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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양장) - 194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갑작스럽게 범람한 전염병 때문에 봉쇄된 소도시 내부의 기록입니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불행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이야기지요. 어떤 지점에서는 굉장히 장르소설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가 떼죽음을 당하고 고양이와 개들이 사라지며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나가는 초반부는 전형적인 아포칼립스의 시작 같다니까요?!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적 도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굉장히 스피디하게 쭉쭉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엄청 재밌어요!
2020년, 현재 진행형인 풍경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작은 항구도시에서 어느 날 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죽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해요. 이게 뭐지? 하고 조금 불쾌하게 여길 뿐이었다가, 점점 더 많은 쥐들이 시도때도 없이 나와서 죽기 시작하니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공포가 번져가죠.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동물들은 자연재해에 인간보다 더 예민하다는 말. 지진이나 쓰나미가 오기 전에 쥐떼가 막 도망간다거나 하는 말이요.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아니나다를까 한두 명씩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당국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의사인 리외는 전염병의 징후를 읽어내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도,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몇몇 의사들은 페스트라는 진단을 내리고, 당국은 약간의 논쟁과 무익한 토론 끝에 전염병 사태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병이 아직 발병하지 않은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오랑 시는 폐쇄돼요.
의사 각자가 기껏 두세 사례밖에 겪지 않았을 때에는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이 모든 사례를 더해 볼 생각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합계는 참담했다. 겨우 며칠 사이에 죽은 자들의 수가 배가되었고, 따라서 이 기이한 병에 주의를 기울여 온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진짜 전염병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 p.51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전염병일 겁니다. 쥐가 매개체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옮기는 병이에요. 한때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다 쓸어버리기도 했었기에, 유럽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다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죠. 아마 그래서 작가도 이 병을 골랐겠지요. 이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작품 안팎으로 바로 이해가 되니까요. 높은 치사율을 보이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데다, 전염성도 강한 병.. 그리고 그 병의 발병으로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차단된 사회. 서로를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 격리하고, 그 방역 노력이 곧 생활이 되는 현장. 지금 우리의 모습과 꼭 닮아있죠? 페스트 속 오랑 시의 모습은 코로나 19가 터진 이후의 세계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와 '생활 속 거리두기'가 뭔지 아는 2020년의 한국 독자들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그래서 너무나 현재적인 이야기로 다가와요. 물론 한국 사회는 아직 오랑 시처럼 '락다운'을 한 상태는 아니죠. 하지만 인터넷으로 세계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금, 이미 완전 틀어막힌 채 외부와 일절 차단된 도시들을 우리는 여럿 보았잖아요.
그래서 지금 <페스트>를 다시 보면,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감상이 됩니다. 아무래도 방역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특히 랑베르에 대한 평가가 좀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랑베르가 오랑 시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는 게 그저 '탈출'의 문제로 보였거든요. 랑베르가 껴안고 있는 건 '전쟁이 터졌는데 외국인이라 혼자서 빠져나갈 길이 있을 때, 친구와 동료를 버리고 가겠는가?' 하는 식의 도덕적 딜레마 문제 같았달까요.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건 '방역'의 문제인 거예요! 랑베르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건, 지금까지는 오랑 시 안에 갇혀 있던 페스트 균이 오랑 시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잖아요! 랑베르 하나 때문에 전 유럽이, 온 세계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거라구요! 오마이갓! 그런데 작중에서는 방역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이 모든 친구들이, 심지어 의사인 리외까지도 시 바깥으로 나가려는 랑베르를 묵인하고 또 응원합니다. 전염병의 시대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랑베르가 설령 그 구멍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방역에 구멍을 뚫는 데 일조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안 좋게 보였습니다. 랑베르는 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남아야 했어요! 참, 그 부분만큼은 등장인물 모두가 안일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누가 영웅인가
페스트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선, 의사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리외가 자조적으로 얘기했듯,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건 치료나 회복이 아니라 진단과 격리입니다.이미 페스트에 노출된 사람들을 사실상 포기하는 거예요. 그저 아직까지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운 좋은 사람이라도 보호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죠.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시체가 쌓여 산이 되고, 더 이상 제대로 된 무덤조차 만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사람들은 절망에 익숙해집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해져요. 리외는 이것이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생각에 적극 동감해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도 끔찍하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게 되는 사회는 최악이에요.
