 예전에 열심히 보던 게 떠오르긴 합니다.

임요한 등 다양한 선수에게 열광하며 저도 꽤나 스타 중계 방송을 챙겨봤습니다.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략에 깜짝 놀라서 입니다.

각각의 캐릭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상대편의 특성까지도 전략을 짜는 데 데이터로 활용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략과 전략이 부딪히는 게임은 정말

엄청난 캐미폭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엔더의 게임에도

엔더가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녀석이 이번에는 어떻게 행동할까

관음증 환자들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들은 엔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게임을 승리로 이끌어낼까 궁금해 합니다.


스타크래프트 중계 방송에서도

저번에는 이런 전략으로 승리한 선수가 이번에는 어떻게 승리할까가 궁금했던 것을 보면

캐릭터라는 것을 아는 재미는 게임 관람의 즐거움을 증폭시킵니다.


게임 하는 엔더, 자꾸 엔더에게 더 복잡한 상황을 제시하며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고 엔더가 승리할 수 있을지를 즐기는 그라프

이 둘이 가장 대립되는 두 사람이므로

실제로 2013년 '엔더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엔더스게임에서도 해리슨 포드가 그라프 역을 맡았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엔더가 지켜야 할 지구와 엔더가 무찔러야 할 버거가 대립인 듯 그려지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적이 가장 큰 스승이라고, 적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실제 책 속에서 메이저 래컴이 읊는 대사이기도 한데요.


또한 엔더도 그라프의 속마음과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나는 그라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마음이 비뚤어진 뚱뚱이.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

들의 삶을 조종해서 기계적이고 완벽한 지휘관들을 찍어내는 냉혹한 인간. 당신은 원하는 지휘관을 얻을 때까지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겠지?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인류를 구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주인공 이 엔더란 아이는 작품 시작에서 아직 채 10살도 되지 않았습니다.

12살인지에 작품이 끝납니다.
때는 셋째를 낳는 것이 금지된 때
너무 머리가 좋은 유전자들을 낳는 까닭에(?) 이 집안에서는 셋째가 태어나게 됩니다.
아이에게 모니터를 달아 아이를 측정한 뒤, 군인으로서 자질이 있다 싶으면 지휘관으로 키우기 위해 데려가는 건데요.
정말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런 아동학대를!!!

이란 생각을 작가도 했기에,
실제로 엔더를 지휘관으로 키운 그라프 등은 아동학대 등의 명목으로 재판에 회부됩니다.

하지만 결국 난관에 봉착합니다.
엔더가 아니었다면 버거를 무찌르고 평화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라프가 엔더를 혹독하게 연습시키지 않았다면

지구인들은 영영 버거의 침입을 두려워하며 쓸데없는 군사비를 쏟아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실은 버거가 언젠가 침입해 지구인들을 말살시키는 데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이 더 적절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보면 버거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밝힙니다)
이런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엔더가 이미 버거들의 행성을 초토화시킨 이후이기에
아동학대 운운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도 세상도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결과가 나온 마당에야 그 부정적 측면에 대해 언급할 수 있지만
정말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그라프의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왜 엔더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들을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어. 난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난 살인자가 아니야! 당신이 원한 건 내가 아니고 피터 형이야. 당신이 나를 끌어들인 거야, 나를 속였어!"
그는 울부짖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 우린 너를 속였다. 그게 가장 중요했어." 그라프가 말했다.
"그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넌 해내지 못했을 거다. 그것은 우리를 묶고 있던 끈이었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버거들과 공감하고, 그들처럼 생각할 수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 부하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 부하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버거들에게 뒤지지 않는 전투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우리가 바라는 냉혹한 전투기계, 어떤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단다. 넌 알다시피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만일 네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버거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메이저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반드시 어린아이여야만 했단다. 넌 나보다 빨랐고 나보다 영리했다. 난 너무 늙었고 조심성이 많았지. 일단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온 마음을 바쳐 전쟁에 뛰어들지 못한단다. 하지만 넌 전쟁을 몰랐지. 우리가 그렇게 되게끔 했단다. 너는 과감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렸지. 네가 태어난 목적이 그것이었다."


