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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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같은 경우, 제대로 각 잡고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워낙에 교과서로, 드라마로, 영화로, 소설로, 연극으로, 기사로.. 많은 분야에서 다양하게 접했던 내용인지라 어쩐지 읽어본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책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영조-사도세자-정조를 얘기할 때 <한중록>의 기록을 빼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영정조 시대가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2차, 3차로 가공된 컨텐츠가 엄청나게 많다보니 원문은 몰라도 그 내용은 익숙한, 그런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이번 기회에 혜경궁 홍씨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원문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영조, 차별하는 아버지

 영조가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두고 두 가지 시선이 혼재합니다. 영조가 당시 당파간의 싸움이나 정치적 지형을 고려해 결단을 내렸다는 정치권력적인 해석이 있고, 사도세자가 미쳐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정신병리학적 해석이 있죠. 지금은 보통 두 가지 전부 다 맞다고 보는데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후자에 무게를 더 많이 싣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래서 이런 놈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쳐낸 걸로 보여요. 어쨌든 세자를 죽여버려도 세손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왜 걸렸냐? 하고 묻는다면 영조는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여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다 영조 때문이다!' 싶다니까요? 영조는 좋고 싫음이 너무나 확실한 사람이었고, 자식들에 대한 편애와 차별이 심각했어요;; 빈말로라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좋은 아버지였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영조는 아동 학대범 수준이에요. 한 번 마음에 든 사람은 뭘 해도 예쁘게 보고, 한 번 마음에 안 든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밉게 여겼죠.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멀쩡한 사람이어도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영조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영조에게 여러 자식이 있었지만 끔찍히 사랑한 건 화평옹주와 화완옹주, 반대로 끔찍히 싫어한 건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입니다. 정말 신기한 게 이 4명의 자식들은 모두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자의 자식이라 사랑하고 싫어하는 여자의 자식이라 싫어한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거죠. 어쨌든, 영조는 정말 대놓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끔 차별합니다. 사도세자와 화협옹주가 너무 서러워서 둘이서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제일 맏이인 화평옹주가 "그러지 마시라"고 아버지를 타이를 정도였어요.


 예를 들어 영조는 안 좋은 일을 보거나 들으면 나쁜 기운이 붙는다고 해서 옷을 갈아입고서야 방에 들어섰는데 사도세자와 화협옹주 둘의 방으로 들어설 때는 옷을 일부러 안 갈아입습니다. 그냥 나쁜 기운 붙으라는 건지 뭔지;; 그리고 자기가 아끼는 화평옹주나 화완옹주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액땜을 해야 한다고 사도세자를 불러서 "밥은 먹었냐?"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을 하고는, 사도세자 목소리를 들은 귀를 물로 씻고 그 물을 화협옹주 처소에다 갖다 버립니다;;; 정말 악의가 느껴지지 않나요? 아니 그냥 밖에다 갖다 버리면 되지 그 안 좋은 기운이 담긴 물을 왜 꼭 옹주 처소에 버리게 하냐고요. 이건 정말 빙산의 일각입니다. 자기 자식 이렇게 미워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참..



사도세자 망가지다

 나중에 되면 하도 사도세자를 쥐 잡듯이 잡고 안 한 일도 했다고 자꾸 혼을 내니까, 사도세자가 그냥 다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잘못이 아닌 일도 영조가 혼내면 "네 제가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고 나와요. 어떻게 홧병이 안 나겠어요ㅠ 사도세자는 우물에 뛰어들어서 자살시도도 하고 우울증 증세도 좀 보이고 하다가, 영조 32년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해 영조 33년부터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는 불안증, 강박증에 더해서 정신분열이 왔다고 보여요. 헛것을 자꾸 보고 헛소리를 하거든요. 이때부터는 뭐, 그냥 답도 없는 내리막길이죠. 그전까지는 그래도 영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도세자가 나아질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더 이상은 그런 희망조차 사라집니다.


 보다보면 혜경궁 홍씨는 자기 남편이자 윗사람이자 운명공동체였던 사도세자의 잘못은 대체로 엄청 돌려쓰거나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편인데, 처음 내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자기를 찾아온 일은 워낙에 충격적이었는지 간단하게나마 기록하고 있어요.


 그 6월부터 경모궁(사도세자)께서는 화증이 더하셔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셨는데, 그때 당번 내시 김환채를 먼저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내인들에게 보이셨다.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그 흉하고 놀라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야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내인 여럿이 상하였다. - p.134

 사도세자가 혜경궁에게도 꽤나 폭력을 휘두르고 갖가지로 괴롭혔던 것 같은데, 그것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이다 보니 남편의 폭력을 아내가 고발하는 모양새는 부담스러웠겠죠. 하지만 상습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게, 나중에 사도세자 상태가 많이 심각해져서 어머니나 자식들한테도 행패를 부리기 시작해요. 그러자 혜경궁 홍씨가 '병환이 심하셔도 나에게나 괴롭게 구시지 어머님께는 그리 못하시더니' 하고 말하거든요. 그리고 딱 한 번 사도세자의 가정폭력을 서술하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영묘(영조)께서 거처를 옮기시는데 나가 보시지 않는다고 내가 서 있는 것을 소조(사도세자)께서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이 상하여 하마터면 눈망울이 빠질 뻔하였다. 다행히 그 지경은 면하였으나 눈이 커다랗게 붓고 상처가 대단하였다. 그래서 영묘께서 거처를 옮기실 때 작별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선희궁(사도세자의 생모) 얼굴을 뵈옵지 못하니, 떠나는 마음은 어찌할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죽고자 하였으나 세손을 버리지 못하여 죽지 못하였다. 갖가지 위태로움이 무수히 많았으니 그것을 어찌 다 쓰리오. - p.157~158

