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페스트 (양장) - 194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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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갑작스럽게 범람한 전염병 때문에 봉쇄된 소도시 내부의 기록입니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불행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이야기지요. 어떤 지점에서는 굉장히 장르소설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가 떼죽음을 당하고 고양이와 개들이 사라지며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나가는 초반부는 전형적인 아포칼립스의 시작 같다니까요?!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적 도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굉장히 스피디하게 쭉쭉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엄청 재밌어요! 



2020년, 현재 진행형인 풍경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작은 항구도시에서 어느 날 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죽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해요. 이게 뭐지? 하고 조금 불쾌하게 여길 뿐이었다가, 점점 더 많은 쥐들이 시도때도 없이 나와서 죽기 시작하니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공포가 번져가죠.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동물들은 자연재해에 인간보다 더 예민하다는 말. 지진이나 쓰나미가 오기 전에 쥐떼가 막 도망간다거나 하는 말이요.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아니나다를까 한두 명씩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당국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의사인 리외는 전염병의 징후를 읽어내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도,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몇몇 의사들은 페스트라는 진단을 내리고, 당국은 약간의 논쟁과 무익한 토론 끝에 전염병 사태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병이 아직 발병하지 않은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오랑 시는 폐쇄돼요.


 의사 각자가 기껏 두세 사례밖에 겪지 않았을 때에는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이 모든 사례를 더해 볼 생각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합계는 참담했다. 겨우 며칠 사이에 죽은 자들의 수가 배가되었고, 따라서 이 기이한 병에 주의를 기울여 온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진짜 전염병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 p.51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전염병일 겁니다. 쥐가 매개체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옮기는 병이에요. 한때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다 쓸어버리기도 했었기에, 유럽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다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죠. 아마 그래서 작가도 이 병을 골랐겠지요. 이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작품 안팎으로 바로 이해가 되니까요. 높은 치사율을 보이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데다, 전염성도 강한 병.. 그리고 그 병의 발병으로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차단된 사회. 서로를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 격리하고, 그 방역 노력이 곧 생활이 되는 현장. 지금 우리의 모습과 꼭 닮아있죠? 페스트 속 오랑 시의 모습은 코로나 19가 터진 이후의 세계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와 '생활 속 거리두기'가 뭔지 아는 2020년의 한국 독자들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그래서 너무나 현재적인 이야기로 다가와요.  물론 한국 사회는 아직 오랑 시처럼 '락다운'을 한 상태는 아니죠. 하지만 인터넷으로 세계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금, 이미 완전 틀어막힌 채 외부와 일절 차단된 도시들을 우리는 여럿 보았잖아요.


  그래서 지금 <페스트>를 다시 보면,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감상이 됩니다. 아무래도 방역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특히 랑베르에 대한 평가가 좀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랑베르가 오랑 시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는 게 그저 '탈출'의 문제로 보였거든요. 랑베르가 껴안고 있는 건 '전쟁이 터졌는데 외국인이라 혼자서 빠져나갈 길이 있을 때, 친구와 동료를 버리고 가겠는가?' 하는 식의 도덕적 딜레마 문제 같았달까요.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건 '방역'의 문제인 거예요!  랑베르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건, 지금까지는 오랑 시 안에 갇혀 있던 페스트 균이 오랑 시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잖아요! 랑베르 하나 때문에 전 유럽이, 온 세계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거라구요! 오마이갓! 그런데 작중에서는 방역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이 모든 친구들이, 심지어 의사인 리외까지도 시 바깥으로 나가려는 랑베르를 묵인하고 또 응원합니다. 전염병의 시대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랑베르가 설령 그 구멍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방역에 구멍을 뚫는 데 일조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안 좋게 보였습니다. 랑베르는 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남아야 했어요! 참, 그 부분만큼은 등장인물 모두가 안일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누가 영웅인가

 페스트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선, 의사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리외가 자조적으로 얘기했듯,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건 치료나 회복이 아니라 진단과 격리입니다.이미 페스트에 노출된 사람들을 사실상 포기하는 거예요. 그저 아직까지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운 좋은 사람이라도 보호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죠.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시체가 쌓여 산이 되고, 더 이상 제대로 된 무덤조차 만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사람들은 절망에 익숙해집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해져요. 리외는 이것이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생각에 적극 동감해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도 끔찍하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게 되는 사회는 최악이에요.


 생전 처음 맞닥뜨린 불행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일시적인 불편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무기력해져요. 코타르처럼 과거가 뒤쫓아올 수 없는 상황에 기뻐 날뛰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파늘루 신부처럼 우리는 벌을 받고 있으며 모든 것을 신의 손에 맡기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인간이 있기도 하고, 리외나 타루처럼 적극적으로 방역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페스트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인간도 있습니다. 그랑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돕는 인간도 있고요. 다들 내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리외나 타루처럼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대부분은 리외처럼 병원에서 환자를 보지도 않고, 타루처럼 자원봉사자가 되어 현장에 뛰어들지도 않잖아요. 모두가 그렇게 앞장서서 나서는 사회는 아마 그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서술자는 이런 관점에서 그랑이 리외나 타루 이상으로 보건위생대에 활기를 불어넣은 조용한 미덕의 실재적 대표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랑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지녀 온 선의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답을 했다. 그는 다만 자질구레한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해 달라고만 부탁했을 뿐이다. - p.179


