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페이드 인)
불이 켜지면 바람구두가 뒤뚱거리며 걸어들어와 먼지가 가득한 서재의 창고문을 연다.

효과음 : 삐거억~

먼지가 풀풀 날리고, 거미줄까지 늘어진 서재보관함.

바람구두 : 안녕, 나의 보물창고야! 맨날 끝도한도없이 읽고 싶은 책들을 밀어넣어서 미안하다. 오늘은 간만에 네 문을 열어 그간 내가 보관시켜둔 책들이 무엇무엇인지 살펴보려고...

보관함 : 주인님! 무척이나 오랫동안 찾아주시지 않더니 오늘은 간만에 문을 열어 바깥 공기와 대면하게 해주시네요.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매일 밀려드는 서적들 때문에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고요. 또 요새는 신간 서적만 읽으셔서 혹시 예전에 밀어넣었던 책들을 잊으신 건 아닌지 많이 염려했어요.

바람구두 : 하하, 관함아! 발터 벤야민은 "모든 책은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거든. 비록 그 때는 내가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밀어넣었던 책이라도 나중에 가서 이건 좀 아니다 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것도 책의 운명이니까.

보관함 : 그야 그렇습지요. 하지만 주인님!
벤야민은 또 이런 말도 했지요.
"작가들이란 책을 사지 못할 만큼 가난하기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 수는 있어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에 대한 불만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님이 책을 계속해서 불러들이는 건 결국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지 않나요?


바람구두 : (헉, 너 누굴 닮아서 그리 똑똑한 거냐. 혹시 서재보관함은 인공지능A.I?) 
아, 관함이여!
네가 알라딘에 적을 두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꾸만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닮지도 않은 것이 그런 말을 해서야 쓰겠니?
그렇다고 네가 램프의 요정처럼 어디가서 돈 많은 공주를 물어다주는 것도 아니잖아(볼멘 소리로).


게다가 네 말대로 벤야민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내가 읽어대는 책들에 대해 다른 작가들처럼 불만이 많은 사람은 아니란다.
물론 나도 책을 읽고 그에 대해 비평을 하거나, 불만을 이야기하고, 저자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많지.
그래서 때로는 그런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기도 해.
하지만 궁극적으로 만약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죄다 맘 편하게 구입할 수 있고,
하루종일 그 책들에 파묻혀 읽어댈 수 있는 조건만 갖춰진다면 나는 절대로 책을 쓰는 일이 없을 거다.


보관함 : 아, 주인님! 주인님은 너무나 겸손하시군요.
그럼, 구두 주인님의 책읽기란 결국 세계평화나 변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의 쾌락에 봉사하는 순수한 수단이란 뜻으로 보아도 될까요.


바람구두 : (기특하다는 듯)쉬잇, 이 녀석아 남들이 들을라.

보관함 : 주인님!
주인님이 지금처럼 계속 쌓아만 두고 빼가지 않으시면 언젠가 저는 폭발하고 말 거라구요.
아니면 가난뱅이 주인님을 떠나서 다른 주인을 찾아갈지도 모르고요.


바람구두 : 아, 너와 들인 정이 몇년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 그러면 내가 어찌하면 좋겠냐?

보관함 :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겠어요.

바람구두 : 그런데 어째 네 표정이 메피스토 처럼 변하냐?

보관함 : 흐흐, 우선 말인데요. 지금껏 집에 쌓아놓고 안 읽은 책들을 죄다 헌책방에 팔아버리시는 겁니다.

바람구두 : 그리고?

보관함 : 그리고는 뭐가 그리고예요. 그리고 그 돈으로 보관함에 쌓인 책들을 사는 거죠.

바람구두 : (서재 모서리를 발로 차며)넌 지금 헌책방이 무슨 은행인 줄 아냐?
게다가 내가 모은 콜렉션들이 헌책방에 팔아버리면 별거 아니어도
내게는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런 험한 말을 하고 그래.
그게 벤야민까지 인용할 줄 아는 관함이가 진정 할 소리냐, 시방.


보관함 : (다리를 건달처럼 떨면서)그게 힘들면 '이주의 마이리뷰'라도 타든지?

바람구두 : 그거 지금도 하냐? 그리고 은근히 말 까네, 이게!

