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DVD를 사러 갔다. 나는 아론 소킨의 Studio 60과 우디 앨런의 Midnight in Paris를 골랐는데 예산 문제로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우디 앨런을 포기했다. 나는 아직 우디 앨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Studio 60 에피소드 6개를 보았다.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대사에 자막을 켜놓았는데도 따라가기가 벅찼다. 머리를 식힐 겸 친구가 고른 것들 중 2 days in Paris를 트레이에 걸었다. 쥴리 델피 제작, 주연이란다. 

Studio 60(TV 시리즈다)의 꽉 짜인 구도와 잘 계산된 대사들에 비하면 Paris의 영상과 대사는 느슨해 보였다. 나는 곧장 영화에 빠져들었다. 웃다 보니 영화가 끝나 버렸다. 박하사탕을 씹어먹은 것 같았다. 기분 전환할 때 가볍게 볼 만한 영화로 최고일 것 같다.

영화의 많은 부분은 핸드 핼드 카메라로 찍은 거 같았다. 영화를 찍는데 많은 돈이 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배우들, 각본, 그리고 제작비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만한 시퀀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쥴리 델피가 직접 썼다는 각본이 아주 좋지는 않다. 가벼움과 희극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덜 상투적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프랑스와 미국의 문화적 충돌에 관한 것이었다. 그 충돌은 물론 과장된 것일 게다. 영화 내내 보수적인 미국 남자는 바보가 되고 놀림거리가 된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뻔뻔함이고 그에게 넘친 것은 진지함이리라. 그 반대편에는 영화에서 뻔뻔하게 옹호된 프랑스 문화가 놓여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남의 개인사에 거침없이 끼여드는 장면들에서 나는 놀라기도 하고 의아해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택시 기사가 손님의 나이를 묻는 장면 등등. 나는 영국에서 나이를 묻고 말하는데 거침이 없긴 하지만 그것이 예의바른 일이 아니라는 것은 항상 의식하고 있다. 이런 글로벌 에티켓(?)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희극적인 장면 중 하나. 미국 남자의 우수꽝스러운 나체 사진을 여자 친구네 가족(프랑스인들)들이 다 돌려보며 킥킥대더라. 한편에서 보면 이건 엄청난 프라이버시의 침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재밋지 않은가? 그게 그리 대수인가? 그런다고 누가 죽어나가거나 쓸데없이 돈이 소비되거나 환경이 오염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거꾸로, 예를 들면 미국의 전 대통령 클린턴이 인턴 직원과 가졌다는 부적절한 관계가, 그 엄청난 세금을 써가며 조사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나? (윤리적인 것의 강조, 훈육적인 것의 강조는 단연코 정치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므로 여기서 줄이자. (예를 들면 에티카의 백미는, 그 연역적이고 무표정한 논증 전개가 아니라 곳곳에 숨어 있는 촌철살인의 우스개들이다. 인간 조건을 진지하게 바라보면 비극이 되고, 뻔뻔하게 바라보면 희극이 된다.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척 하면 에티카가 된다. 적어도 희극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려면 진지한 척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희극만이라면 웃음 뒤로 공허가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 너머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는 진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저런 영화는 나에게 무거움을 덜어주는 청량제로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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