 그렇다. 인간은 영웅이라 부르는 사람을 본보기와 귀감으로 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이 이야기 속에 영웅 한 명이 정말 필요하다면, 서술자는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약간의 선한 마음과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이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이 보잘것없고 존재감 없는 영웅을 제안한다. - p.184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술자는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작가는) 리외나 타루보다 그랑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평소보다 조금 더 움직여서 도와주는 사람.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일상에서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보면, 최전선에서 방역에 힘쓰는 질병관리본부의 공무원과 현장 의료진이 아니라 생활 속 거리두기를 독려하고 철저히 지키는 시민을 더 추켜세우는 모양새가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 조금 의아해지기도 합니다. 앞장서서 싸우는 리외나 타루가 훨씬 더 영웅적으로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서술자는 리외나 타루를 추켜세우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선언해요. 이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을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편으로 쉽게 끌어들이기 위한 서술자의 전략일지도 몰라요. 모두가 리외나 타루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만, 모두가 그랑이 되는 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끝나지 않은 이야기

 <페스트>의 막바지에 이르러, 전염병은 갑자기 확 수그러듭니다. 문제는 의사들조차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바로 어제까지는 효과가 없던 약들이 갑자기 듣기 시작하고, 어제까지는 잘못되었던 환자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왔던 것처럼 갑자기 휙 사라져버려요. 이건 물론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더 이상 죽거나 아프지 않고, 사랑하는 이와 만나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동시에 언제라도 이 재앙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서술자는 이 점을 잊지 않고, 모든 게 끝났구나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쁨에 찬 이 군중은 모르고 있지만, 그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 p.410

  사실 <페스트>의 페스트는 전염병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악惡'으로 바꿔 읽을 수도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당시 독일 나치의 제국주의로 봐도 무방하고요. 알베르 카뮈 본인이 아예 그렇게 말하기도 했대요!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오랑 시는 나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를 상징하고, 리외와 타루가 조직한 보건위생대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의미한다"고요. 하지만 작가가 얘기했다고 해서 페스트라는 작품의 해석을 '전쟁'과 '침략'에만 가두는 건 가두는 건 좀 멋없는 일 같아요. '페스트'는 말 그대로 전염병이 될 수도 있고, 천재지변이나 혹은 모두가 마음 속에 어느 정도 품고 있는 무지와 악의로 해석할 수도 있잖아요~ 어쨌거나 우리가 끝내 온전히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일시적으로 그 패배를 유예시킬 수는 있는 대상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페스트> 속 페스트가 꼭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고 보면, 앞서 말한 '일상의 영웅'을 높이 평가하는 서술자의 태도나 우리가 눈을 돌리고 안심하는 순간 언제든지 다시 이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하는 엔딩이 훨씬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전쟁이, 독재가, 전염병이, 페스트가 다시 찾아올 수 있겠죠. 그리고 그때 무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눈을 뜨고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어야 하고요. 서술자는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고 싸우는 것만큼이나 페스트를 잊지 않고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아마 이게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핵심이 아닐까 싶네요.



 

 굉장히 흥미진진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 19로 온통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소설 속 오랑 시의 묘사를 고 있자니,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더라고요. 전염의 매커니즘이나 격리수용의 중요성 같은 것도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아무래도 '균'과 '병'에 대한 배경지식이 조금 더 늘어났다보니, 훨씬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예전에 <페스트>를 보셨던 분들도, 지금 다시 읽으시면 아마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되실 거라 확신합니다ㅎㅎ 고전을 읽는 건, 특히나 현재와 딱 맞아떨어지는 고전을 읽는 건 역시 즐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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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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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같은 경우, 제대로 각 잡고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워낙에 교과서로, 드라마로, 영화로, 소설로, 연극으로, 기사로.. 많은 분야에서 다양하게 접했던 내용인지라 어쩐지 읽어본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책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영조-사도세자-정조를 얘기할 때 <한중록>의 기록을 빼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영정조 시대가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2차, 3차로 가공된 컨텐츠가 엄청나게 많다보니 원문은 몰라도 그 내용은 익숙한, 그런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이번 기회에 혜경궁 홍씨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원문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영조, 차별하는 아버지

 영조가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두고 두 가지 시선이 혼재합니다. 영조가 당시 당파간의 싸움이나 정치적 지형을 고려해 결단을 내렸다는 정치권력적인 해석이 있고, 사도세자가 미쳐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정신병리학적 해석이 있죠. 지금은 보통 두 가지 전부 다 맞다고 보는데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후자에 무게를 더 많이 싣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래서 이런 놈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쳐낸 걸로 보여요. 어쨌든 세자를 죽여버려도 세손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왜 걸렸냐? 하고 묻는다면 영조는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여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다 영조 때문이다!' 싶다니까요? 영조는 좋고 싫음이 너무나 확실한 사람이었고, 자식들에 대한 편애와 차별이 심각했어요;; 빈말로라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좋은 아버지였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영조는 아동 학대범 수준이에요. 한 번 마음에 든 사람은 뭘 해도 예쁘게 보고, 한 번 마음에 안 든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밉게 여겼죠.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멀쩡한 사람이어도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영조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영조에게 여러 자식이 있었지만 끔찍히 사랑한 건 화평옹주와 화완옹주, 반대로 끔찍히 싫어한 건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입니다. 정말 신기한 게 이 4명의 자식들은 모두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자의 자식이라 사랑하고 싫어하는 여자의 자식이라 싫어한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거죠. 어쨌든, 영조는 정말 대놓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끔 차별합니다. 사도세자와 화협옹주가 너무 서러워서 둘이서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제일 맏이인 화평옹주가 "그러지 마시라"고 아버지를 타이를 정도였어요.


