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날 친구한테 빌려온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두 권을 뒤적였다. 아래는 그 중 세 편에 대한 감상이다. 세 편은 찬찬히, 끝까지 다 읽었다. 적어도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면 이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말들을 늘어놓게 될 것 같다.
글목. 나는 예전에 이 분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었다. 무소, 고등어, 예의. (여기까지다. 이후의 작품들은, 아마도 내가 삶에서 소설 읽을 여유를 찾지 못해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의 작품을 읽으며 화가 날 정도로 실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첫번째 문제는 이 분 글에 비문과 요령부득인 문장이 너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독자로서의 권리로 불평하자면 읽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리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작가란 한국어 산문의 수호자 아닌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인 동시에 의료 시스템의 신뢰성에 대한 수호자이듯이 말이다. 이 정도로 비문 범벅인 소설 앞에서 나는 그저 할 말을 잃고 만다. 이러한 문장들에 한국어 산문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가 수여되었다면 그건 이미 작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둘째는, 소설적 완성도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 감정과 사상을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글목'의 화자는 툭하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그런데 왜? 독자인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감히 왜? 라고 물을 수도 없다. 소리 죽여 가며 아프게 우는 사람 앞에서 왜 울어? 라고 물어 볼 수 있나? 그래서 독자로서의 나는 정말 불편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소설의 독자이고 싶지 않았다. '글목'의 화자는 H라는 사람과 정서적 공감을 갖는다. 이제 독자도 화자-H와 같은 편에 서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독자로서의 나는 H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작가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실제 세계에서 H를 직접 만나고 그에 대한 어떤 감정을 갖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로서의 나는 H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화자-H와 뭔가를 공유할 수 있나? 그게 뭔지 알아야 공감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글목'에는 이런 장치들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 세번째는 사상성의 문제다. 나는 작가란 자신에게 일어난 감정, 사상 등과 거리를 유지하도록 초인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워낙에 탁월한 천재는 이를 무시해도 되겠지만... '글목'에는 이러한 노력이 철저하게 결핍된 흔적들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작가가 천재인 것 같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글목'에서는 분절되지 않은 별개의 사고들이 한데 뒤엉켜 급기야 폭탄으로 터져 버린다. 그 폭탄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만 말해 두자. '글목'의 작가는 개인이 어떤 외적인 사건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려 들어 삶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상황에서의 아픔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이를 말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고 위험한 사고가 끼여들어 버렸고, 그 결과로 이 작품은 정말이지 철저하게 부정적 의미에서 끔찍해져 버렸다. 즉, 사상적으로 매우 저급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국수. 친구가 추천해 준 작품이다. 아름답고 좋은 작품이다. 단 한가지 문제는, 이 분은 누구 누구의 아류라는 평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40 한국 여성 작가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아마 작가의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누가 그런 얘기를 잔뜩 해 놓았다면?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그 이상의 스타일이 없다고 한다면?(정말?) 그렇다면 그런 스타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 대신 누구 누구의 아류라는 딱지가 붙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군의 작가들을 보면서 한국 문학에 특징적인 매너리즘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갈한 문장들과 완벽한 구성을 갖춘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은 한국의 흔한 매너리즘 작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조용필을 모창하여 조용필 이상으로 잘 부른다 한들... (나는 국수의 작가가 풍금의 작가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쓴다고 느꼈다.)
옥수수. 역시 친구가 추천해 준 작품이다. 우화적 장치를 가진 작품으로 재미있다. 단 한가지 문제는, 이 작품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것이다. '옥수수'는 한국 문학에 흔하디 흔한, 슬럼프를 겪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다루고 있다. '가볍게' 라는 말에 주의하자. 예를 들어 '옥수수'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금융 전문가로 일하다가 한국의 작은, 문학 전문 출판사 사장으로 전직한 인물이 나온다. 그런데 이 타이틀만 제껴놓고 보면 그 사장이란 사람은 문학 소년적 과거가 있는 졸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인물의 사실성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이 작품은 우화니까 그냥 우화로 읽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볍게, 재미있게 읽고 던져버려도 작가가 섭섭해 하지 않을 작품일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 한국어 산문에 관한 최고 권위의 상 중 하나가 주어졌다. 왜? 이 작품이 어떤 성취를 하였기에? 나는 도저히 모르겠더라...
이 책을 빌려 준 친구는 천천히, 심심할 때 읽으라고, 숙제하듯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내 느낌을 말하자면 이제 숙제 끝이다. 다 읽지도 않았지만 더 읽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구태여 읽으면서 화내고 실망하고, 때로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라는 부커상이 뉴질랜드의 20대 작가에게 돌아갔다. 최연소 수상이자 역대 수상작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작품이라고 한다.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작가의 인터뷰를 조금 봤는데, 소설이 두꺼운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이고, 지금 뉴질랜드에는 자기와 같은 (비슷한 수준의) 젊은 작가들이 많다고 하더라. 젊은 작가들은 이전 세대 작가들과는 스타일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하고. 인터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파구는 각자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소설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위기니 하는 말들을 흔하게 듣는데 십중팔구는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의 자기변명이라고 본다. 그런 위기는 없다. 단언컨대 없다. 위기가 있다면 소설가의 위기, 인문학자의 위기, 철학자의 위기일 뿐일 것이다. 이상문학상작품집을 보라. 거기엔 심지어 한국어 문장의 위기까지 들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어 문장도 제대로 못쓰는 소설가와 그에 대한 비평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현실이 그 위기라는 것의 실체다. 그 위기는 마치 숙제의 위기와 같을 것이다. 개학 전날 밤을 새가며 과제물을 해치우면서 중얼거리던 말. 큰일났다. 대충이라도 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