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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웃는 남자 (186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빅토르 위고 지음, 백연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와.. 정말 읽는 내내 '빅토르 위고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이건 좀 사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몇 줄 요약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줄이자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내용이거든요. 게다가 저는 이미 <웃는 남자>라는 작품을 뮤지컬로 만났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다 알아요. 그런데도 뒷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이런 게 소위 말하는 필력이겠죠? 새삼 역사에 남는 위대한 작가란 이런 거구나 싶어지네요ㅋㅋ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배경 묘사
<웃는 남자>는 권력의 알력싸움에 휘말린 한 귀족 꼬마가, 얼굴이 완전히 훼손되어 버려지고, 그 얼굴을 팔아 광대로 살아가다가 다시 자기 자리를 찾는 내용입니다. 아주 거칠고 단순하게 요약하면 그렇죠. 하지만 읽다보면 정말 놀라운 게, 정작 주인공인 웃는 남자 그윈플렌에 대한 이야기보다 다른 이야기들을 훨씬 더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윈플렌을 키우는 우르수스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배경 하에서 컸는지, 그윈플렌 얼굴을 망가뜨린 콤프라치코스는 어떤 조직이며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당시 귀족들의 행태는 어떠했으며 그래서 귀족 사회의 유행은 무엇이고 그게 얼마나 부당했는지 등등.. 온갖 주변인물과 배경에 대한 묘사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정작 주인공이 겪는 사건은 아주 간단하게 서술하고 넘어가면서요.
예를 들어 그윈플렌의 얼굴을 망가뜨리고 도망가는 콤프라치코스 조직원들이 바다에서 격랑을 만나 침몰하는 장면이 있어요. 뮤지컬에서는 초반 3분~5분 정도 안에 다 지나가버리는, 아주 간단한 사건입니다. 그윈플렌을 만들고, 버리고, 그리고 죽어가면서 혹시 모를 신의 자비를 기대하면서 그윈플렌의 비밀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죠.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 장면 하나에만 거의 140페이지 가까이 할애해요. 주요 줄거리에 별 영향도 못 미치는, 아동 납치범들이 바다를 떠돌다 죽어버리는 내용에 말이죠! 내용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 장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그 침몰하는 과정이 어찌나 긴박하고 드라마틱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지 저도 모르게 엄청나게 집중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주변 인물과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어느 정도냐면, 우르수스가 데아를 안아들고 "저런, 이 아이는 앞을 못 보는군!" 할 때가 이미 300페이지에요ㅋㅋㅋ 뭐 아무것도 안 했고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 그리고 그들을 키워주는 보호자 셋이 만나기만 했는데 이미 300페이지가 뚝딱 지나있습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전개가 더디면 짜증이 나거든요? 특히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의 경우 왜 이렇게까지 호흡이 느린가 싶은데, 빅토르 위고가 워낙 글을 맛깔나게 써서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주인공과 관련되지 않은 배경 하나하나도 전부 흥미로워요! 정말 대단한 능력이죠ㄷㄷ
특히 뮤지컬을 보면서는 그냥 주인공의 보호자 정도로 인식했던 우르수스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저는 잘해줄 거면 그냥 잘해주는 게 낫다는 주의라 츤데레스러운 인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우르수스는 엄청나게 삐딱하게 말하고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좋아졌어요. 왜냐면 그는 행동으로 선(善)을 실천하는 사람이거든요. 모두가 굳게 문을 닫고 떠돌이 거렁뱅이 아이 하나를 외면할 때, 우르수스만이 문을 열고 자기 먹을 몫의 빵과 우유를 내어줍니다. 그윈플렌과 데아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호의를 베풀거든요. 그의 행동을 보다 보면 결국 그의 독설은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자기 방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별로 기분 상하지가 않습니다. 독설 전에 이미 상대에게 베푼 게 많거든요.
그는 앉은뱅이를 치료해 두 발로 서게 한 다음 빈정거리며 한마디를 했다.