 예를 들어 영조는 안 좋은 일을 보거나 들으면 나쁜 기운이 붙는다고 해서 옷을 갈아입고서야 방에 들어섰는데 사도세자와 화협옹주 둘의 방으로 들어설 때는 옷을 일부러 안 갈아입습니다. 그냥 나쁜 기운 붙으라는 건지 뭔지;; 그리고 자기가 아끼는 화평옹주나 화완옹주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액땜을 해야 한다고 사도세자를 불러서 "밥은 먹었냐?"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을 하고는, 사도세자 목소리를 들은 귀를 물로 씻고 그 물을 화협옹주 처소에다 갖다 버립니다;;; 정말 악의가 느껴지지 않나요? 아니 그냥 밖에다 갖다 버리면 되지 그 안 좋은 기운이 담긴 물을 왜 꼭 옹주 처소에 버리게 하냐고요. 이건 정말 빙산의 일각입니다. 자기 자식 이렇게 미워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참..



사도세자 망가지다

 나중에 되면 하도 사도세자를 쥐 잡듯이 잡고 안 한 일도 했다고 자꾸 혼을 내니까, 사도세자가 그냥 다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잘못이 아닌 일도 영조가 혼내면 "네 제가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고 나와요. 어떻게 홧병이 안 나겠어요ㅠ 사도세자는 우물에 뛰어들어서 자살시도도 하고 우울증 증세도 좀 보이고 하다가, 영조 32년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해 영조 33년부터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는 불안증, 강박증에 더해서 정신분열이 왔다고 보여요. 헛것을 자꾸 보고 헛소리를 하거든요. 이때부터는 뭐, 그냥 답도 없는 내리막길이죠. 그전까지는 그래도 영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도세자가 나아질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더 이상은 그런 희망조차 사라집니다.


 보다보면 혜경궁 홍씨는 자기 남편이자 윗사람이자 운명공동체였던 사도세자의 잘못은 대체로 엄청 돌려쓰거나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편인데, 처음 내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자기를 찾아온 일은 워낙에 충격적이었는지 간단하게나마 기록하고 있어요.


 그 6월부터 경모궁(사도세자)께서는 화증이 더하셔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셨는데, 그때 당번 내시 김환채를 먼저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내인들에게 보이셨다.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그 흉하고 놀라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야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내인 여럿이 상하였다. - p.134

 사도세자가 혜경궁에게도 꽤나 폭력을 휘두르고 갖가지로 괴롭혔던 것 같은데, 그것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이다 보니 남편의 폭력을 아내가 고발하는 모양새는 부담스러웠겠죠. 하지만 상습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게, 나중에 사도세자 상태가 많이 심각해져서 어머니나 자식들한테도 행패를 부리기 시작해요. 그러자 혜경궁 홍씨가 '병환이 심하셔도 나에게나 괴롭게 구시지 어머님께는 그리 못하시더니' 하고 말하거든요. 그리고 딱 한 번 사도세자의 가정폭력을 서술하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영묘(영조)께서 거처를 옮기시는데 나가 보시지 않는다고 내가 서 있는 것을 소조(사도세자)께서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이 상하여 하마터면 눈망울이 빠질 뻔하였다. 다행히 그 지경은 면하였으나 눈이 커다랗게 붓고 상처가 대단하였다. 그래서 영묘께서 거처를 옮기실 때 작별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선희궁(사도세자의 생모) 얼굴을 뵈옵지 못하니, 떠나는 마음은 어찌할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죽고자 하였으나 세손을 버리지 못하여 죽지 못하였다. 갖가지 위태로움이 무수히 많았으니 그것을 어찌 다 쓰리오. - p.157~158

 저는 같은 여자로서 혜경궁 홍씨가 너무 안쓰러웠어요. 지금 보면 그냥 결혼 잘못하는 바람에 평생 마음고생 하는 여자의 수기거든요. 신분 높은 거 하등 쓸모없습니다. 남편이 점점 정신병으로 망가지면서 폭력 휘두르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왕세자비가 무슨 소용이에요? 조선시대니까 이혼은 꿈도 못 꾸죠, 그렇다고 정신병 걸려 폭력 휘두르고 사람 죽이는 인간을 다음 왕으로 받들어 모실 수도 없죠, 까닥하면 자기랑 딸아들 목숨까지 위태롭죠.. 어휴.. 그리고 자기 아들 죽인 시아버지가 며느리랑 손자 못 죽이겠어요? 이래저래 중간에 끼어서 살 길 찾아 구만리 하는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남편을 버리고 살아남다
 헤경궁이 진짜 대단한 게, 상황 판단력이 정말 끝내줘요. 사도세자가 아내의 그릇 반만 됐어도 아마 이 비극은 없었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일단 사도세자 곁에 있었는데도 영조의 미움을 피한 게 대단하죠. 영조는 예뻐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은 같이 예뻐하고 미워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은 같이 미워했는데, 사도세자 옆에서 평생을 함께 부대끼면서도 영조 눈밖에 날 행동을 거의 안 했다는 거예요. 몇번 야단맞은 일이 있긴 했는데 그것도 '사도세자를 말리지 않는다'는 식의 타박이지 혜경궁 본인의 허물은 아닙니다. 사도세자도 이것을 잘 알아서 "나는 미워 하시지만 자네는 귀여워하신다"고 몇번 말하기도 해요.


