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과의 대화의 잔여물...)
현대인들은 고대인에 비하면 분명 노이로제 환자이거나 분열증 환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다윈 등등의 그늘 아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 사상가들이 내적으로 잘 구획해 놓은 시대에 살고 있다.
이들은 탈근대의 사상가로 불리운다. 즉, 이들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성에 대한 재고와 타자성의 발견. 사실 이 둘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 새로운 사고 방식에 의하면 주체성은 언제나 타자성을 통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주체성은 여전히 주체성으로 남는다.)
이런 통찰은 직관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텔레비젼 광고를 보자. 코트를 걸치고 머리를 박박 깍은 젊은 남자가 휘적 휘적 걸으며 다음과 같은 대사를 말한다. "나는 남이 좋다는 걸 따라 하고 그러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나만의 것을 찾기를 원하죠. 겉으로 보기엔 허름해 보여도 진짜가 항상 있는 법이거든요." 그러면서 시크하게 캔커피를 하나 따 마신다...
이런 영상을 보면서 우리는 피씩 웃게 된다. 이 남자의 겉멋듦을 인식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자기만의 고유한 취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다. 그 남자는 아마 유행 속에 있을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그러면 우리는 나의 취향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 나의 취향은 언제나 타인의 취향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성과 타자성에 대한 간단한 공식 하나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나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타자가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취향이란 없다는 말은 데카르트적인 주체는 없다는 말과 동등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 자체가 아니라 그 비판이 우리의 직관에 수긍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어야 한다. 역으로 말하면 데카르트의 주체는 우리의 직관에 수긍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적인 주체는 사실성의 영역이 아니라 이념성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 혹은 구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분열증의 씨앗을 본다.
데카르트가 철학으로 해석된 근대성이라면 정치 경제학적으로 해석된 근대성은 물론 자본주의일 것이다. 우리가 근대를 고민한다는 것, 탈근대를 고민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자본주의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예컨대 주체성과 타자성의 문제가 자본주의와 갖는 관련성이 해명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관에 직접 수긍되거나 기각될 수 있는 것, 즉 구체적인 것에 대한 이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컨대, 분열증과 자본주의라는 구체적 항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주제에 대해 작업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 들뢰즈, 가타리의 해당 두 작품을 읽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러므로 우리 시대가 철학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시대는 철학이 총체적일 것을 요구한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동안 철학의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줬다. 예를 들어 회의론이나 유아론, 각종 상대주의에 귀착되고 마는 철학은 게으른 철학이다. 우리는 철학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철학은, 예컨대 상대주의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주의의 조건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가 시대 착오적인 것일까? 예컨대, 그것은 헤겔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글쎄... 이런 주제는 말싸움이 되기 쉽상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말을 빌어 논쟁을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새롭게 사고되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말들은 내게는 항상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