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박수용 지음 / 김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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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날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호랑이가 오지 않는 날과 오는 날은 모두 단 하루의 차이다. 이 두 날이 만나는 경계선이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됨을 믿어야 한다. 두 달 동안 안 왔으니 이제 올 확률이 높아졌겠지, 석 달 동안 안 왔으니 내일은 올 확률이 더 높아졌겠지, 이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점점 집중도를 높인다.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닮았다. 마라토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어져서 결승선을 밟듯이 발걸음 하나 호흡 하나 가다듬으며 막판 스퍼트를 준비해야 한다.

두 날이 단절된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안 왔는데 내일은 올까?' 점점 회의에 빠져들고, 두 날이 연속된다고 믿으면 '호랑이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미리 준비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하나하나의 상황을 예측하고 배터리 하나, 물컵의 위치 하나까지 챙긴다. 오랜 기다림 끝에 호랑이가 와도 1.5볼트 건전지 하나가 없어 그냥 보내기도 하고, 선반의 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이렇게 사소한 하루하루를 준비하며 호랑이가 오기 전날, 호랑이가 오는 다음 날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을수록 임박했음을 믿는다.

기다림과 사소한 정성 사이를 오가며 세월을 보내다보면 예고 없이 문득 호랑이가 나타난다. 눈 덮인 수풀 사이로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호랑이가 스윽 나타나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뜻한 느낌이 뭉클 솟아오른다. 이 녀석, 아무 사고 없이 돌아왔구나, 자신의 주기대로 살아가는구나, 그런 안도감이 호랑이를 기다리고 자신을 기다린 세월에 스며들고 눈시울은 붉어진다.
야릇한 감상도 잠시, 안도감을 밀어내고 살아 펄떡이는 긴장감이 심장박동을 타고 서서히 흘러 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막판 스퍼트 하는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고 온몸의 모세혈관이 터질듯 야생호랑이를 영상 기록하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결승선을 빛살처럼 통과하고 나면 잠시 환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곧이어 마라토너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가고 호랑이도 언제 오기나 했었냐는 듯 소리 없이 사라진다. 심장 둥둥 울리는 환희에서 문득 깨어나 주변을 돌아보면 다시 마라톤의 출발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호랑이를 보려면 자신을 바라보며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고...... 다시 마음을 다독인다.
-p. 273



여기서 그가 기다리는 대상은 호랑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모든 간절한 기다림은 저런 식으로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호랑이로 은유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정말 호랑이를 기다리는 남자의 기록이다.
1년 중 6개월 동안은 제 몸이 들어가면 끝인 비트에 틀어박혀 20년째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pd 얘기다.

정혜윤의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그의 이야기를 읽었다.
어린 시절 매일 소를 몰았다는 그의 이야기와 호랑이를 기다리는 pd가 된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호랑이를 기다리다 보면 혼자 있다는 고독감에 처절해지다가
또 사회로 돌아오면 다른 방식으로 고독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돼서
호랑이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이 고독감에 대한 부분은 예스24 채널예스 인터뷰에서도 나온다)


정말 시베리아에서 시베리아호랑이를 기다리고 잠깐씩 만나는 이야기다 보니
도입 부분은 약간 시간을 끌게 됐다.
나는 한번도 본 적도 없는 지형에 대한 설명과 우수리 원주민들 이야기
6개월 동안 호랑이가 다니는 길을 추적다니고
나머지 6개월 동안은 그 추적한 루트의 비트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는 사람 이야기가 정말 있는 그대로 쓰여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숨막히는 비트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독서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언제 호랑이가 오나 하다
정말 호랑이가 오면 같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인가

문명과 자연 사이에 길을 잃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그의 고백은 인간 종에 대해 생각하게끔도 했다.

그냥 자연으로 젖어들고 싶게도 했다.
(6개월 동안 비트에 살 인내심도 없음에도ㅠ)


책은 그가 추적한 블러디 메리와 그의 자식들 천지백, 설백, 월백
그리고 설백과 월백의 아이들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인간과 호랑이로 대변되기도 하는 자연이 대비되기도 하고 어우러지도 하는 절묘한 순간들이
책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실체를 보지 않아도 그 자취만으로 믿는 것, 이런 것이 자연에 대한 믿음이다.


잠복은 눈으로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다리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무처럼 자연을 믿고 자연에 순응하면, 물고기가 물에서 아늑해하고 새들이 창공에서 자유롭듯이 한 평짜리 비트 속에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자연의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다. 쉬운 것 같지만 자연 속에서 이 마음을 지키기가 힘들다.