 사도세자 죽고 나서 영조를 처음 만나는 자리를 보면, 원망하거나 슬퍼하는 말 한 마디를 안 합니다. 사도세자를 편들거나 옹호하는 말도 안 해요. 그냥 "저희 모자가 살아있는 게 임금의 은혜입니다." 하고 납작 엎드립니다. 그러니까 영조가 자기 마음 편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옳다고 손을 잡아주고.. (근데 영조 진짜 염치없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남편 죽인 당사자한테 고맙다고 말하길 바라다니;) 조선시대니까 아내는 무조건 남편을 따르는 게 당연한 이치였고, 사실 당시 정서로 보면 이때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편들었어야 하는데, 그런 명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뒤에서 이때 세손이라도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몇번이나 강조를 해요. 아마 혜경궁이 남편을 버리고 목숨을 택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어릴 때 영조 곁에서 자라지 못해 서로 정이 안 붙어 이 사단이 났다 싶었는지, 영조한테 자기 아들을 키우라고 내줍니다. 방금 내 남편을 죽인 사람한테! 내 아들을 맡기다니! 으아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가끔씩만 아들을 만나는데, 정조가 어린 아이다 보니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고 울고 그러기도 하거든요? 그걸 보고 영조가 안되겠다고, 정조 놓고 돌아간다고 하면 얼른 "아래에 있으면 또 위를 그리워한다"고 데려가라고 권합니다. 혹시라도 영조가 서운해하면서 애정을 거둘까봐요. 그럼 또 영조는.. 흐뭇해하면서 정조를 데려갔대요.. (아 정말 읽을수록 영조가 싫어지는 Magic) 이렇게 아들을 제 품에서 키우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아들을 지킬키려고 애를 정말 많이 씁니다.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르는 데는 확실히 혜경궁의 기여가 큰 건 확실합니다. 정조 외에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 몇몇 세력이 난리를 쳤는데도 어쨌든 그걸 전부 방어하고 아들을 지키는 데 성공하거든요. 정치력이 남달라요. 영조의 속마음을 그대로 간파하고, 거기에 어긋나지 않게 정말 잘 하는데다, 당시 정치세력을 잘 살펴서 심지어 정적이라고 해도 집안 사람을 시켜 교류합니다. 그 덕에 나중에 친정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상황에서도 정조 하나만큼은 무사히 지킬 수 있었죠. 다만 그 과정에서 이래저래 홍씨 일가가 타격을 많이 받아서, 나중에 정조-순조에게 자기 집안 사람들이 모함을 받고 신분이 하락한 걸 다시 살펴봐줄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한중록>의 뒷부분은 주로 이 청탁(?)을 위한 서술이에요.



 워낙에 방대한 시간을 서술하고 있는지라,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록한 느낌은 아니고 그저 기억에 남는 사건 위주로 서술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디테일한 기록도 남아있기가 어렵고,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던지라 임금과 왕실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 있던 기록도 삭제했기 때문에 지금은 영조-사도세자-정조 시대를 파악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이라 감정적인 부분이 꽤 많아서 그건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 같아요. 혜경궁이 파악한 진실이 실제 역사와는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자기 아버지나 동생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다시 없을 충신으로 묘사하고 반대로 정적들은 소인배 무리로 평가하는데, 이건 당시 정치적 지형이나 상황을 살펴가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한 기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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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웃는 남자 (186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빅토르 위고 지음, 백연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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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정말 읽는 내내 '빅토르 위고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이건 좀 사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몇 줄 요약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줄이자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내용이거든요. 게다가 저는 이미 <웃는 남자>라는 작품을 뮤지컬로 만났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다 알아요. 그런데도 뒷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이런 게 소위 말하는 필력이겠죠? 새삼 역사에 남는 위대한 작가란 이런 거구나 싶어지네요ㅋㅋ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배경 묘사
 <웃는 남자>는 권력의 알력싸움에 휘말린 한 귀족 꼬마가, 얼굴이 완전히 훼손되어 버려지고, 그 얼굴을 팔아 광대로 살아가다가 다시 자기 자리를 찾는 내용입니다. 아주 거칠고 단순하게 요약하면 그렇죠. 하지만 읽다보면 정말 놀라운 게, 정작 주인공인 웃는 남자 그윈플렌에 대한 이야기보다 다른 이야기들을 훨씬 더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윈플렌을 키우는 우르수스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배경 하에서 컸는지, 그윈플렌 얼굴을 망가뜨린 콤프라치코스는 어떤 조직이며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당시 귀족들의 행태는 어떠했으며 그래서 귀족 사회의 유행은 무엇이고 그게 얼마나 부당했는지 등등.. 온갖 주변인물과 배경에 대한 묘사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정작 주인공이 겪는 사건은 아주 간단하게 서술하고 넘어가면서요.


