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다란 인천공항에 비해 홍콩공항은 엇갈려 움직이는 비행기들의 날개가 서로 닿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작아 보였다. 나를 태운 런던행 비행기가 지상을 천천히 달리다가 활주로 출발선 근처에서 멈추었다. 활주로를 힘차게 달리던 다른 비행기가 막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이 보인다. 내가 탄 비행기는 계속 멈춰 있다. 기내의 작은 창문 시야 안으로 또 다른 비행기가 들어온다. 아직 우리 차례가 아닌 것이다. 그 비행기가 하늘로 떠나고 나자 우리 차례가 왔다. 비행기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대기선으로 다가 간다. 그리고 다시 멈춘다. 숨을 한번 가다듬은 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속도가 별로 나지 않는 것 같다. 이 정도 속도로 이 육중한 물체가 날아오를 수 있을까 의심하는 순간, 이런 순간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이다, 동체가 고개를 쳐드는가 싶더니 이내 뒷바퀴가 땅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왔다. 동체에 위태롭게 붙어 있는 기다란 날개가 출렁이는 것이 보인다. 약간 떠올랐을 뿐인 것 같은데 고도가 더 오르지 않는다. 미세조정이었을까? 이내 가상의 비탈길을 힘있게 타고 오른다. 이제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과학은 마술임에 틀림없다. 이 크고 무거운 물체가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마술을 부렸을 것이다. 만일 그 누군가가 신이라면 마술이란 곧 기적일 것이다. 나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 달의 분화구를, 목성의 위성을, 토성의 띠를 본 고전파 학자들이 내뱉었다는 말을 이제 이해한다. "나는 보았지만 믿지 않는다." 그것은 건전한 상식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다. 동체가 조금 흔들린다. 창 밖을 보니 온통 하얗다. 비행기가 얕게 떠있던 구름 무리를 빠르게 헤치고 있다. 곧 눈 아래로 구름들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 풍경의 광대함과 무한한 다양성은 나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저 무한함을 언어로 묘사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그러나 화가의 상상력이 저러한 자연을 낳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인간의 힘을, 그 능동성을 표현해 주는가? 그렇지 않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은 인간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인간은 상상하고 창조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만을 상상하고 만들수 있을 뿐이다. 즉, 자연을 한껏 모방하는 것을 우리는 상상이라고 하고 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힘은 실재를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재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피조물을 앞에 두고 놀라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만든 스프지만 정말 맛있지 않아?" 그것은 마술과 같은 순간이다.

구름 지대를 지나자 홍콩의 세부가 눈에 들어온다. 가느다란 관들의 곳곳에 부풀어 있는 데가 보인다. 그 부풀어 있는 곳에 위를 향해 긴 육면체의 막대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다. 인간의 언어로 빌딩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홍콩에 기식하는 개체들의 밀도는 매우 높다. 그러므로 개체들을 수용할 표면적을 높이기 위해 빌딩들은 위로 길어져야 한다. 개체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넓다란 녹색의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로 그런 영역을 경작지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홍콩에는 그런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밀집된 개체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존을 유지할까?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부담스러워 창에 가리개를 했다. 이제 뭘 해야 하나? 비디오를 켰다. 리모콘을 이것 저것 눌러본다. 마땅한 것이 없다. 잠을 청하려 한다. 자리가 불편하다. 엉덩이가 아프다. 뒤척이다 비디오를 보다 기내식을 먹다 창을 열고 대기를 바라보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창 아래로 수면과 평행하게 얇은 판처럼 보이는 희뿌연 수증기 덩어리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희미한 구조물들이 보인다. 해면과 동일한 평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얇은 수증기들의 판 아래에 있어서 물에 잠긴 것처럼 보인다. 녹색 영역과 옅은 갈색의 영역이 패턴을 이루며 짜여져 있다. 넓다란 다각형 형태다. 개체들의 밀집도가 높다고 알려진 구조물들도 보인다. 홍콩의 것들보다 밀집도는 높고 높이는 훨씬 낮다. 덴마크 상공을 지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어느새 구대륙이다. 오래된 대륙이란 뜻이다. 위를 향해 긴 육면체들이 높은 밀도로 나타나는 곳은 주로 신생 조직들이다. 예를 들면, 홍콩, 상하이, 싱가폴 그리고 서울과 같은. 영국은 구대륙에 있다.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길고 긴 낮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인간의 비행기를 태양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나는 미련하게도 자연의 힘을 믿었다. 결국 태양은 나를 따라잡으리라. 그러면 밤이 오리라. 그 밤은 짙을 것이고 그 짙음이 펼쳐주는 무대 위로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비싼 보석처럼 내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오리라. 그것은 운명과 같으리라. 우리는 운명의 검은 힘에서 무수한 찬란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러나 브리튼 섬에 상륙할 때 운명이 내게 보여준 것은 기울어져 가는 태양의 작은 선물, 오렌지 색깔로 휘날리는 옅은 수증기 덩어리였을 뿐이다. 둥근 지구의 윤곽을 이루는 수평선을 가리고 있는 구름들에 노을이 지고 있었고 아직은 충분한 빛 아래서 브리튼의 땅이 보였다. 다각형의 녹색 영역과 갈색 영역이 곳곳에 펼쳐져 있고 높이가 낮은 구조물들이 높은 밀도로 여기 저기 모여 있다. 구대륙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비행기는 엔진을 끄고 오래된 도시를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제 출입국 심사대만 통과하면 된다. 출입국 심사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는 사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살짝 긴장이 되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은 여자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향해 손을 내민다. 내 차례다. 나는 젊고 마르고 대머리인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푸친같이 생겼다. "여기 오기 전에 뭘 했죠?" "용접이요." 그러자 푸친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선 용접하면 안됩니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거리며 "Of course..." 라고 했다. 사실은 "Of course ye..."까지 발음했고 s 발음을 급히 빨아들였다. 하마트면 "당연히 용접일 할 겁니다."라고 대답할 뻔 했다. 푸친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내 서류 하나에 도장을 꽝 찍었다. 나는 그저 무심한 척 무거운 짐꾸러미를 들고 매고 입국 심사대를 빠져 나갔다. 입국장 라운지에는 m이 나를 픽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It's been a long time since we met and..." 하고 사이를 띄운 후 "...kissed." 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 튜브 용량이 100g이 넘으면 안된다고 치약을 뺏어갔어. 내 치약이 120g이었거든. 그래서 기내에서 20 시간 동안 세 끼 식사를 하면서도 양치질을 한번도 못했다." 그러면 m은 인상을 찌푸릴 것이고 나는 그걸 즐거워 하겠지. 그러나 m을 만나는 건 너무도 오랜 만이었다. 우리 사이엔 긴 비행에서 온 피곤함같은 어색함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m의 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랬다. 영국은 오래된 건축물처럼 보였다. m은 실제로도 그렇다고 했다. 여기는 구대륙이 맞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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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1-08-1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의 부정문에 대한 답변은 늘 어렵습니다. 제대로 대답한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weekly 2011-08-21 07:19   좋아요 0 | URL
예 부정문 잘못 사용했다가 입국 거부 먹을 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