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 H, p122
@P3: W&H, R

1. 사람은 어떻든 철학을 하게끔 되어 있다. 비트겐쉬타인이 철학의 문제들에 대해서 뭐라 이야기 하든 우리는 여전히 철학적 동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물론, 나는 아직 비트겐쉬타인의 철학의 전모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가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철학에는 깊은 문제와 피상적인 문제가 있다. 깊은 문제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피상적인 문제에 집착하게 마련이다. 철학함에 있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피상적인 문제에 고착되고 마는 것일 게다. 피상적인 문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깊은 문제로 들어가는 것 뿐이다. 그리고 깊은 문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철학적 근육을 단련해야 할 것이다. 이 단련 과정을 일컬어 우리는 철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포기될 수도, 폐기될 수도, 해소될 수도 없다. 다만 방치될 수 있을 뿐이다. 

2. 철학이 문제시되는 또 다른 상황은,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삶으로서의 철학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여야 하는가, 라는 것일 게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모른다. 나는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 끝에 어떤 결론이 있어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을 하고 지금 영국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고, 기회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이 질문은 나의 삶 내내 나를 따라다닐 것 같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경우라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확고할 것이다. 아니,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위대한 철학자들의 순진하고 단순했던 시절에는 답도 단순하고 명쾌했을 것이다. 내가 의문을 던지고 있는 지금은  철학자라는 직업이 있는 시대다. 그만큼 세상은 복잡해 졌다.

3. 우리는 태생적으로 이분법을 싫어한다. 깊은 문제-피상적인 문제, 학문으로서의 철학-삶의로서의 철학. 이러한 이분법을 동원한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철이 덜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그러나 내게 변명할 기회를 다오. 단지 문제에서 시선을 돌림으로써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이 문제인 한 그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당신은 마치 도를 깨친 사람처럼, 이런 철면피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라고 나에게 훈계한다. 당신이 옳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떻게?를 묻는다. 나의 현재의 답은 이렇다. 우리가 양극을 꿰어보지 않는 한, 다시 말하면 가장 힘든 극에 머물러 보지 않는 한 이분법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산속 절간의 벽을 바라보고 앉아서 도를 깨치는 게 가능할지 매우 의심스럽다. 당신은 세상에 나가야 하고, 그 무수한 극에 자신을 개방하여야 하고, 그 극을 가득 안고 당신의 선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와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진동이 일정하게 수렴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나더러 대답하라면 나는 그 맨 첫 시작에 있는 것 같다. 그 시작에 서 있다는 것에 매우 감사해 하면서...

4. 당분간 나의 블로그의 모든 포스팅은 영어로 작성될 것 같다. 대부분 간단한 공부 일지 정도가 되겠지. 영국에 있으면서 어마 어마하게 높은 영어의 벽을 느끼고 있다고 입으로 말은 하면서도 그 벽을 어떻게 넘어설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안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위기감이 가슴까지 차오고 있다고 느낀다. 진정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이라면 12시만 되면 야식을 하는 습관을, 그 즐거움을 포기하여야 마땅하겠지. 영어-한국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방법은, 내게 있어 힘들고 어려운 극에 머무는 길 밖에 없을 것 같다. 세상은 왜 이 따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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