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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는 꽃이다. 사상의 뿌리, 정치․ 제도의 줄기, 경제․ 사회의 건강한 수액이 가지 끝까지 고루 펼쳐진 다음에 비로소 문화라는 귀한 꽃은 핀다. 지금 한국 문화는 겉보기에는 화려한 듯싶으나 내실을 살펴보면 주체성 혼란, 방법론의 혼미로 우리 정서와 유리된 거친 들판의 가시밭길을 헤매고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야 한다. 문화는 선인들의 과거를 성실하게 배워 발전적 미래를 이어가는 재창조 과정이다. 문화의 꽃은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가 김홍도 시대에 못지 않은 훌륭한 사회를 이룰 때에만 피어난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다워져야 한다.
내 책장에는 많은 양의 책은 아니지만 비교적 다양한 분야의 책이 있다. 한 곳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기보다는 팔랑귀마냥 이게 좋다 그러면 이쪽을 기웃거리고, 아니다 저게 좋다더라 하면 또 저쪽을 기웃거린 탓이다. 어쨌든 소유하고 있는 책들은 책장 한 칸에 같은 분야의 책들을 묶어 정리하는 편인데, 한 권 두 권 뜸하게 사들이던 미술관련 책들이 어느 순간 한 칸을 넘어서 옆 칸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처음 접한 미술 책은 이명옥의 ‘팜므파탈’이었다. 이 책을 읽고 예술이라는 건 뭔지, 미술의 세계는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미술이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뒤이어 읽은 몇 권의 책으로 얻게 된 얄팍한 정보와 미천한 안목으로 반고흐전이다, 모네전이다, 클림트전이다 하는 등등의 전시회를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제야 접한 이 책은 나를 부끄럽게도 하고 자랑스럽게도 한다. 또 미소 짓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책의 표지를 보고서도 그렇다. 바늘보다 가는 붓으로 수천, 수만 번의 붓질로 완성한,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수양을 쌓은 마냥 조선의 호랑이를 그려낸 김홍도의 그림은 세계 최고의 호랑이 그림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지만, 이런 그림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기는커녕 격에 맞지도 않는 일본식 표구로 되어 있는 사진에는 가슴이 싸해지기도 하다.
단순히 외향만을 닮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우리 초상화의 가치, 다른 색으로 조금 더 쳐진 가지의 길이, 긁혀진 소나무조차 그냥 그려진 것이 아니며, 꽉 차있는 것보다 오히려 비어있음이 무릎을 치게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화가의 예술적 경지임을 말해주는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서양의 문화를 동경한 채 우리의 것을 등한시했던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일깨우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한국의 미 특강’ 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한국의 문화에 대해 깊게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실제로 청중들을 앞에 두고 강의 했었던 내용을 보충하여 엮은 책이다. 그래서 오히려 딱딱하지 않고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 술술 읽힌다. 미술에 대해서 깊은 지식이 있을 리 없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으니 내용도 어려울 리가 없다. 아주 쉽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면서도 깊은 무게감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식견을 높여준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우리 그림을 보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오른쪽에서부터 그림을 보다 도무지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는 당혹감에 부딪치고야 마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혼자서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가 지리도 잘 몰라서 한참을 헤매는 바람에 박물관 전체를 다 둘러보지도 못하고 그냥 내려와야만 했었다. 이제 그 국립중앙박물관을 반드시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오주석의 책을 읽었고, 그 때 내가 김홍도의 그림을 너무도 잘 못 보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그림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문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문화인 ․ 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눈높이만큼만 올라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