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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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명의 작가들이 그려내는 다섯 가지 이야기들은 제각각이지만 <좀비썰록>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아를 잃은, 인육을 먹는, 사람을 공격하는, 우리가 흔히 좀비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고전과 판타지와 호러의 결합이랄까요? 


 제 마음에 쏙 들었던 건 <사랑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 였습니다. 원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도 특유의 서울사투리가 아주 맛깔나게 그려져 있잖아요? 그 말투를 잘 살렸더라구요. 그러면서도 시집살이에 시달리고, 마을 사람들의 잔혹한 뒷담에 시달리고, 끊임없는 남편의 육체적&정신적 학대에 시달리고, 온갖 노동에 시달리다... 결국엔 못 참겠다! 하고 뚜껑이 열려버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쩜 그리 시원하던지! 그렇잖아요. 아직도 그렇게 사는 여성들이 많다는 걸 아는 입장에서,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말 그대로 자기를 괴롭혀왔던 모든 속박을 다 깨부수는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으면서 어찌 짜릿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ㅎㅎ 로맨스의 기운이 살짝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사실은 '지옥'을 탈출하려는 수단이었을 뿐이고, 결국 사랑방 손님은 옥희와 옥희 어머니를 두고 혼자서 도망가버리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도 엄청 웃겼어요.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떠나 도달할 곳이 어디든, 이 지옥보다는 행복했겠지요. 역시 해피엔딩이 좋네요.


 <관동행> 같은 경우에는 약간 애매한 것이, 관동별곡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관동별곡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을 보니 정철이 주인공인 것 같은데 또 읽다보면 정철은 주인공이 될 수가 없고 정 대감이라는 별개의 인물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정 대감이 정철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렇게까지 정철과 꼭 닮은 인생역정을 겪고 '관동별곡에서 다시 벼슬하는 부분까지 왜 그렇게 생략되어 있는 줄 너네 아니?' 같은 의문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걸까 잘 모르겠어요. 현대 국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인데, 워낙에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를 하셔서 저는 선생님이 사실은 이야기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직접 겪었던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영원히 죽지 않는? 좀비 같은? 그런 인간이라는 암시가 마지막에 나오지 않을까 했었는데- 저는 지나친 생각이었던 걸로^^ 하지만 단순히 수업 시간에 지루해하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한 썰 치고는 너무 장황하고 본격적이라서 이런 숨겨진 요소가 하나쯤 들어있었어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만복사 좀비기>는 읽는 내내 으악! 으악! 하는 고통스런 비명이 저절로 나오는 작품이었어요. 무서워서? 아니요. 슬퍼서? 아니요. 남자 주인공의 비호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요.. 어쩌다 보니 만복사라는 절에 갇히게 된 청년이 너무나도 혼인이 하고 싶어서(;;) 여자만 보면 안달복달한다는 내용이 그려져있는데, 여자 독자 입장에서는 단지 '치마를 둘렀단 이유만으로' 자기 혼인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면서 침을 질질 흘리는 남자를 보고서 불쾌함을 느끼지 않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상대방 의사는 생각도 않고 김칫국부터 마시면서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그저 '여자'로 여기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현실에서도 아주 흔하기 때문에.. 정말 주인공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엔딩에서도 웬만하면 안타까움을 느끼고 싶은데 전혀 그럴 수가 없더라구요ㅠ 학창시절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술술 잘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역시 똑같은 불쾌감을 느끼게 될까 궁금해졌어요. 시대가 변했고 제가 변했으니 역시 마찬가지이려나요?


 <운수 좋은 날>은 유일하게 현대 배경으로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전부 다 원래의 고전, 원래의 시간대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데 비해서 이 작품만 유일하게 지금 인터넷도 되고 스마트폰도 되는 시대에서 이야기가 진행돼요. 제가 <관동행>에서 기대했던 요소가 바로 이 작품에서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육식과 채식이라는 현대적인 쟁점을 좀비와 결합시켜서 극에 녹여낸 게 재밌었어요. 뒷이야기가 좀 더 이어졌어도 좋았을 텐데, 진실이 밝혀지고 세 사람이 모두 상황파악을 완료한 순간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아쉬웠습니다. 저는 이 뒤에 해환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그래서 결국 어떤 삶을 살지가 궁금하거든요! 정말로 엄격한 비건으로 살면,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요?


 <피, 소나기>는 절절한 멜로드라마죠. <소나기>는 첫사랑의 아이콘 같은 작품인데, 거기서 죽은 소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아이디어 정말 천재적이에요! 소년이 소녀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여전히 함께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위안이 됩니다. 실제로는 누구라도 그러기 힘들다는 걸 알아서 더 그래요.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선뜻 등을 내어주는 소년과, 자아를 잃고 피에 굶주려 미쳐 날뛰면서도 소년이 막아서면 얌전해지면서 등에 업히는 소녀.. 이 둘이 찐사랑이 아니면 뭐겠어요? 결국 원작의 마지막과 겹쳐지는 엔딩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처음 <소나기>를 읽었던 그 날처럼 마음이 아릿해집니다. 흑흑 얘들아.. 어른들이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


 익숙한 고전을 재해석해서 새로운 작품으로 만나는 일은 작가나 독자 양쪽 모두에게 위험부담이 적은, 재미있는 놀이 같은 경험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아서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부분들을 찾아내서 발견하고 거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은 작품 특유의 신선하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그 느낌이 정말 좋아요~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시도 환영합니다! 앞으로 꾸준히 다른 소재들로도 작업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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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안 2021-02-1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만복사 좀비기>가 자기 혼자만 사랑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여자라면 연애 상대, 결혼 상대로 보는 사람들의 환상을 산산이 깨 주는 작품이라고 봤어요. 여주인공은 한 번도 양생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준 적이 없고, 결국 양생은 퇴치 대상에 불과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