 예를 들어 그윈플렌의 얼굴을 망가뜨리고 도망가는 콤프라치코스 조직원들이 바다에서 격랑을 만나 침몰하는 장면이 있어요. 뮤지컬에서는 초반 3분~5분 정도 안에 다 지나가버리는, 아주 간단한 사건입니다. 그윈플렌을 만들고, 버리고, 그리고 죽어가면서 혹시 모를 신의 자비를 기대하면서 그윈플렌의 비밀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죠.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 장면 하나에만 거의 140페이지 가까이 할애해요. 주요 줄거리에 별 영향도 못 미치는, 아동 납치범들이 바다를 떠돌다 죽어버리는 내용에 말이죠! 내용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 장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그 침몰하는 과정이 어찌나 긴박하고 드라마틱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지 저도 모르게 엄청나게 집중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주변 인물과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어느 정도냐면, 우르수스가 데아를 안아들고 "저런, 이 아이는 앞을 못 보는군!" 할 때가 이미 300페이지에요ㅋㅋㅋ 뭐 아무것도 안 했고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 그리고 그들을 키워주는 보호자 셋이 만나기만 했는데 이미 300페이지가 뚝딱 지나있습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전개가 더디면 짜증이 나거든요? 특히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의 경우 왜 이렇게까지 호흡이 느린가 싶은데, 빅토르 위고가 워낙 글을 맛깔나게 써서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주인공과 관련되지 않은 배경 하나하나도 전부 흥미로워요! 정말 대단한 능력이죠ㄷㄷ


 특히 뮤지컬을 보면서는 그냥 주인공의 보호자 정도로 인식했던 우르수스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저는 잘해줄 거면 그냥 잘해주는 게 낫다는 주의라 츤데레스러운 인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우르수스는 엄청나게 삐딱하게 말하고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좋아졌어요. 왜냐면 그는 행동으로 선(善)을 실천하는 사람이거든요. 모두가 굳게 문을 닫고 떠돌이 거렁뱅이 아이 하나를 외면할 때, 우르수스만이 문을 열고 자기 먹을 몫의 빵과 우유를 내어줍니다. 그윈플렌과 데아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호의를 베풀거든요. 그의 행동을 보다 보면 결국 그의 독설은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자기 방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별로 기분 상하지가 않습니다. 독설 전에 이미 상대에게 베푼 게 많거든요.


  그는 앉은뱅이를 치료해 두 발로 서게 한 다음 빈정거리며 한마디를 했다.

 "자, 이제 두 다리로 걷게 되었구려. 눈물의 골짜기에서 오래도록 걷기를 바라네!"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갖고 있던 동전까지 몽땅 털어서 건네주며 입속말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살아라, 불쌍한 것! 먹어라! 오래도록 살아라! 너의 도형수 신세를 짧게 끝내 줄 사람은 내가 아니지!"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능력껏 못된 짓을 저지르지." - p.46



귀족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웃는 남자> 속 그윈플렌은 결국 보통의 인간, 시민 그 자체의 은유 같아요. 고귀하게 태어났다는 건 아마 천부인권을 타고난 우리 모두를 말하는 걸 테고, 그런 고귀한 태생을 망가뜨리고 바닥으로 내팽개친 건 권력자들이죠. 그럼에도 고귀함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지만, 권력에 의해 또다시 무시와 조롱을 받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아예 대놓고 그윈플렌 입을 통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저의 눈과 콧구멍과 귀를 기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인류의 권리와 정의, 이성, 지성을 기형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소설 곳곳에서 신분제를 향한 차가운 분노를 느낄 수 있어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 독자들이 보기에, 당시 귀족들은 정말이지 혁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말이에요. 혁명, 혁명만이 답입니다! 그 정도로 귀족 행태가 어처구니 없어요. 아무리 신분 사회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백성들을 유린하고 인권을 개무시하는데도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에요. 제가 특히 경악한 부분은 귀족들의 클럽 문화였는데, 그 클럽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얼마나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고 민간인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가해자는 귀족이고, 피해자는 평민이죠. 결국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피해를 받은 사람만이 '운이 나쁜' 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얼마나 불의한지!


 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해를 끼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모호크 클럽의 회원은 누구나 한 가지 재능이 있어야 했다. 어떤 자는 '춤의 고수'였다. 그는 농민들의 장딴지를 칼로 찌르면서 그들이 깡충깡충 뛰게 하는 자였다. 다른 자들은 '진땀을 흘리게 하는' 일에 능숙했다. 우선, 손에 결투용 장검을 들고 여섯 내지 여덟 명의 귀족들이 한 부랑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원을 만든다. 사방팔방 가로막혀 있으므로 그는 어느 한 사람에게서도 도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부랑자의 등이 향하는 귀족은 검으로 그를 찌르니, 그는 팽이처럼 돌며 도망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그의 옆구리에 칼끝 공격이 가해지면, 그의 뒤에 도 다른 귀족 하나가 나타났다. 그렇게 계속해 각자들 찔러 댄다. 그렇게 칼로 된 원 안에 갇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충분히 돌고 춤을 추고 나면, 하인들로 하여금 몽둥이질을 퍼붓게 해 그의 생각을 바꿔 주었다. 또 다른 자들은 '사자 때려잡기'를 즐겼다. 그들은 웃으면서 지나는 행인을 불러 세운 다음, 주먹으로 코를 부서뜨린 후, 두 엄지손가락을 두 눈에 쑤셔 넣었다. 혹시 눈이 멀면 돈으로 배상해 주었다. - p.355


