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이다. 아마 홍콩국제공항일 것이다. 영국 가는 길에 중간 경유지로 들른 차다. 두 시간쯤 있다가 런던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스케쥴이 약간 밀려서 조금 긴장되어 있는 상태다.
주위를 둘러본다. 공항 청사의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산들, 구름들, 그리고 하늘. 전혀 낯섬이 없다. 아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이나 그걸 염려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얘기하는 모습도 매우 낯익다. 젊은 여자들의 옷차림? 내가 한국을 떠나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언어가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들이 구름을 이루며 떠다닌다. 그것들은 벽이나 간판에,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중간 기착지일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 비행기 동체에 칠해져 있는 조잡해 보이는 색깔들, 딱 한국 아이처럼 생긴 아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외국어들을 풍경처럼 바라본다.
그렇지만 역시 언어가 문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어다. 아까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 스튜어디스가 와서 식사로 무엇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은 것 같았다.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누들?" 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스튜어디스가 "오, 누어들?" 이러면서 음식 꾸러미를 내 앞 테이블에 차려 주었다. 맛있게 먹었다.
조금 있으니 또 다른 스튜어디스가 와서 커다란 쥬스통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했다. 오렌지 쥬스와 사과 쥬스가 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물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또박또박 "오렌지"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 스튜어디스는 "오, 어뢴지." 하며 오렌지 쥬스를 내 잔에 따라 주었다.
조금 있으니 또 다른 스튜어디스가 왔다. 아마 커피 먹으라는 소리같았다. 나는 "Yes, please." 라고 했다. 스튜어디스가 커피를 따르려다 내가 차컵을 음식 먹느라고 이미 써버린 것을 보더니 "I will brought one."이라고 했다. 오늘 내가 처음 알아 들은 영어인데 문법이 심상치 않다. 물론 커피를 마실 수 있었으니 되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 영국에 건너간다 하면서도 영어 공부한 것이 거의 없다. 아이폰에 쓸만한 영어 사전 앱을 몇 개 다운로드받은 것이 영어와 관련하여 가장 집중력 있게 한 일인 것 같다. 지금은 슬슬 입국심사가 걱정이 된다. 조금 아까 웹에서 찾아보니 별 게 없긴 하더라. 물론, 음료를 어떤 것으로 할 것이냐를 묻는 말도 별 것 없는 것이었으리라.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은 손으로 물건을 집고 코를 풀고 하품할 때 입을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갈 곳에서는 그걸 발로 하라고 요구한다. 그곳 사람들은 콧구멍을 팔 때 새끼 발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손을 사용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나는 기내에서 읽으려고 들고 다니던 괴테의 "파우스트"를 짐짝에 넣어버렸다. 그러나 이 블로그, 이 기록들만 예외로 하자는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예 벙어리가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