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비비씨 드라마 디 아워 시즌2가 시작되었다. 유일하게 방송 시간 기다려 가면서 보는 텔레비 프로그램이다. 비비씨에서 다운받아다 이동간에도 본다. (요즘 기차간에서 책을 잘 보지 않는다. 영화나 테레비 방송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 북을 듣거나 그런다.)

디 아워의 작가는 여자다. 전형적인 남자들의 세계(정치, 첩보, 음모...)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여성 작가의 정체성을 찾아내기가 어렵지는 않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성적인" 어떤 것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주인공 중 하나인 프로듀서 미스 롤리. 작가는 롤리를 확실한 신념을 가진 유능한 프로듀서로 그리지 않는다. 롤리는 끊임없이 변명을 해대며 툭하면 말을 버벅댄다. 롤리가 여성스러운 매너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고, 그런 전통적인 여성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그러나 실력면에서는 다소 엉성한 언론인으로 보인다면, 그건 작가의 의도대로일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 롤리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여성성을 초월하는 것으로도, 여성성의 전형으로도)

진행자 헥터의 아내 모니. 헥터는 유명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인기인이고, 모니는 곱게 자란 전업 주부다. 헥터는 자신의 유명세를 만끽하며 유흥을 즐긴다. 헥터는 타고난 바람둥이다. 작가는 그렇게 바람을 피우는 헥터와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며 그를 기다리는 모니를 대조해 보여준다. 여기까지인가? 아니! 식당에서 식사하며 직장 일만 이야기하는 헥터에게 모니는 "당신은 나를 지루하게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어쩌면 헥터를 밖으로만 돌게 한 사람이 모니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모니가 남편 헥터를 기다리며 음식을 장만하다가 남편이 진행하는 시사 프로그램 대신 드라마를 보는 장면을 보여 준다. 헥터가 원하는 것을 모니가 줄 수 없고, 모니가 원하는 것을 헥터가 줄 수 없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여성 자신에 대한 여성 자신의 이런 냉철한 시선은 매우 드물다. 또 하나의 예로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 아래서"라는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여성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어렵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정치적으로 위험한 농담들이 대범하게 오가고 있다.

디 아워의 작가도, 그물 아래서의 작가도 영국 출신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국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질을 말하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농담 소재로 써먹는데 다른 누구네들보다 대담하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이 나라 사람들이 내성적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너가 최고야!" 이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걸 쑥스러워 하는걸지도 모른다. 대신 "넌 정말 최악의 쓰레기야!", 이렇게 돌려 칭찬하는 걸 더 맘 편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될 것이겠지만... 역으로 말하면 영국 사람들이 그만큼 국제화가 덜 되어 있다는, 다시 말하면 촌스럽다는 뜻이 될 지도...) 예를 들면, 리틀 브리튼이나 오피스같은 비비씨 히트 작품들은 자기 자신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까는 내용이 전부다. 이런 영국적인 기질이 여성 작가에게 적용되면, 디 아워나 그물 아래서와 같은 작품이 나오겠지. 현실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나는 지금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디 아워를 보자. 배경은 50년대, 60년대 영국이다. 남성 언론인, 정치인들은 예쁜 무희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클럽에서 유흥을 즐기고 고급 정보를 거래한다. 손톱에 곱게 매니큐어를 바른 가정주부들은 집에서 남편이 귀가하기를 하염 없이 기다린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소양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똑똑하고 예쁘고 교육 잘 받은 일단의 여성 언론인들이 있지만, 그들이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는 고위급 남성들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프레디는 매우 유능하고 진보적인 언론인이지만, 자신의 동료였던 여성이 상사가 되자 이렇게 말한다: "너가 프로듀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널 이용해 먹기 편해서야. 여성은 까다롭고 감정적인데 도대체 왜 쓰겠어? 적당히 굴려 먹다가 임신했다고 잘라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진보적인 언론인 프레디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적인 언론인 롤리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는 유능한 여성이 있어 조직과 시대에 대항하면서 슈퍼맨같은 활약을 한다? 그것은 판타지지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판타지는 언제나 증후일 뿐이다. 

(새로 부임해 온 상사에게 끊임 없이 변명을 해대며 습관적으로 말을 더듬는 롤리는 내게 진상 캐릭터라고 구박을 받는다. 그렇다. 롤리는 타협을 했고 타협을 통해 자리를 보존했다. 그러나 종종 보면 그런 사람들이 대형 사고를 친다. 타협한 사람들은 조직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롤리가 과도하게 무능하게 그려지고 있는 첫 편을 보면서 이야기 전개를 이렇게 예상해 본다. 결국 롤리가 큰 건을 하면서 뭔가를 보여 줄 거라고. 아니면, 작가는 더욱 진한 현실성으로 나의 판타지를 박살내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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