보관함 : 헤헤, 글쎄요.  저도 요즘 바깥 세상 돌아가는 데는 둔해서요.
그럼, 좀더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각종 이벤트를 남발하세요.
예전에 자기 생일이라고 사람들에게 "나 책 사줘" 이벤트 하신 적 있잖아요.
그때 보관함 대방출이 일어났던 거 기억 나시죠.
이번에도 생일이라고 하세요. 아니면 뭐 생일로부터 100일 째 뭐 그런 이벤트도 있잖아요.
즐찾 1111명 돌파 이벤트나 아니면 15만 방문 돌파 이벤트 뭐 그런 거 해서
알라딘의 착한 서재인들의 등골을 빼먹는 거죠.
헤헤, 사실은 그게 구두님의 장기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바람구두 : 관함아!
다 좋은데 그 파리새끼처럼 두 손 모아 비비면서 말하는 것 좀 그만두면 안 되겠니?
헉, 관함아! 너 지금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거 티내는 거 알지.
이러다 내 기분 잡치면 서재 폐쇄하는 수가 있다.


보관함 : 주인님, 그런 심한 말씀을...하시다니... 그동안 묵묵히 지내온 쇤네, 너무 슬퍼~요오~

바람구두 : (긁적긁적) 음, 좀 심했나. 하긴 네가 말한 게 대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무리 내가 뻔뻔하고 파렴치한이라도 좀 너무하잖아.
게다가 한두 번은 먹혀도 그걸 연속적으로 했다간 결국 서재마을에서도 쫓겨나고 말거야.


보관함 :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흠, 최종해결책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바람구두 :(반색하며) 그게 뭔데...

보관함 : 흐흐, 마눌님을 등치고, 조이고, 쥐어짜세요.

바람구두 : 암전!
(마이클 잭슨의 노래 <Beat It!>이 흘러나오며 둔탁한 타격음)


다시 불이 들어오면 무대 위엔 정적만이 흐른다. 보관함의 문은 어느새 닫혀 있고 바람구두 홀로 걸어나오면서...

바람구두 : 오, 저주여! 너 운명의 발걸음이여!
어찌하여 너는 내게 지옥의 아귀 같은 갈증을 주었는가....
(웩, 이런 대사는 어쩐지 안 어울려...)
에이, 젠장 다시는 보관함을 열어보나 봐라! 퉷퉤퉤....


바람구두, 고개를 떨군 채 무대 뒤로 걸어나간다.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는 무대...
'관함아! 쥐어짠다고 될 일이면 벌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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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9-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대단해요. 난 역시 구두님의 이런 입담 좋은 페이퍼가 좋더라!
바람구두님의 책에 대한 욕망은 어디까진가요? 희곡도 쓰시는군요.
제가 웬만해서 추천 남발 안하는 거 아시죠? 그래도 이 페이퍼는
그냥 지나치면 안될 것 같구려!

바람구두 2007-09-18 12:50   좋아요 0 | URL
하하, 희곡은요, 무슨...
예전에 영화 시나리오는 대여섯 편 써 본 적이 있긴 하지만요.
하지만 스텔라님을 위해선 몇 편 더 써야 할 듯 ...
아닌가 추천을 위해서...

stella.K 2007-09-18 13:26   좋아요 0 | URL
저를 위해 써 주신다면 구두님 보관함에 무슨 책들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관함이가 배가 터진다고 하니 다이어트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정말요!!^^
아, 글구보니 연극대본이 아니라 시나리오였군요. 흐흐

바람구두 2007-09-18 13:4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

mong 2007-09-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ㄷㅋㄷ 그주인에 그관함이~

바람구두 2007-09-18 12:49   좋아요 0 | URL
사실은 간만에 보관함 좀 열어서 이제 구입할 마음이 가신 책들은 정리 좀 해보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이것이 토해내기 싫은지 정리만 하려고 하면 자꾸 다운이 되어서요. 서재가 앙탈 부리는 거죠, 뭐... 흐흐

mong 2007-09-18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보관함에 책이 많이 담겨 있으면 부담감이 팍팍 느껴져서요...
문득 다 비워내고 지금은 열권 남짓으로 유지하려고 해요
팔랑팔랑 ~~~

바람구두 2007-09-18 13:39   좋아요 0 | URL
아, 그건 정말 부럽네요.

