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들과 세 시간에 가까운 대화. 그분들은 막 떠났고, 난 점심을 먹으려 칩스를 데우고 있다. 

욥기가 주제였는데 우리는 적당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성경을 끝까지 읽어볼 것이고, 물론 훌륭한 고대의 문학으로, 그리고 읽다가 거기서 뭔가를 발견하거나 당신들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때 연락하겠다고 했다. 

두 분 중 한 분은, 우리는 선량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뜻에 있어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헤어짐의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유쾌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두 분 중 한 분은 매우 실망한 표정이었다...-.-

두 분들과 약속을 지키느라 나는 욥기를 읽었다. 고대의 문학들에는 삶의 생생함이 펼쳐져 있다. 욥은 신과 악마의 내기의 대상이 되어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온 몸에 종기가 돋는 고통을 당한다. 욥은 신심을 가지고 이 고난을 꿋꿋이 버텨내는가? 그렇지 않더라! 차라리 죽음만 못하다고 끊임없이 하소연한다. 자신은 의로우며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모르겠다며 신하고 직접 담판을 붙고 싶어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역할을 맡은 이는 신이었다. 그가 기껏 욥에게 나타나 한 말이라고는 나의 강함과 위대함을 너는 알아라! 였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이 말은 그의 의로움은 내적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신이 그에게 준 복락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의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이 그에게 있으나 혹은 없으나. 신이 그에게 복락을 주나 혹은 고난을 주나.

욥기를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스피노자를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결과로 신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바랄 수 없다고 했다. 악마와 신이 벌인 내기는 바로 이 명제를 두고 한 것이었다. 욥은 간혹 신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확신에 있어서는 꿋꿋했다. 친구들이 욥을 꾸짖으며 이러한 고난을 당하면 자신을 반성하고 몸을 낮추는 것이 도리라고 그렇게도 말했어도 욥은 꿈쩍도 않고 오히려 친구들을 위안자가 아니라 고문자라고 비난했다. 당신이 옳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비판자가 이렇게 묻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옳다면 내가 옳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욥이 신과의 담판을 원한 것은, 자신이 과연 의로운지를 묻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의로운데 어떤 이유로 내게 이런 고난을 주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은 욥의 의로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은 단지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욥 앞에서 뽑내고 겁주고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의로움에 있어 욥은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로움에 있어 욥은 진정한 신의 대적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신에 있어 신 자신의 의로움이란 정의불능이겠지만 말이다. (데카르트에 있어 의지는 절대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내적 자발성으로 정의된다. 그것의 존재에 외적 원인이 필요치 않은 것. 그러므로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내적 자발성에 의해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댓가로 신이 자신을 사랑했으면 하고 바랄 수 없다! 그것은 형용모순이다.

욥은 신이 있든 없든 의롭게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것이 욥의 의로움을 정의할 것이다. 그것말고 욥의 의로움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스피노자주의자다. 욥은 최고의 스피노자주의자다. 혹 내가 틀렸을까? 그렇다면 깨우쳐 다오.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 분들은 신을 사랑의 신이라고 했고, 나는 그것은 사랑이란 말에 대한 불명예가 될 것이라고 반박했을 뿐이다. 나는 당신들의 신은 끊임없이 충실을 요구하는 신이라고 말했다. 충실의 두 항과 사랑의 두 항을 생각해 보라. 신-충실-인간, 신-사랑-인간. 충실은 외적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사랑은 나의 내적 자발성의 표현이다. 둘은 서로 다른 인간을 전제한다. 나는 여호와 증인들에게 욥기에서 사랑의 신이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고 한사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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