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상사
클라우스 리젠후버 지음, 이용주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중세를 암흑 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중세의 사상사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를 암흑 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중세의 사상을 다룬 책을 찾아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사상을 기술하기 위해 중세의 어휘와 개념과 방법들을 차용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그 이상일 것이다. 그 이상일 수 밖에 없으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러한 짐작에 무게를 더하게 되었다.

이 책은 독일 출신의 수도사가 쓴 것이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책에서 풍겨나오는 정서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중세 사상사를 기술하는 방법으로 주지주의적인 것과 주의주의적인 것이 있다면 이 책은 다분히 후자를 택하고 있다. 그래서 중세 사상을 특징짓는다고들 하는, 그 보편논쟁 같은 것은 이 책에서 크게 다루어 지지 않는다. 철학적, 신학적으로 중세라는 쌍봉 낙타의 혹 하나씩을 차지한다고 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비중은, 이 책에서만큼은 상당히 적다.

특정 인물을 도드라지게 하는 대신 이 책은 사상과 문화와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해 준다. 사상적으로는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사이의 긴장을 인정하면서 가능한 균형 있게 둘을 소개해 준다. 사실 주의주의적인 사상이 사상사 속에서 주목을 끄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나도 그런 사상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재미나 감동의 대부분은 저자가 애정을 갖고 소개해 준 주의주의적인 인물들에게 받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초기 기독교 시대에 사막에서 신과 대면하며 청빈하게 살아가는 흰수염의 성인들을 보며, 저자는 평심한 척 기술했지만,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적 성인과 철학적 성인(예컨대 스피노자)을 비교하는 것은 철학적 성인에게 참 안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성인의 시대는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다. 기독교가 작았고 순수했고 교리적으로 단순했던 시절. 모든 것이 그렇듯 그랬던 시절은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하얀 신비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눈을 뜨면 바로 현실이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아벨라르두스의 사상적 적이라 할 수 있는 베르나르두스에 대한 길고 세심한 소개이다. 엘로이즈와의 로맨스로 나는 아벨라르두스의 사상을 알기도 전부터 그의 팬이 되었었다. 그런데 저자가 소개한 베르나르두스의 사상은, 내가 보기엔 100 퍼센트 아벨라르두스에 대한 반박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사악한 저자는 둘 중 한 사람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두 말할 나위없이 베르나르두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유일신 사상이나 인격신 사상 등, 우상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왔던 관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비트겐쉬타인의 말대로 우리의 시대는 비스마르크마저도 대체할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에게 이런 소외의 감정, 잉여의 감정은 대단히 깊은 타격을 준다. 철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이걸 병이라 하자. 그러면 현대 사회는 이 병을 치유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전망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아는 한 그런 건 없다. 우리 앞에 그런 병을 치료해 준다고 간판을 내건 병원은 없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베르나르두스의 다음과 같은 귀절을 읽어 보자.

"그때에 인간은, 첫째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둘째 신이 자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신을 사랑하고..." 

나의 존재를 감싸안는 절대 안정의 느낌을, 절대적이며 유일하며 정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인격신 이외의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다소간 형식적이며 다소간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인간이란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집착하는 도시에 사는 종족이다. 인격신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무리한 조언이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지지해 줄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격신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스피노자에게로 난 여러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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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3-08-28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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