2007-09-18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7-09-18 12:50   좋아요 0 | URL
하하, 향XX운님! 웬 비밀글이래요. ^^;;;
후폭풍이 장난 아니더군요.

마립간 2007-09-1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창고는 천권이 넘었어요. ㅜ.ㅜ
퍼가려했는데, 방법을 몰라. @.@

바람구두 2007-09-18 13:23   좋아요 0 | URL
저랑 비교해도 만만치 않네요.
보관함 상단에 보시면 엑셀 파일로 저장하기가 있습니다.
그걸로 퍼가시면 되네요. ^^

조선인 2007-09-1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주여! 너 운명의 발걸음이여!
--> 진짜 안 어울려요. 푸하하하하하하 =3=3=3=3

바람구두 2007-09-18 13:37   좋아요 0 | URL
웩, 퉷퉤퉤는 잘 어울리죠? 흐흐, 방구쟁이 아줌마!

바람돌이 2007-09-1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엌 안그래도 배터지는 보관함에 오늘도 쑤셔 넣었는데, 관함이가 저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니.... ㅎㅎ 근데 관함이가 몰랐던 것 - 로또를 계속산다가 있는데... 한번 해보시겠어요? ㅎㅎ

바람구두 2007-09-18 14:12   좋아요 0 | URL
음, 바람돌이님! 그걸 아셔야지요.
관함이는 알고보면 알라딘이 파견한 밀정이라고요.
흐흐, 책 사는 거 말고 헛돈 쓰는 걸 제일 싫어해요.
아하하...

바람돌이 2007-09-18 14:44   좋아요 0 | URL
어머나 헛돈이 아니라 엄연히 투자 아닌가요? ㅎㅎ 재생산을 위한 투자!! ^^;;

바람구두 2007-09-18 15:03   좋아요 0 | URL
그런데 왜 땀을 흘리고 그러슈~

2007-09-18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7-09-18 15:52   좋아요 0 | URL
흐흐, 판도라의 상자로군요.

마늘빵 2007-09-18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런 대화로 책에 관한 책 써도 되겠어요. 환타지 소설로. 크크.

바람구두 2007-09-18 18:06   좋아요 0 | URL
아프님이 해보세요.
판타지는 아프님이 강세일 듯 싶은데요.

마늘빵 2007-09-18 22:30   좋아요 0 | URL
아 저는 환타지는 별로 읽은 것도 없고... :)
소설은 끼가 있어야 할 거 같아요.

누에 2007-09-1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보관함이네요. ^^

바람구두 2007-09-18 18:06   좋아요 0 | URL
흐흐, 저의 '그로밋'이랍니다.
그로밋은 플라톤을 읽고 제 서재는 벤야민을 읽는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요.

비로그인 2007-09-1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만이 쓰실 수 있는 글 :)

멋쟁이-

바람구두 2007-09-19 10:05   좋아요 0 | URL
뵬 말씀을...

마노아 2007-09-1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의 특별한 날은 언제야요? 기꺼이 선물 드릴 수 있는데... 관함이 너무 귀여워요~ 바람구두님은 더 센스쟁이(>_<)

바람구두 2007-09-19 10:06   좋아요 0 | URL
아하하, 고마워요.
매일매일이 특별한 날이지요. 암암...

부리 2007-09-1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와의 대화를 빙자해 평소 하고싶던 말을 하시는 구두님... "마눌님을 조이고 쥐어짠다"

바람구두 2007-09-19 10:28   좋아요 0 | URL
헤헤, 눈치 깠수...
흐흐, 아직 총각인 부리님은 모르시겠지만
결혼한 남자들은 모두 자동으로 산유국의 주인이 된답니다.
쥐어짜면 계속 기름이 나오거든요.
물론 사람에 따라
그게 석유일 수도 있고, 참기름일 수도 있지만...
흐흐... 이 가을에 당신의 유전을 발견하시길...
뭐 저처럼 서로가 서로의 갱도를 탐하는 처지가 되셔도 좋고요.
제 유일한 로망이 등처가라는 사실은 누누이 밝혔는데요.
아하하하하, 부리님의 궁둥이는 정말 안습이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