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님의 글입니다. http://hook.hani.co.kr/blog/archives/9458  아프님의 스크랩을 통해서 알게 된 글인데 좋네요.  

'강용석'비판이 정국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이 얘기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개운치 않은 점이 있었는데... 이 글을 보고 어느 정도 명확해졌습니다.  

아내나 여자 친구가 성폭력을 당한 경우 남성 파트너의 반응과 이후 커플의 관계를 살펴보면, 모든 권력이 그렇듯이, 권력의 편재(偏在)가 초래하는 어떤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아니, 더 큰 비극은 이것이 비극이라는 사실조차 공유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피해여성 못지않게 파트너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해자와 남성이 아는 사이거나 남성이 현장에 있었던 경우에는 파트너의 ‘상처’에 더 공감하기도 한다. 사건 이후 커플의 관계는 평소 애정과 신뢰도, 여성주의 의식(‘양성평등’의식), 사회적 환경, 남성의 ‘인격적 성숙’ 정도 등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피해여성보다 자기 고통에 더 몸부림치며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남성, 피해여성을 의심하고 학대하는 남성, 혼란과 자기 분열에 시달리다가 결별을 통보하는 남성, 문제를 회피하며 더욱 냉담하게 구는 남성 등 여성과는 다른 성격의 ‘고통’이 전개된다.

피해여성을 위로하고 보살피려는 남성도 많다. 그런데, 이때 남성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난 괜찮아”다. 남성은 이 말이 피해여성에 대한 사랑과 관대함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남성의 ‘자부심’ 섞인 예상과 달리, 많은 여성들이 이 말에 ‘폭발’한다. “뭐? 뭐가 괜찮아? 누가 괜찮아? 난 하나도 안 괜찮아!” 이처럼 남성이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 여성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근의 사례를 보자.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공적(公的)인 인격이자 정치적 위상이 높은 여성으로 간주되는 박근혜 의원. 그런 그녀의 ‘섹시함’을 구구절절 ‘칭송’한 강용석 의원에게, 나를 비롯한 여성들과 당사자는 모욕감을 느꼈거나 최소한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강 의원은 남성의 위치에서,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관록의 정치지도자를 성적인 존재로 환원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이는 현직 미국 대통령이 얼마나 흑인다운지 감탄하는 ‘호감’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과 같은 행동이다. 상대방에 대한 비하를 정작 강 의원 자신은 “왕아부”라며 “내가 이렇게 아부해도 되는지”, 반성(?)까지 하고 있다.

이 성별에 따른 ‘외국어’(‘젠더 방언’이라고도 한다)는 애초에 누구 때문에 만들어졌고, 누가 어떻게 통역할 것인가? 사실, ‘나는 괜찮아’는 ‘왕아부’ 만큼이나 심장한 의미가 있다. ‘나는 괜찮아’ 앞에 생략된 말은, “성폭력 피해를 입은(따라서 ‘더러운’) 너는 내게 미안해해야 하는데, 나는 속이 넓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괜찮아’는 내가 ‘상당히 괜찮은 남자’라는 뜻이다. 피해자, 그것도 사랑하는 파트너의 고난을 함께 하면서 가해자와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마치 ‘죄인(피해여성)’의 잘못을 사면한다는 태도로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피해자가 괜찮은가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를 내치지 않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를 피해자에게 인지시키고, 더 나아가 ‘남다른’ 자신에게 고마워하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남성은 생물학적 남성 개개인이 아니다. 여기서 남성은 시공간 제약을 받는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부분적 인식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보편적, 초월적 존재로 생각하는 권력자 혹은 알튀세적 의미의 주체(subject)다. 루스 이리가레이는 이런 남성을, “결핍을 결핍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타인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사는 자기 생각의 확장일 뿐이다. 따라서 자아의 경계가 없다. 자기 외부가 없기 때문에 자기 내부, 즉, 자아도 없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며 사회와 인간관계 안에서 자기 위치를 알 수 없는 허공에 뜬 존재다. 이런 사람은 타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眼下無人’) ‘남의 입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래서 타인이 “그게 아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크게 놀라면서 부인, 당황, 분노한다. 내 편이었던 세상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며, 상처받는다. 이때부터 가해자는 ‘피해자’가 된다.

강 의원 같은 사람은 민주당이나 진보 진영에도 있을 것이고, 그는 한국사회 ‘지도층’ 남성의 샘플일 뿐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여당에 대한 ‘정치공세’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 여론에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이 사건은 여야간 공방에 그쳐서는 안 되는 문제다. 강 의원은 권력층의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소통 불가능 사회의 면면을 모두 보여주었다. 가해자(violater)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자. 당 대표는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는 굉장히 자기중심적 발상이다. 이들은 피해를 규명하고 사과하는 대신, “우릴 걱정해주어 미안하다”는 ‘왕자병’ 증세를 보이고 있다. 왜 ‘피해국민’이 ‘가해정당’을 걱정한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정서를 못 읽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도취 수준의 착각이다. 이런 뉴스를 접했을 때 국민(여성)의 주된 정서는 불쾌와 모욕감,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이라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지, 가해자에 대한 “심려”는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의 제명 조치는 공당으로서 사죄하는 차원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10시간도 안돼 제명 조치를 취한 것은 당의 위기의식이라고 보면 된다”, “재보선 의식한 ‘꼬리 자르기’ ”, “선거용 제명” 등 한나라당의 자체 발언이나 “강 의원은 팀킬의 달인”, “자살 폭탄 테러”, “최대 피해자는 강 의원과 대통령 부부”라는 여론처럼, 자기 걱정과 보호만 몰두할 뿐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타인의 인권을 침해해서 징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당’을 망신시켰기 때문에, ‘우리’ 선거에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라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징계란 말인가? 재보선 후보를 위한 징계? 어떤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가해자의 행위와 이후 조치가, 같은 의식 구조와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라면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여성을 성적인 물체로 환원하는 행위를 자연스런 ‘사회 규범’으로 인식케 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의도인가?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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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페미니즘 시각에서 강자인)남성이어서인지 필자의 이야기 중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글의 도입부에 나타난 성폭행 당한 여성과 커플인 남성의 대응방식에 대한 서술은 다소 극화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난 괜찮아'라는 말을 할 때의 의미를 “성폭력 피해를 입은(따라서 ‘더러운’) 너는 내게 미안해해야 하는데, 나는 속이 넓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된다”라고 서술했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어쩌면 이러한 제 생각은 제가 자신을 지키려는(곧 남성으로서의 지위에서 파생되는 보수적인)성향 때문에 진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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