누구나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고 올바른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헤치는 악마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어느 순간 내가 휘두른 용감이, 용기가 칼날이 될 때가 있습니다.
꼭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상처뿐이 아니라도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과 겹쳐 살다 보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나쁜 상사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실은 그렇게 돼 있는 거죠. 이건 예전 내 상사가 떠올라 써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용기나 용감을 휘두른 것도 아닙니다만.. 누구든 악으로만 간주하고 악을 처단한다는 듯이 행동할 수 없는 이유이죠. )


용감한 사람인 채로,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누구에게도 내 용기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기를
우리는 꿈꾸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그래서 저는 조용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뭘 해야할지 모르게 되었고요.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저는 뭐든 시작하면 꽤 열심히 하는 편인데

아무리 열심히 해보았자 결국

욕심쟁이 사장님 좋은 일 시키기

정도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뭐하려고 그렇게 해? 대충 해.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인생의 딜레마가

이 책에는 어느 정도 담겨 있습니다.

저는 천재도 아니고 인류를 위해 게임을 하지도 않지만요. 

엔더의 게임은 꼭 읽어야 할 SF 목록에서 1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오슨 스콧 카드라는 작가의 이름도 작품 제목도 생소해서
바로 읽었습니다.
마침 설명은 정치, 과학, 철학이 녹아들어간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 라고 하더군요.

400페이지 가량이 게임을 하는 내용이지만
엔더의 게임은
게임하는 자의 심리, 게임을 지켜보는 자의 심리 등등에서 탁월합니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인생에 대해 탁월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외에도 다양한 부분에서 작가가 깊이 생각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합니다.
예를 들면 적으로 나오는 외계생명체 버거
그들이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언어를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생각하면 다리가 움직이듯
그들은 다른 개체로 보이지만 한 몸입니다.
그래서 전략에 대한 논의 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보면, 인간은 전략이 있고 그 전략을 암호화해서 소통합니다.
이 소통 방식이 전쟁에서 핵심이라 암호를 푸는 게임이 전쟁 뒷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버거들은 소통하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훨씬 인간들보다 우세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 인간과 전쟁이 나면 인간이 지는 거겠구나
이런 디테일 면에서도 훌륭한 책입니다.


제가 SF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대단히 판타스틱한 것을 좋아하나 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미래사회라는 새로운 세팅에서
인간의 행동양식을 결정짓는 심리가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기본, 인간이 인간인 조건이
SF에서는 거의 드러납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인 거죠.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1984에서 그랬습니다. 정말 끔찍한 작품인데,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등을 SF는 실험합니다.
엔더의 게임 역시 그런 작품입니다.

결국 엔더는 버거들을 초토화시키고 그들의 대변인으로 우주를 떠돕니다.
'여왕이 깨어나고 평화 속에서 번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찾는 여행자가 됩니다.

한 천재, 한 게임광, 한 전쟁광
아마 실제 세계라면 그에 대해 아주 많은 수사가 붙고 그 수사 중에는
비난이 담긴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천재는 마음에 대해서도 천재적이라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 평화와 번영을 찾는 마음에도 천재적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 끝이라 하지요.
아무 미련이 없는 상태라는 것 같습니다.
아직 미련이 많은 엔더는 죽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찾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듯이요.


P.S.


노래 가사 중에 '꺼내먹어요'를 좋아합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이 부분 때문이지요.

엔더의 게임에도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집에 가고 싶어, 엔더는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


엔더는 집을 찾아 떠돌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책을 다 읽고

글을 다 썼지만

여전히 집에 가고 싶은데

거기가 어딘지를 모르겠는 상황은 변한 게 없습니다.


소설이 좋은 점은

인생이 그런 거니라

그러니 받아들여라

얘기해준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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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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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박수용 지음 / 김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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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날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호랑이가 오지 않는 날과 오는 날은 모두 단 하루의 차이다. 이 두 날이 만나는 경계선이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됨을 믿어야 한다. 두 달 동안 안 왔으니 이제 올 확률이 높아졌겠지, 석 달 동안 안 왔으니 내일은 올 확률이 더 높아졌겠지, 이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점점 집중도를 높인다.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닮았다. 마라토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어져서 결승선을 밟듯이 발걸음 하나 호흡 하나 가다듬으며 막판 스퍼트를 준비해야 한다.