생전 처음 맞닥뜨린 불행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일시적인 불편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무기력해져요. 코타르처럼 과거가 뒤쫓아올 수 없는 상황에 기뻐 날뛰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파늘루 신부처럼 우리는 벌을 받고 있으며 모든 것을 신의 손에 맡기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인간이 있기도 하고, 리외나 타루처럼 적극적으로 방역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페스트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인간도 있습니다. 그랑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돕는 인간도 있고요. 다들 내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리외나 타루처럼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대부분은 리외처럼 병원에서 환자를 보지도 않고, 타루처럼 자원봉사자가 되어 현장에 뛰어들지도 않잖아요. 모두가 그렇게 앞장서서 나서는 사회는 아마 그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서술자는 이런 관점에서 그랑이 리외나 타루 이상으로 보건위생대에 활기를 불어넣은 조용한 미덕의 실재적 대표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랑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지녀 온 선의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답을 했다. 그는 다만 자질구레한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해 달라고만 부탁했을 뿐이다. - p.179
그렇다. 인간은 영웅이라 부르는 사람을 본보기와 귀감으로 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이 이야기 속에 영웅 한 명이 정말 필요하다면, 서술자는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약간의 선한 마음과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이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이 보잘것없고 존재감 없는 영웅을 제안한다. - p.184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술자는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작가는) 리외나 타루보다 그랑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평소보다 조금 더 움직여서 도와주는 사람.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일상에서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보면, 최전선에서 방역에 힘쓰는 질병관리본부의 공무원과 현장 의료진이 아니라 생활 속 거리두기를 독려하고 철저히 지키는 시민을 더 추켜세우는 모양새가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 조금 의아해지기도 합니다. 앞장서서 싸우는 리외나 타루가 훨씬 더 영웅적으로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서술자는 리외나 타루를 추켜세우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선언해요. 이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을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편으로 쉽게 끌어들이기 위한 서술자의 전략일지도 몰라요. 모두가 리외나 타루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만, 모두가 그랑이 되는 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끝나지 않은 이야기
<페스트>의 막바지에 이르러, 전염병은 갑자기 확 수그러듭니다. 문제는 의사들조차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바로 어제까지는 효과가 없던 약들이 갑자기 듣기 시작하고, 어제까지는 잘못되었던 환자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왔던 것처럼 갑자기 휙 사라져버려요. 이건 물론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더 이상 죽거나 아프지 않고, 사랑하는 이와 만나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동시에 언제라도 이 재앙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서술자는 이 점을 잊지 않고, 모든 게 끝났구나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쁨에 찬 이 군중은 모르고 있지만, 그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 p.410
사실 <페스트>의 페스트는 전염병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악惡'으로 바꿔 읽을 수도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당시 독일 나치의 제국주의로 봐도 무방하고요. 알베르 카뮈 본인이 아예 그렇게 말하기도 했대요!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오랑 시는 나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를 상징하고, 리외와 타루가 조직한 보건위생대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의미한다"고요. 하지만 작가가 얘기했다고 해서 페스트라는 작품의 해석을 '전쟁'과 '침략'에만 가두는 건 가두는 건 좀 멋없는 일 같아요. '페스트'는 말 그대로 전염병이 될 수도 있고, 천재지변이나 혹은 모두가 마음 속에 어느 정도 품고 있는 무지와 악의로 해석할 수도 있잖아요~ 어쨌거나 우리가 끝내 온전히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일시적으로 그 패배를 유예시킬 수는 있는 대상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페스트> 속 페스트가 꼭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고 보면, 앞서 말한 '일상의 영웅'을 높이 평가하는 서술자의 태도나 우리가 눈을 돌리고 안심하는 순간 언제든지 다시 이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하는 엔딩이 훨씬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전쟁이, 독재가, 전염병이, 페스트가 다시 찾아올 수 있겠죠. 그리고 그때 무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눈을 뜨고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어야 하고요. 서술자는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고 싸우는 것만큼이나 페스트를 잊지 않고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아마 이게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핵심이 아닐까 싶네요.
굉장히 흥미진진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 19로 온통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소설 속 오랑 시의 묘사를 고 있자니,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더라고요. 전염의 매커니즘이나 격리수용의 중요성 같은 것도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아무래도 '균'과 '병'에 대한 배경지식이 조금 더 늘어났다보니, 훨씬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예전에 <페스트>를 보셨던 분들도, 지금 다시 읽으시면 아마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되실 거라 확신합니다ㅎㅎ 고전을 읽는 건, 특히나 현재와 딱 맞아떨어지는 고전을 읽는 건 역시 즐겁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