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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상상력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지영래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나도 그랬지만 이 책을 서가에서 뽑아든 사람들의 생각은 대충 비슷할 것 같다. 즉, 이 책이 사르뜨르의 대작인 "존재와 무"에 대한 입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상상력"은 실증적 인간학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는 책이고 "존재와 무"는, 내 기억에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시론"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뜨르는 이미지에 관한 이론을 실증적 인간학 또는 실증적 심리학의 가장 약한 고리로 보고 "상상력"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상학적 인간학, 또는 현상학적 심리학, 또는 현상학적 존재론을 대안으로 부각시킬 좋은 기회로 여겼던 것 같다.
역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이 책은 어렵다. 쉬운 철학책이란 형용모순이기도 하지만 이 책엔 독서에 부담을 주는 실질적인 요인들이 적잖이 놓여 있다.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알랭, 훗설 등 생소한 철학자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낯선 심리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사르뜨르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매우 응축된 필치로 이들을 난도질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르뜨르가 프랑스 출신 작가라는 점을 의식하게 하는 특징, 즉 때묻은 순수함이라 할만한 그런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사르뜨르의 문체는 매우 명쾌하고 투명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순수함, 명쾌함, 투명함은 과장된 것이고 과장된 만큼 엉큼함이 느껴진다. 뒤에 뭔가를 숨겨 놓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느낌은 다루는 주제의 난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서술상의 특성에 관한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예를 들면 사르뜨르는 논설하는 항목의 주제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지금 논설하는 것이 긍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그것이 남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인지 비판하는 것인지 불투명하다. 쇼펜하우어가 최대한의 성의를 기울여 오해를 방지하려 했다면 사르뜨르는 오해되는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바보 골라내기 게임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고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의 서론은 가장 평이하고 명쾌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장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바로 여기다. 사르뜨르는 사람들이 종잇장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를 종잇장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혼란스럽다. 우리가 종잇장에 대한 이미지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그 종잇장에 대한 어떤 표상일지언정 종잇장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르뜨르는 회색 벽지를 바라보는 나에게 아까 보았던 그 종잇장이 다시 나타난다고만 서술하고는 입을 딱 다문다. 일부러 입을 꽉 다문 모양이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여서 나는 웃음을 참아야만 한다. "상상력" 전편을 읽으면 사르뜨르가 왜 이런 식으로 서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더불어 그 서술의도 속에 고의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약은 계산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내게는 이런 혼란스러움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이었다는 것을 말해두겠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미지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떤 대상에 대한 고정된 관념, 그 대상하면 떠오르는 어떤 것, 그 대상에 대한 기억, 그 대상에 대한 캐리컬처, 과거에 그 대상에 대해 지각한 것을 되가져 온 것, 그러나 좀 약해진 지각, 내게 어떤 관념을 떠오르게 하는 것 그러니까 어떤 기호, 공상적인 존재에 대해서라면 이런 저런 표상들을 섞어 조합한 것 등등... 아마 대체로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이것을 일단 이미지에 대한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말해 두자. 사르뜨르가 "상상력"의 전편을 통해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에 대한 이런 자연주의적인 태도이다.
사르뜨르가 자연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이유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자연주의적인 태도에 기반해서는 이미지와, 현존하는 대상에서 비롯된 실재 감각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 단락의 이미지에 대한 관념들을 다시 살펴 보라. 이미지가 현존하는 실재 감각들, 또는 지각된 것들, 또는 표상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르뜨르는 우리가 현재 부재하는 어떤 것을 떠올리는 순간(즉, 상상하는 순간), 그것이 실재 감각과 다른 어떤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르뜨르의 말이 옳다. 우리가 켄타우르스를 상상하면서 그것을 현존하는 어떤 대상의 실재 감각과 혼동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적 태도는 지각이나 상상에 대한 우리의 순수 경험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한다.
그러면서 사르뜨르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기반하고 있는 실증적 인간학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비판을 시작한다. 요점은 간단하다. 실증적 인간학은 모든 것을 사물로 환원시켜 버려서 자기의식을 고유한 특성으로 하는 인간 의식의 자리를 박탈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하는 철학사와 흄 이후의 심리학사, 그리고 사르뜨르와 인접한 세대의 베르그송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러나 나는 다 필요없다고 말하겠다. 그냥 "상상력"의 서론만 다시 살펴 보면 된다고 말하겠다. 사르뜨르가 독자가 일찍 알아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불투명하게 해놓은 부분을 투명하게 복원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겠다.
서론에서 사르뜨르는 흰 종잇장을 바라보는 경험을 서술한다. 그 경험 속에서 흰 종잇장은 흰색이며 네모난 형태며... 등등일 것이다. 그런데 그 순수 경험 속에 그것이 어떤 사물에 대한 모사본인지, 아니면 사물 그 자체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의문들을 배제하는 것, 그것이 훗설의 괄호치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르뜨르는 마치 표상과 사물 그 자체가 동일한 것인냥 서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건전한 정신을 갖고 있던 나는 맥락 없이 들이닥친 현상학적 순수 경험의 실험에 당황하여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제 나는 흰 종잇장에서 고개를 돌려 회색 벽지를 바라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까 보았던 흰 종잇장이 내게 다시 나타난다. 사르뜨르는 이렇게만 서술하고 말지만 그것은 내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내가 떠올린 것이다. 내가 상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상상하는 행위 속에서, 그 지향적 행위 속에서 종잇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상상하는 한 내가 상상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지각과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이 전부다!