두 날이 단절된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안 왔는데 내일은 올까?' 점점 회의에 빠져들고, 두 날이 연속된다고 믿으면 '호랑이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미리 준비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하나하나의 상황을 예측하고 배터리 하나, 물컵의 위치 하나까지 챙긴다. 오랜 기다림 끝에 호랑이가 와도 1.5볼트 건전지 하나가 없어 그냥 보내기도 하고, 선반의 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이렇게 사소한 하루하루를 준비하며 호랑이가 오기 전날, 호랑이가 오는 다음 날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을수록 임박했음을 믿는다.

기다림과 사소한 정성 사이를 오가며 세월을 보내다보면 예고 없이 문득 호랑이가 나타난다. 눈 덮인 수풀 사이로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호랑이가 스윽 나타나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뜻한 느낌이 뭉클 솟아오른다. 이 녀석, 아무 사고 없이 돌아왔구나, 자신의 주기대로 살아가는구나, 그런 안도감이 호랑이를 기다리고 자신을 기다린 세월에 스며들고 눈시울은 붉어진다.
야릇한 감상도 잠시, 안도감을 밀어내고 살아 펄떡이는 긴장감이 심장박동을 타고 서서히 흘러 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막판 스퍼트 하는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고 온몸의 모세혈관이 터질듯 야생호랑이를 영상 기록하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결승선을 빛살처럼 통과하고 나면 잠시 환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곧이어 마라토너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가고 호랑이도 언제 오기나 했었냐는 듯 소리 없이 사라진다. 심장 둥둥 울리는 환희에서 문득 깨어나 주변을 돌아보면 다시 마라톤의 출발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호랑이를 보려면 자신을 바라보며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고...... 다시 마음을 다독인다.
-p. 273



여기서 그가 기다리는 대상은 호랑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모든 간절한 기다림은 저런 식으로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호랑이로 은유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정말 호랑이를 기다리는 남자의 기록이다.
1년 중 6개월 동안은 제 몸이 들어가면 끝인 비트에 틀어박혀 20년째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pd 얘기다.

정혜윤의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그의 이야기를 읽었다.
어린 시절 매일 소를 몰았다는 그의 이야기와 호랑이를 기다리는 pd가 된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호랑이를 기다리다 보면 혼자 있다는 고독감에 처절해지다가
또 사회로 돌아오면 다른 방식으로 고독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돼서
호랑이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이 고독감에 대한 부분은 예스24 채널예스 인터뷰에서도 나온다)


정말 시베리아에서 시베리아호랑이를 기다리고 잠깐씩 만나는 이야기다 보니
도입 부분은 약간 시간을 끌게 됐다.
나는 한번도 본 적도 없는 지형에 대한 설명과 우수리 원주민들 이야기
6개월 동안 호랑이가 다니는 길을 추적다니고
나머지 6개월 동안은 그 추적한 루트의 비트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는 사람 이야기가 정말 있는 그대로 쓰여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숨막히는 비트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독서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언제 호랑이가 오나 하다
정말 호랑이가 오면 같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인가

문명과 자연 사이에 길을 잃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그의 고백은 인간 종에 대해 생각하게끔도 했다.

그냥 자연으로 젖어들고 싶게도 했다.
(6개월 동안 비트에 살 인내심도 없음에도ㅠ)


책은 그가 추적한 블러디 메리와 그의 자식들 천지백, 설백, 월백
그리고 설백과 월백의 아이들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인간과 호랑이로 대변되기도 하는 자연이 대비되기도 하고 어우러지도 하는 절묘한 순간들이
책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실체를 보지 않아도 그 자취만으로 믿는 것, 이런 것이 자연에 대한 믿음이다.


잠복은 눈으로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다리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무처럼 자연을 믿고 자연에 순응하면, 물고기가 물에서 아늑해하고 새들이 창공에서 자유롭듯이 한 평짜리 비트 속에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자연의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다. 쉬운 것 같지만 자연 속에서 이 마음을 지키기가 힘들다.

잠복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해준다.