 이렇게 부패하고 찌든 사회인지라 귀족들의 취향이나 의식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괴벽이 엄청 심해지기도 하구요. 조시안 여공작은 그윈플렌의 기이한 외모와 미천한 신분에 매혹되는데, 이게 특별히 조시안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기형아, 추남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문화가 있었대요;;; 아주 상세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또 그런 와중에도 빅토르 위고는 공정성을 발휘해, 귀족들이 특별히 나쁘고 사악한 품성을 타고나 그런 게 아니라 단지 모든 것이 고정된 세계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일탈을 즐기고자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합니다. 한 마디로, 귀족은 그걸 가능하기 때문에 한다 그러니까 가능하게 하는 그 구조가 나쁜 것이라는 거죠.


 귀족들의 행태를 보면 결코 그들을 감싸줄 수가 없음에도, 나름 그들에게도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짚어주면서 꽤나 공정을 기한 편입니다. 데이비드 경, 일명 톰짐잭인 그 사람은 그윈플렌의 등장으로 모든 상속권을 다 잃게 되었는데도 그윈플렌에게 일방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옹호해요. 귀족들이 그윈플렌의 외모를 비웃은 건 무참한 일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가 받은 모욕을 대신해 결투 신청을 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윈플렌이 자기 어머니를 매춘부라고 부른 걸 잊지 않고 그윈플렌에게도 결투를 신청하지만요. 톰짐잭을 악역으로 만드는 게 훨씬 쉬울 테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미덕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당연히 귀족으로서 한계도 가지고 있고요. 그래서 인물들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느껴져요.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방대한 분량인데도, 눈 깜짝할 새에 읽게 되는 작품입니다.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운 두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습니다. 번역도 매끄럽고, 종이 촉감도 좋고, 무엇보다 표지가 진짜 너무 멋져요! 소장용으로 구매하셔도 충분히 그 가치를 할 만한 책이에요~ 다 보고 나니 뮤지컬로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빨리 삼연이 왔으면 좋겠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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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작은 아씨들 1 (189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영화 원작 소설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박지선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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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고전 <작은 아씨들>이 요즘 대세입니다. 영화며 연극이며 뮤지컬이며 온갖 장르로 각색되어 즐거움을 주고 있어요! 출판업계도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다양한 번역과 디자인의 <작은 아씨들>을 내놓고 있는 중이라,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이래저래 즐겁습니다. 그 와중에 더스토리에서 나온 초판본 시리즈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네요ㅎㅎ 초판본이라니! 비록 진짜 초판일 수는 없고, 그저 디자인만 같은 복각본이지만 그래도 그 시대의 정서를 느끼고 싶은 독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벨벳 버전과 민트 버전이 출시되었는데, 저는 상큼한 마치 가 자매들의 모습이 담긴 일러스트가 좋아서 민트 버전으로! 책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표지의 일러스트는 첫째 메그의 결혼식 때 장면이랍니다:)

 


이 중에 하나는 네 취향이겠지
 <작은 아씨들>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각각 놀랍도록 다른 네 명의 자매들일 겁니다. 아름답고 의젓하며 살짝 허영심이 있는 첫째 메그, 모험심 많은 장난꾸러기인데다 작가로서 출중한 재능을 가진 둘째 조, 조용하고 수줍음 많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셋째 베스, 그리고 누구보다 사교적이고 현실적인 막내 에이미까지! 이렇게 다양하고 생생한 현실 속 여자 아이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특히 고전일수록 소년의 성장담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소녀의 성장담은 적은 느낌이랄까요? 특히나 <작은 아씨들>이 출간될 당시에는 이런 경향이 더 심했던지라, 판타지가 살짝 뿌려진 소소한 일상 속 자연스러운 네 명의 소녀들에게 당시 독자들이 열광한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동안은 만나보지 못했던, '나 같기도 하고 내 친구 같기도 하고 내 이웃 같기도 한' 이 네 명의 소녀들을 응원하고 싶어졌을 테니까요!
 
 자매라 해도 각자의 성향과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른 관계가 쌓이게 되는데, 형제자매가 있다면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묘사가 펼쳐집니다. 모두가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는 없거든요. 사랑의 형태와 결과 농도가 조금씩 달라요. 예를 들어 막내 에이미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라임을 빚졌다고 할 때, 친구들 사이에서의 그 미묘한 알력을 헤아리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람은 메그일 수밖에 없죠. 남에게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가난하다고 무시받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메그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조나 베스는 에이미나 메그만큼 사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그런 부분에 신경을 덜 쓰게 되잖아요. 한편 조와 베스는 성격이 정반대라서 오히려 서로의 장점을 돋보이게 하고 단점을 상쇄시키는 조합이고, 고민이나 비밀도 모조리 털어놓는 친구입니다. 조와 에이미는 워낙 성격이 솔직하고 고집도 세서 맞부딪치는 일이 많지만 또 그만큼 미운 정이 많이 든 사이고요. 자매간의 약간은 미묘한 그 간극을 엄청 잘 표현해내서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와요.