 저는 같은 여자로서 혜경궁 홍씨가 너무 안쓰러웠어요. 지금 보면 그냥 결혼 잘못하는 바람에 평생 마음고생 하는 여자의 수기거든요. 신분 높은 거 하등 쓸모없습니다. 남편이 점점 정신병으로 망가지면서 폭력 휘두르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왕세자비가 무슨 소용이에요? 조선시대니까 이혼은 꿈도 못 꾸죠, 그렇다고 정신병 걸려 폭력 휘두르고 사람 죽이는 인간을 다음 왕으로 받들어 모실 수도 없죠, 까닥하면 자기랑 딸아들 목숨까지 위태롭죠.. 어휴.. 그리고 자기 아들 죽인 시아버지가 며느리랑 손자 못 죽이겠어요? 이래저래 중간에 끼어서 살 길 찾아 구만리 하는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남편을 버리고 살아남다
 헤경궁이 진짜 대단한 게, 상황 판단력이 정말 끝내줘요. 사도세자가 아내의 그릇 반만 됐어도 아마 이 비극은 없었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일단 사도세자 곁에 있었는데도 영조의 미움을 피한 게 대단하죠. 영조는 예뻐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은 같이 예뻐하고 미워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은 같이 미워했는데, 사도세자 옆에서 평생을 함께 부대끼면서도 영조 눈밖에 날 행동을 거의 안 했다는 거예요. 몇번 야단맞은 일이 있긴 했는데 그것도 '사도세자를 말리지 않는다'는 식의 타박이지 혜경궁 본인의 허물은 아닙니다. 사도세자도 이것을 잘 알아서 "나는 미워 하시지만 자네는 귀여워하신다"고 몇번 말하기도 해요.


 사도세자 죽고 나서 영조를 처음 만나는 자리를 보면, 원망하거나 슬퍼하는 말 한 마디를 안 합니다. 사도세자를 편들거나 옹호하는 말도 안 해요. 그냥 "저희 모자가 살아있는 게 임금의 은혜입니다." 하고 납작 엎드립니다. 그러니까 영조가 자기 마음 편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옳다고 손을 잡아주고.. (근데 영조 진짜 염치없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남편 죽인 당사자한테 고맙다고 말하길 바라다니;) 조선시대니까 아내는 무조건 남편을 따르는 게 당연한 이치였고, 사실 당시 정서로 보면 이때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편들었어야 하는데, 그런 명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뒤에서 이때 세손이라도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몇번이나 강조를 해요. 아마 혜경궁이 남편을 버리고 목숨을 택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어릴 때 영조 곁에서 자라지 못해 서로 정이 안 붙어 이 사단이 났다 싶었는지, 영조한테 자기 아들을 키우라고 내줍니다. 방금 내 남편을 죽인 사람한테! 내 아들을 맡기다니! 으아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가끔씩만 아들을 만나는데, 정조가 어린 아이다 보니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고 울고 그러기도 하거든요? 그걸 보고 영조가 안되겠다고, 정조 놓고 돌아간다고 하면 얼른 "아래에 있으면 또 위를 그리워한다"고 데려가라고 권합니다. 혹시라도 영조가 서운해하면서 애정을 거둘까봐요. 그럼 또 영조는.. 흐뭇해하면서 정조를 데려갔대요.. (아 정말 읽을수록 영조가 싫어지는 Magic) 이렇게 아들을 제 품에서 키우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아들을 지킬키려고 애를 정말 많이 씁니다.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르는 데는 확실히 혜경궁의 기여가 큰 건 확실합니다. 정조 외에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 몇몇 세력이 난리를 쳤는데도 어쨌든 그걸 전부 방어하고 아들을 지키는 데 성공하거든요. 정치력이 남달라요. 영조의 속마음을 그대로 간파하고, 거기에 어긋나지 않게 정말 잘 하는데다, 당시 정치세력을 잘 살펴서 심지어 정적이라고 해도 집안 사람을 시켜 교류합니다. 그 덕에 나중에 친정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상황에서도 정조 하나만큼은 무사히 지킬 수 있었죠. 다만 그 과정에서 이래저래 홍씨 일가가 타격을 많이 받아서, 나중에 정조-순조에게 자기 집안 사람들이 모함을 받고 신분이 하락한 걸 다시 살펴봐줄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한중록>의 뒷부분은 주로 이 청탁(?)을 위한 서술이에요.



 워낙에 방대한 시간을 서술하고 있는지라,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록한 느낌은 아니고 그저 기억에 남는 사건 위주로 서술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디테일한 기록도 남아있기가 어렵고,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던지라 임금과 왕실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 있던 기록도 삭제했기 때문에 지금은 영조-사도세자-정조 시대를 파악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이라 감정적인 부분이 꽤 많아서 그건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 같아요. 혜경궁이 파악한 진실이 실제 역사와는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자기 아버지나 동생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다시 없을 충신으로 묘사하고 반대로 정적들은 소인배 무리로 평가하는데, 이건 당시 정치적 지형이나 상황을 살펴가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한 기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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