채널 예스는 총 3편으로 이어지는 인터뷰를 싣고 있다. 모두 재미있고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글이다.


http://ch.yes24.com/Article/View/19325


저는 이런 교감을 위해 모두 은자隱者가 되자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과 이데올로기를 사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경쟁이 치열합니다. 생활을 해내기 위해선 그 경쟁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너머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종내엔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모든 생명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끔씩이라도 느끼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 흐름을 느끼면 개체는 다른 개체와 편안하고 인간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세월이 그것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1편


호랑이가 없는 숲, 문명 속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들 위에 신처럼 군림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충분히 상대하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존재가 있는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인간은 왜소해집니다. 호랑이가 오갔을 오솔길을 홀로 걷다 보면 서늘하고 날 선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우뚝 멈춰 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황량한 겨울바람이 산비탈을 쓸어 올리기라도 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 왜소해질 때 비로소 자연과 더 깊이 대화하고 세월을 더 넓게 보게 됩니다. 인생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삶과 죽음 같은 자연 속에 떠다니는 어떤 감성들, 세월을 가로지르는 긴 흐름들을 느낍니다. 숲 속의 호랑이는 인간을 자연과 세월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2편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긴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짧은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허무에도, 삶이 가져오는 생활에도 온전히 몸을 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짧은 흐름에 몸을 싣고 긴 흐름을 잊지 않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처음에는 물과 기름처럼 짧고 긴 흐름이 잘 섞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짧은 흐름과 긴 흐름을 섞는 방법이 경묘해졌습니다. 평소에는 개체의 생활이라는 짧은 흐름에 충실하다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기로에 서면 모든 개체에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긴 흐름을 기준 삼았습니다. 이것이 삶의 본질을 죽음이라는 허무에 빠트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하루하루의 생활을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제 마음의 많은 번민과 갈등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3편




2015. 6. 3. 17:57 

자연은 살아있는 영혼과 그 흔적들의 집합체이며 그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느낌들의 전체성이다. 느낌이라고 해서 단순한 추정이나 예감이 아니다. 인디언이나 우수리 원주민처럼, 오랜 세월 자연을 지켜보고 쌓아온 ‘객관적인 느낌‘이다. 숲에서는 이것이 곧 과학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흔적은 지표면에 남겨진 자취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은 존재의 하중을 자취라는 형태로 지구 표면에 남긴다. 이것은 냉정한 물리의 법칙으로 생명들이 대지에 남긴 삶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 자취는 생명의 과거를 추측하고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 P106

자취를 관찰하는 것은 ‘모호‘에서 ‘구체‘로 한 걸음씩 옮겨가는 일이다. 거듭 관찰하고 추적해 나감에 따라 불명확했던 자취는 점점 선명해져, 마침내는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것처럼 윤기 나는 하나의 작은 사실이 된다.하나의 사실은 새로운 사실에 연결되고 이렇게 작은 사실들이 조금씩 쌓여 결국 사실의 전체에 도달한다.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 사실의 미래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자취를 쫓는 것은 그 주인의 존재 양식을 쫓는 것이며 나아가 자연현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 P111

모든 자취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다. 바람은 자취를 쓸어버리고 비는 자취를 씻어버리며 눈은 자취를 덮어버린다. 숲 속의 청소부들은 온갖 생물의 사체를 해체하고 세월은 계절의 흔적조차 소리 없이 지워버린다. 자연은 생명들의 자취를 녹여 스스로 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나마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뼈다. 다른 자취들은 시간의 흐름과 기후의 침식에 따라 곧 사라지지만 뼈는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그 모습을 오래 유지한다. 뼈는 한 생명이 남기는 마지막 자취다. 그래서 뼈의 자취는 뼈들의 세계, 그 너머로 이어진다. 숲 속에서 뼈를 발견하면 오래전 한 생명이 내쉬었던 숨결이 다가온다. 그 뼈가 살아생전 지녔을 투쟁과 감성의 흔적을 마음속 깊이 느낀다. 뼈는 숲 속의 역사이며 불후의 고전이다. 고전을 읽고 마음이 울리듯 뼈에서 숲의 역사를 읽고 영감을 받는다. 자취란 물리적인 것이면서 때로는 영혼을 울리는 영적인 것이기도 하다. - P111

그래서 고귀한 자취들은 늘 마음속에 남아 영원의 주변을 맴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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