이미지에 대해서 우리는 두가지 접근을 할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을 상상된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미지는, 그것이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것임에도 일반적인 지각 표상과 구별하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행위 자체로 보는 것. 이럴 경우 이미지는 상상하는 행위 속에서 일반적인 지각 표상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리고 이미지를 어떤 내용물로 봤을 때의 여러 난점들, 예컨대 상상의 대상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다.
따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전자의 방식이 사르뜨르가 비판해마지 않는 자연주의적, 실증적 접근방식이고 후자의 방식이 사르뜨르가 계속 발전시켜 볼 야심을 갖고 있는 현상학적 방법이다. -사르뜨르적 방법의 성과는 후속 작업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그것들을 나의 TOREAD 목록에 넣어두고 있다.
그러면 사르뜨르가 현상학적 인간학으로 실증적 인간학을 대체하려고 그토록 애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의식의 자리를 되찾아 주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토록 사르뜨르에게 의식이 문제가 되는가? 의식의 본질은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르뜨르의 전기 철학의 핵심 테마가 여기 이렇게 등장한다.
이상이 "상상력"에 대한 나의 과격한 요약이 되겠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본질적인 훼손 없이는 어떠한 요약도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잠깐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말해 두기로 하자. "상상력"이란 책에서 본질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더 쉽게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의 본질적인 부분은 어디인가?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인가? 그러면 제목의 몇 단어로 쇼펜하우어의 주저는 명쾌하게 요약된다. 그러나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 것은 전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철학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러면 어떤 부분이 본질적인 부분인가?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즉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 되어 있다는 이념이 문제들과 부딪히고, 그 해결을 모색하고, 그 와중에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저자가 고의로든 미처 의식하지 못해서든 결과적으로 문제들을 은폐하고 피해가고 한 자취들, 그리고 운동의 과정에서 풍족해졌거나 홀쭉해진 이념들, 그런 것들의 총체가, 특히 철학서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해서 철학서에 있어서 요약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 전체에 대한 나의 변명은 위의 요약이라고 해놓은 것은 나의 해석이라는 것이 되겠다.
내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나의 요약, 역자가 해놓은 요약, 역자가 이 책은 어려우니 급한 사람은 서론과 결론만 읽어도 무방하다고 조언한 것 따위는 싹 무시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왜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을 요구할 권리는 책의 저자에게도 없는 데 말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별안간 존재론적 사변으로 시작하더니 정색을 한 채 문제의식을 발설하고 이어 전 세대의 심리학사로 뛰어들어가 사변적 개념이 당대의 사회 정치 종교적 환경과 어떻게 엮이는 지를 논설한다. 나는 그 부분을 쓰면서 사르뜨르가 분명히 킥킥대고 있었다고 장담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사르뜨르의 주적은 실증적 심리학자들과 그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형이상학자들인데, 당시 보수적 지배 계급의 주적도 사르뜨르의 주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사르뜨르가 데카르트부터 흄까지 싸그리 잡아 비판하는 것과 똑같이 당시 지배 계급의 지식인들은 이들을 무신론이라, 유물론이라 비판하며 잡아 죽일 기회를 엿보고 그들의 책을 금서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보수파 지식인들은 정당했고 그들의 예언적 통찰은 옳았다. 사르뜨르가 "상상력"이란 작은 책에서 한 일이 바로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논증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르뜨르는? 사르뜨르 역시 지배 계급의 지식인과 같은 노선에 서 있는 것인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 사르뜨르는 좌파들로부터 부르조아 철학자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으며, 결국 사르뜨르는 "존재와 무"에서 개진된 철학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또 하나 이 책에서 인상 깊은 것은 사르뜨르가 자신의 철학을 설립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허다한 실증 과학 문헌들을 읽어 냈다는 것이다(필요한 부분만 읽었겠지?). 실증적 태도를 거부하는 철학자의 실증적 학구 태도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문헌들의 대부분은 사르뜨르가 속해 있는 전통의 것이었으며 그 전통의 언어로 되어 있었다. 사르뜨르 역시 그러한 전통과 상황이 만들어낸 도전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르뜨르는 자신의 실존 안에서 철학을 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철학을 하는 데 있어 이외의 방법은 없다. 자신의 고유한 문제 설정 없이는 방법이 가능하지 않고 방법이 없이는 철학이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다면 원숭이가 잘 하는 흉내짓뿐이겠지... -"상상력"에서 사르뜨르가 보여준 열정과 패기에 감염되었는지 순간 이런 증세가 나타났다. 양해를... 여기까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