잠복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해준다.




채널 예스는 총 3편으로 이어지는 인터뷰를 싣고 있다. 모두 재미있고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글이다.


http://ch.yes24.com/Article/View/19325


저는 이런 교감을 위해 모두 은자隱者가 되자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과 이데올로기를 사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경쟁이 치열합니다. 생활을 해내기 위해선 그 경쟁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너머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종내엔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모든 생명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끔씩이라도 느끼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 흐름을 느끼면 개체는 다른 개체와 편안하고 인간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세월이 그것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1편


호랑이가 없는 숲, 문명 속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들 위에 신처럼 군림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충분히 상대하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존재가 있는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인간은 왜소해집니다. 호랑이가 오갔을 오솔길을 홀로 걷다 보면 서늘하고 날 선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우뚝 멈춰 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황량한 겨울바람이 산비탈을 쓸어 올리기라도 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 왜소해질 때 비로소 자연과 더 깊이 대화하고 세월을 더 넓게 보게 됩니다. 인생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삶과 죽음 같은 자연 속에 떠다니는 어떤 감성들, 세월을 가로지르는 긴 흐름들을 느낍니다. 숲 속의 호랑이는 인간을 자연과 세월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2편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긴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짧은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허무에도, 삶이 가져오는 생활에도 온전히 몸을 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짧은 흐름에 몸을 싣고 긴 흐름을 잊지 않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처음에는 물과 기름처럼 짧고 긴 흐름이 잘 섞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짧은 흐름과 긴 흐름을 섞는 방법이 경묘해졌습니다. 평소에는 개체의 생활이라는 짧은 흐름에 충실하다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기로에 서면 모든 개체에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긴 흐름을 기준 삼았습니다. 이것이 삶의 본질을 죽음이라는 허무에 빠트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하루하루의 생활을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제 마음의 많은 번민과 갈등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3편




2015. 6. 3. 17:57 

자연은 살아있는 영혼과 그 흔적들의 집합체이며 그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느낌들의 전체성이다. 느낌이라고 해서 단순한 추정이나 예감이 아니다. 인디언이나 우수리 원주민처럼, 오랜 세월 자연을 지켜보고 쌓아온 ‘객관적인 느낌‘이다. 숲에서는 이것이 곧 과학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흔적은 지표면에 남겨진 자취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은 존재의 하중을 자취라는 형태로 지구 표면에 남긴다. 이것은 냉정한 물리의 법칙으로 생명들이 대지에 남긴 삶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 자취는 생명의 과거를 추측하고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 P106

자취를 관찰하는 것은 ‘모호‘에서 ‘구체‘로 한 걸음씩 옮겨가는 일이다. 거듭 관찰하고 추적해 나감에 따라 불명확했던 자취는 점점 선명해져, 마침내는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것처럼 윤기 나는 하나의 작은 사실이 된다.하나의 사실은 새로운 사실에 연결되고 이렇게 작은 사실들이 조금씩 쌓여 결국 사실의 전체에 도달한다.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 사실의 미래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자취를 쫓는 것은 그 주인의 존재 양식을 쫓는 것이며 나아가 자연현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 P111

모든 자취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다. 바람은 자취를 쓸어버리고 비는 자취를 씻어버리며 눈은 자취를 덮어버린다. 숲 속의 청소부들은 온갖 생물의 사체를 해체하고 세월은 계절의 흔적조차 소리 없이 지워버린다. 자연은 생명들의 자취를 녹여 스스로 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나마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뼈다. 다른 자취들은 시간의 흐름과 기후의 침식에 따라 곧 사라지지만 뼈는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그 모습을 오래 유지한다. 뼈는 한 생명이 남기는 마지막 자취다. 그래서 뼈의 자취는 뼈들의 세계, 그 너머로 이어진다. 숲 속에서 뼈를 발견하면 오래전 한 생명이 내쉬었던 숨결이 다가온다. 그 뼈가 살아생전 지녔을 투쟁과 감성의 흔적을 마음속 깊이 느낀다. 뼈는 숲 속의 역사이며 불후의 고전이다. 고전을 읽고 마음이 울리듯 뼈에서 숲의 역사를 읽고 영감을 받는다. 자취란 물리적인 것이면서 때로는 영혼을 울리는 영적인 것이기도 하다. - P111

그래서 고귀한 자취들은 늘 마음속에 남아 영원의 주변을 맴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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