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있다. 연필로 줄을 그으면서 한번 읽었고 지금은 볼펜으로 줄을 그으면서, 나름 이해를 갖은 상태에서 읽고 있다. 어렵긴 하지만 엄청나게 어렵진 않다.
존재와 무의 해석서로 영미권에서 그리 마땅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최근 한국에서 존재와 무 해설서가 새로 나왔다고 해서 복잡한 절차와 비용을 감수하며 사 보았다. 결과는 대단한 실망. 저자 분이 존재와 무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설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듣도 보도 못한 용어들을 정의 없이 마구 사용한다. 나는 정체불명의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한다. 내게는 이런 것들이 저자의 무지를 감추려는 처량한 노력으로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존재와 무의 첫 문장을 이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다. "현대 사상은 현존자를 그것을 나타내는 일련의 현출들로 환원함으로써 괄목한 만한 진전을 이루었다." 왜 현존자, 현출과 같은 이상한 단어를 사용해야 할까? 저자는 별 대답이 없다. 그러므로 첫 단계에서부터 저자의 해설을 알아듣기가 힘들어 진다. 이것이 존재와 무라는 책의 난해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가 "현대 사상"을 후설의 현상학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현존자, 현출과 같은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단어들을 사용한 것도 잘못이다. 사르트르가 첫 문장에서 이야기한 현대 사상은 실증주의, 경험론, 현상론, 현상학 등 반-형이상학적, 혹은 반-실체론적 사상 조류 일반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첫 문장은 "현대 사상은 사물을 그것을 나타내는 현상들의 연쇄로 ~" 라고 옮기면 족하다. 이렇게 하면 앞서 말한 사상 조류를 모두 포괄하여 말한 셈이 된다. existent에 과도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어진 대목들에서 "현상"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비로소 현상학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저 해설서의 저자에게 화가 나 버렸다. 내가 저 해설서를 주문할 때 알라딘 중고 서점에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이 있었는데, 내가 저 책에 실망하고 신오현의 책을 주문하려 했을 때는 책이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여기 저기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을 아주 옛날에 읽었었다. 한국에서 나온 사르트르 연구서 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깊이를 가진 책이었다. 작년에 나온 존재와 무 해설서가 저 모양이므로 신오현의 책은 여전히 사르트르나 존재와 무에 관한 한 독보적인 책일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쭉...?
내가 신오현의 책에서 특히 알고 싶은 대목은 이런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개진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후기에 들어서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르트르가 스스로를 오해한 것이다. 후기의 작품들에서도 존재와 무의 개념들이 풍부하게 원용되고 있다. 사르트르 철학의 연속성은 의심할 수 없고, 사르트르의 철학 내에서 존재와 무의 가치 역시 그렇다.
내가 대충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이다. 나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런데 신오현의 책을 구할 수가 없다!
해서... 혹시라도 신오현의 저 책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댓글 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