"자, 이제 두 다리로 걷게 되었구려. 눈물의 골짜기에서 오래도록 걷기를 바라네!"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갖고 있던 동전까지 몽땅 털어서 건네주며 입속말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살아라, 불쌍한 것! 먹어라! 오래도록 살아라! 너의 도형수 신세를 짧게 끝내 줄 사람은 내가 아니지!"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능력껏 못된 짓을 저지르지." - p.46
귀족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웃는 남자> 속 그윈플렌은 결국 보통의 인간, 시민 그 자체의 은유 같아요. 고귀하게 태어났다는 건 아마 천부인권을 타고난 우리 모두를 말하는 걸 테고, 그런 고귀한 태생을 망가뜨리고 바닥으로 내팽개친 건 권력자들이죠. 그럼에도 고귀함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지만, 권력에 의해 또다시 무시와 조롱을 받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아예 대놓고 그윈플렌 입을 통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저의 눈과 콧구멍과 귀를 기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인류의 권리와 정의, 이성, 지성을 기형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소설 곳곳에서 신분제를 향한 차가운 분노를 느낄 수 있어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 독자들이 보기에, 당시 귀족들은 정말이지 혁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말이에요. 혁명, 혁명만이 답입니다! 그 정도로 귀족 행태가 어처구니 없어요. 아무리 신분 사회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백성들을 유린하고 인권을 개무시하는데도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에요. 제가 특히 경악한 부분은 귀족들의 클럽 문화였는데, 그 클럽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얼마나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고 민간인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가해자는 귀족이고, 피해자는 평민이죠. 결국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피해를 받은 사람만이 '운이 나쁜' 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얼마나 불의한지!
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해를 끼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모호크 클럽의 회원은 누구나 한 가지 재능이 있어야 했다. 어떤 자는 '춤의 고수'였다. 그는 농민들의 장딴지를 칼로 찌르면서 그들이 깡충깡충 뛰게 하는 자였다. 다른 자들은 '진땀을 흘리게 하는' 일에 능숙했다. 우선, 손에 결투용 장검을 들고 여섯 내지 여덟 명의 귀족들이 한 부랑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원을 만든다. 사방팔방 가로막혀 있으므로 그는 어느 한 사람에게서도 도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부랑자의 등이 향하는 귀족은 검으로 그를 찌르니, 그는 팽이처럼 돌며 도망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그의 옆구리에 칼끝 공격이 가해지면, 그의 뒤에 도 다른 귀족 하나가 나타났다. 그렇게 계속해 각자들 찔러 댄다. 그렇게 칼로 된 원 안에 갇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충분히 돌고 춤을 추고 나면, 하인들로 하여금 몽둥이질을 퍼붓게 해 그의 생각을 바꿔 주었다. 또 다른 자들은 '사자 때려잡기'를 즐겼다. 그들은 웃으면서 지나는 행인을 불러 세운 다음, 주먹으로 코를 부서뜨린 후, 두 엄지손가락을 두 눈에 쑤셔 넣었다. 혹시 눈이 멀면 돈으로 배상해 주었다. - p.355
이렇게 부패하고 찌든 사회인지라 귀족들의 취향이나 의식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괴벽이 엄청 심해지기도 하구요. 조시안 여공작은 그윈플렌의 기이한 외모와 미천한 신분에 매혹되는데, 이게 특별히 조시안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기형아, 추남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문화가 있었대요;;; 아주 상세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또 그런 와중에도 빅토르 위고는 공정성을 발휘해, 귀족들이 특별히 나쁘고 사악한 품성을 타고나 그런 게 아니라 단지 모든 것이 고정된 세계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일탈을 즐기고자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합니다. 한 마디로, 귀족은 그걸 가능하기 때문에 한다 그러니까 가능하게 하는 그 구조가 나쁜 것이라는 거죠.
귀족들의 행태를 보면 결코 그들을 감싸줄 수가 없음에도, 나름 그들에게도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짚어주면서 꽤나 공정을 기한 편입니다. 데이비드 경, 일명 톰짐잭인 그 사람은 그윈플렌의 등장으로 모든 상속권을 다 잃게 되었는데도 그윈플렌에게 일방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옹호해요. 귀족들이 그윈플렌의 외모를 비웃은 건 무참한 일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가 받은 모욕을 대신해 결투 신청을 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윈플렌이 자기 어머니를 매춘부라고 부른 걸 잊지 않고 그윈플렌에게도 결투를 신청하지만요. 톰짐잭을 악역으로 만드는 게 훨씬 쉬울 테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미덕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당연히 귀족으로서 한계도 가지고 있고요. 그래서 인물들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느껴져요.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방대한 분량인데도, 눈 깜짝할 새에 읽게 되는 작품입니다.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운 두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습니다. 번역도 매끄럽고, 종이 촉감도 좋고, 무엇보다 표지가 진짜 너무 멋져요! 소장용으로 구매하셔도 충분히 그 가치를 할 만한 책이에요~ 다 보고 나니 뮤지컬로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빨리 삼연이 왔으면 좋겠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