 현대로 오면 올수록, 네 자매 중에서도 작가의 분신이자 사실상 주인공인 조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장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이니까요. 현대 독자의 눈에는 현모양처가 꿈인 메그나 조용하게 집에 틀어박혀 있는 베스 혹은 부잣집으로 시집가겠다는 에이미보다는 자기 능력으로 세상에 작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조가 더 멋지게 보일 수밖에 없죠. 가장 독립적이잖아요~ 유명한 작가들 중에서도 <작은 아씨들>을 읽으면서 조에게 자신을 이입했다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요. 물론 저도 어릴 때 조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작가의 원고를 불태운' 에이미를 무척 미워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 조에게도 결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 네 자매 중 한 사람이 된다면 조가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었죠.


 그런데 여러 장르에서 다양하게 변주된 내용을 접한 덕분일까요?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다른 자매들한테도 자꾸 눈길이 가더라구요. 특히 저는 베스가 자꾸 눈에 밟혀요. 누구보다 선하고, 다정하고, 배려심 많고, 언제나 기다려주는.. 영원히 소녀로 남게 된 우리의 천사! 영화에서 셋째인 베스를 일부러 가장 어린 배우로 캐스팅한 건,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베스만은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래요. 메그도, 조도, 에이미도, 결국 모두 떠나고 마는 집을 끝까지 지킨 아이. 조와 베스의 바닷가 장면만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나요ㅠ 어떻게 그렇게 어린 아이가 담담하게 자기 죽음 이후의 세계를 걱정할 수 있을까요? 조금은 더 제멋대로 굴고 아프다고 호소해도 좋을 텐데.. 베스는 그러기에는 너무 생각이 깊은 아이라 그게 너무 슬퍼요.
 


로맨스가 뒤섞인 성장담 
 1권이 워낙 유명해서 후일담인 2권이 살짝 묻히는 감이 있었는데, 요즘에 새로 출간되는 버전에서는 합본도 많아서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다른 장르로 각색할 때도 2권 내용까지 다 집어넣는 경우가 많고요. 그 덕분에 요즘 많은 분들이 새롭게 알고 가장 충격을 받으시는 부분이 아마 자매들의 러브라인일 텐데요~ 갑자기 로리는 조에게 차이더니 얼마 뒤 조의 여동생인 에이미와 결혼을 하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웬 듣도보도 못한 나이 많은 독일인 교수가 등장해 조를 낚아채고요! 아무리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지만, 1권 내내 조와 로리의 투닥거림을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독자로서는 약간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죠. 꼭 조와 로리가 이어져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들을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워요. 특히 저는 유교걸이라서(ㅋㅋ) 언니에게 열렬히 구애하던 남자가 마음을 바꿔 그 동생과 결혼한다는 게 영 껄끄럽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로리는 조보다 '마치 가'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치 가의 일원이 되고 싶다, 저 사람들이랑 진짜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사실 조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던 게 아닌가 싶은? 뭐, 동갑이기도 하고 가장 친하기도 한 조가 제일 우선순위였던 건 맞지만요. 만약 메그가 짝이 없었거나 베스가 건강했다면 그 둘도 로리의 상대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해요. 이렇게 말하면 에이미에 대한 로리의 사랑을 폄하하는 것 같지만, 정말로 그런 의심이 드는 걸 어떡합니까. 사실 로리의 할아버지인 로런스 씨는 원작에서 대놓고 마치 가의 딸이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로리와 에이미가 평생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그냥 로리는 옆집 소년 로리로 남아줬어도 좋을 것 같아요.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아쉬움이지만요.
 
 사실 올콧은 당시 많은 여성 문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조를 혼자 사는 독신 여성으로 그리고 싶어했대요. 그런데 <작은 아씨들> 1권 이후로 엄청나게 많은 독자들의 편지가 도착한 거예요. 조를 로리와 이어달라고요! 하지만 작가는 로리는 조에게 맞는 짝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조에게 적당하고 재미있는 짝을 찾아준 결과 베어 교수가 등장하게 됐다나봐요. 아무래도 여성이 결혼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이다 보니 그런 전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현대에는 베어 교수를 등장시키지 않거나 혹은 베어 교수가 등장한다고 해도 조가 작가로서 혼자 당당히 성공하는 결말로 각색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원작자 의도대로 여자 주인공이 결혼하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도 대중들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대가 온 거죠! 올레!
 


