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이러저러한 현상학 저작들에 대해 문의하시는 분들이 있다. 아래는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다... 


학부 졸업반 때 저자 직강으로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 강의를 들었었다. 졸업반이다보니 다들 수업보다는 취업 정보 등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의는 거의 파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전숙 교수님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수강 학생 전원을 강의실에 불러 모으셨다. 


한전숙 교수님은 큰 키에, 조용한 학자 스타일이셨다. 서두에 이러 저러한 꾸지람을 하셨고 이어서 철학과 학부 4학년 학생이라면 응당 알고 있어야 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어떤 개념에 대해 질문을 하셨다. 아무도 대답을 않자 (아마도 홀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을) 나를 지목하셨다. 나는 "모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조용한 학자 스타일의 명예 교수님이 천둥과 같은 소리로 화를 내셨다. 그 천둥과 같은 꾸지람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철학 학부 4년 내내 나는 그러한 열정에 목말라 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러한 상기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먹고 사느라 바쁜 세월을 보내다 어찌 어찌 영국에 오게 되었을 때 나는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 책을 짐짝에 꾸려 가지고 왔다. 이미 여러 번 읽은 터였다. 다른 이러 저러한 책들, 예컨대 후설, 브렌타노, 하이데거 등의 현상학적 저작들도 꽤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후설이나 하이데거는 일급 철학자들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상학 연구자 일반은, 꽤나 저명한 연구자들을 포함해서, 이류나 삼류에 불과한 것 같다. 내가 현상학의 질곡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현상학의 문제들은 한없는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블랙홀과 같다. 거기서 벗어나기도 어렵고 거기서 어떤 포지티브한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이라는 책의 서문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한전숙 교수님은 수십년 동안 거의 후설만을 줄기차게 읽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얄팍한 참고서에 불과한 <현상학>이라는 책이 당신이 현상학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고 했다. 물론 그 말씀에는 겸양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겸양 등등의 가치를 높게 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말씀을 한전숙 교수님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분은 누구보다 성실한 학자셨을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철학적 통찰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현상학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작은 활자로 수 백 페이지 짜리 책 수 십권이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간행되고 있다. 그것들을 읽고 정리하고 소화해내고, 그리하여 그것들을 넘어설 것을 기획하는 것은 합리적인가? 만일 그랬다면 후설이 그 일을 했을 것이다. 후설의 전체 철학 경력이란 무한한 암중 모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후학들이 후설을 연구한다고 해보자. 후학들은 그 무한한 암중 모색에서 일정한 원리들을 추려내고 그것들로 정합적인 체계를 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다면 후설이 직접 그것을 해놓았을 것이다. 현상학은 무한한 미궁에서의 암중 모색이다. 거기에 출구가 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다룬 한전숙 교수님의 <현상학>,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 등등>에 대해 이러 저러한 문의를 해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 중 한 분은 학부에서 철학과를 지망한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정보 등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그러면서 찜찜함, 혹은 일종의 죄책감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현상학을 멀리 하세요. 차라리 칸트를 읽으세요. 그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예요. 그러나 나는 오지랖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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