 어린 시절에 즐겁게 읽은 책을 어른이 되어서 새롭게 만나니 신기해요. 다시 읽으니 새롭게 보이는 것도 많고, 특히나 이런 고전은 다양한 버전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지다 보니 여러 가지 설정들이 머리 속에 뒤섞여 있었다가 원작을 읽고서야 정리되기도 하고요. 어디까지가 원작이고 어디까지가 각색인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영화나 연극, 뮤지컬, 드라마 같은 다른 작품을 보고 나서 보시면 더 흥미진진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소설 그대로도 여전히 근사하고 재밌는 작품이지만요. 여전히 생생하고 매력적인 이 네 명의 소녀들, 다시 만나면 또 한 번 사랑에 빠지실 수밖에 없으실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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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 물욕 먼슬리에세이 1
신예희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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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제목부터 강렬합니다. 얼마 전 SNS에서 화제가 되었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을 패러디한 제목이겠죠? 강렬한 제목에 어울리는 유쾌한 내용의 에세이입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개인의 경험을 담은 공감성 에세이인 만큼 원래 좀 쉽게 읽히는 편인데, 그걸 감안해도 너무 술술 읽혀서 좀 놀랐습니다ㅋㅋ 아마 책을 어려워하시는 분도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얇고 가벼운데다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의 책인데, 쉽게 읽히기까지 하니 금상첨화입니다ㅎㅎ


 아무래도 요즘은 돈을 아끼는 게 능사가 아닌 시대인 만큼, 어떻게 하면 돈을 잘 쓰면서 살 수 있는지에 다들 관심이 높은 것 같아요. 작가도 그렇고, 저도 마찬가지구요. 우리는 항상 뭔가를 소비하면서 살잖아요. 게다가 한 푼 두 푼 아낀다고 해도 미래를 도모할 만큼 큰 종잣돈으로 불리기에는, 지금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10년 벌어서 혹은 20년 벌어서 집을 살 수 있다고 하면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겠죠. 하지만 평생 모아도 집을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아득바득 아끼기만 하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에요. 사실 지금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소비는 그런 시대에서 탄생한 거나 마찬가지죠.


 어쨌든! 이왕 소비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사실 K국에서 금수저 아닌 집안에서 태어난 보통 사람들이 갑자기 뚝딱 흥청망청하는 소비자가 되기도 어렵습니다. 신예희 작가는 자신의 취향과 우선순위가 분명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나름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그리고 그가 겪은 실패를 독자들도 모두 크든 작든 겪기 때문에 이 글이 웃기고 공감가고 재밌어지는 거겠죠? 특히 1장 소비의 죄책감 - 내가 벌어 내가 쓴다는데! 꼭지는 구절구절이 명대사로 가득합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두고두고 아끼다가 똥이 되거나, 1+1이나 무료배송 문구에 혹해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지르거나, 대용량 물건을 잔뜩 사서 쟁여놓고 후회하는 경험은 누구한테나 있을 테니까요.


 단지 공감하면서 '맞아, 맞아' 하고 박수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왜 이런 소비 스타일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생각과 가치관으로 이렇게 소비를 하는지 또 만족스러운 돈지랄에는 뭐가 필요한지 일러주는 책입니다. 특히 작가가 강조하는 건 업데이트에요. 그냥 무작정 예전부터 이렇게 했으니까~ 하면서 뭔가를 하지 않고, 지금 현재 나의 상태와 감정을 잘 관찰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돈을 쓰라는 거죠. 20대와 30대, 40대의 자신에게는 우선순위가 분명 달라졌을 테니까요. 이건 바꿔 말하면 때로는 모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 좋은 것, 핫한 것, 인기있는 것! 부지런히 보고 듣고 써보고 해야 자신에게 딱 맞는 물건을 고를 수 있게 되니까요. 


 우선순위의 가장 맨 위엔 언제나 내가 있다. 무엇도 내 위에 있지 않다. 누가 뭐래도 그건 지킨다. 음식을 만들어 제일 맛있는 부위를 나에게 준다. 내 그릇엔 가 지은 새 밥을 담는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좋은 걸 몰아주지 않고 공평평하게 나누어 먹는다. 영 손이 가지 않을 땐 아깝다는 생각을 저접고 음식물쓰레기로 처리한다. 난 이거면 된다며 복숭아 갈비뼈를 앞니로 닥닥 긁어 먹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내 몸뚱이와 내 멘탈의 쾌적함이 가장 중요하다. 그걸 지키기 위해 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p.167)

 정말 멋진 선언문이에요! 특히 '난 이거면 된다며 복숭아 갈비뼈를 앞니로 닥닥 긁어 먹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부분이요. 작가님에게는 그게 복숭아 갈비뼈겠지만, 저한테는 누가 다 발라먹고 남은 생선 꼬다리 부분이거든요. 아마 책을 보시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어떤 것이겠지요. 이건 단순히 나에게 좋은 걸 준다, 내 기분이 좋은 걸 한다는 걸 넘어서서 자신을 궁상맞고 비참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는 거예요. 돈을 마구 쓰겠다는 것과는 다른 거죠. 스스로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겁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선언을 하고 그걸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원제는 <물욕>이었다는데, 드렁큰에디터에서 나올 두번째 에세이 가제가 <출세욕>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아예 '욕' 시리즈로 가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제목도 시의적절하고 매력적이지만요~ 끝에 미리보기 형식으로 <출세욕>의 몇몇 글이 앞부분만 조금 실려 있는데, 첫번째 책만큼이나 솔직하고 공감가는 글이 될 것 같더라고요! 시리즈로 10권이 나올 것 같던데, 다음 책도 기다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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