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

헤겔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지고 나서야 날개짓을 한다고 했던가... 혹은 내가 곧잘 하는 농담으로,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리면, 그래서 길이 끊기면 그때부터 철학자의 시간이 시작된다... 든지...


영국의 어떤 전직 판사 출신 아저씨가 신문에 기고하기를, 현대인들은 죽음을 너무 무서워하여 삶으로부터 죽음을 필사적으로 떼어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죽음 역시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안을 줄 알아야 하고, 그것과 동거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봉쇄는 우리를 철학자가 되게 하고, 실존적 고민을 하게 하고, 현대적 삶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더러는 근대성의 비판자들과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도 한다. 여튼 우리 시대의 실존의 조건이 폭압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우리 시대의 실존의 조건은 이런 식의 사유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선, 개인의 실존적 결단과 한 사회의 정책적 결정은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라는 일반론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란 그로 인한 전적인 책임(설사 죽임에 이를지라도)을 자신이 온전히 받아안을 것임을 표명하는 것이지만, 이 치명적인 전염병 사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개인이 행한 전적으로 무해해 보이는, 전적으로 사적인 행동(이 좋은 봄날 공원에 나가 한가이 거니는 것)도 그 책임의 범위가 그 개인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실존의 조건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우발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질문을 돌이켜보게 된다. 현대적 삶에서 개인들은 원자화되었는가, 혹은 복잡한 네트워크의 한 계기일 뿐인가, 아니면 어떤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인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해 분명한 답을 할 수 있다. 답은, 셋 다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자들은,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제출한 답들의 한계를 바로 지적할 수 있다. 그네들은 대상이라는 개념을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 물론, 여기서 이 대상이라는 개념에 대해 철학적 논술을 할 수는 없다. 이 글의 의도는 잡담을 하자는 것이므로...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김용옥씨가 중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하는 유튭의 일부를 봤다. 앞선 강의에서 고전 그리스 철학에 대해 강의를 한 듯 하고, 그 내용은 아마도 플라톤적인 이원론을 설명하는 것이었던 듯 하다. 가지계/감각계, 혹은 사물 존재/이데아 존재, 혹은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혹은 무상한 것/영원한 것, 등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한다. "그럼 언어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요?" 순간 강사의 얼굴이 굳고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심오한 사유의 길로 통할 수 있는 질문을 피상적인 것으로 둔갑시킨 후에야 자신이 준비한 구도에 겨우 끼워 맞출 수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여학생은 플라톤의 정의를 벗어나는 존재의 예를 제시한 셈이다. 언어의 존재. 철학자들은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자이다. 바로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 하이퍼-대상이든, 하이브리드든, 또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든. 공정하게 말하자면 플라톤 역시도 당대의 요구에 맞춰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자였다. 그의 경우는 이데아의 존재를. --- 그리하여 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철학자는 현재에 대해 사유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을까?


(김용옥씨의 서양철학사에 대한 지식이 2, 300 페이지 짜리 철학사 한 권 이상이 아님은 이제 비밀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김용옥씨가, 자신이 약속한 대로 조선철학사를 결국에는 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동서양 철학에 식견을 갖고 있고 중국과 일본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학위를 한 분이라니, 경력상으로 이 이상의 사람을 20, 30년 안에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소용돌이 속에서 보면 한국은 참으로 많은 것을 갖고 있는 나라인 듯 싶다. 그런데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역시 사상적인 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대영박물관 서점에 가보라. 중국과 일본 섹션은 책장 하나 둘씩 배정되어 있는데 한국 관련 서적은 단 한권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보면 나의 기대는 단지 기대일 뿐인 것 같다. 한국 갔다 오는 친구에게서 최한기의 "기학"이라는 책을 사오게 해서 대충 봤었다. 그리고 실망. 19세기 중반, 과장해서 말하면 두 개의 문명이 만난다. 그리고 두 문명의 만남의 양상은 몇 가지가 되지 않는다. 요컨대, 당시 조선을 기준으로 조선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몇 개 되지 않는다. 1). 배척한다. 2). 서양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것을 되돌아 보면서 개혁 노선을 취한다. 3). 취할 것은 취하고 배척할 것은 배척한다. 4). 거의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5). 둘을 융합하여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위의 선택지들의 상당 부분은 이론적인 것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튼, 최한기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기대한 것은, 이론적인 수준에서의 5)였다. 김용옥이 그렇게 광고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나의 그런 기대가 바보같은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식의 융합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몇 세대를 거쳐야 가능한 것이지, 한 사상가의 생애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뉴턴 앞에 갈릴레오 등이 있었듯이 최한기 앞에 그런 인물들의 축적이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군가가, 마치 괴테의 작품들이 독일어의 표준화에 기여한 식으로, 한국 철학사의 정립에 기여하는 그런 작품을 당장 써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아마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럴 것이다. 그런 작품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 자체, 그런 작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 것이라고. 몽상, 혹은 환각에서 깨어나자.)      


2. 코로나 바이러스

한 마디로 말하면 영국은 평온하다. 하루에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있지만 그 죽음들은 단지 숫자일 뿐이다. 뉴스에서는 그 죽음의 현장을 보도해 주지 않는다. 공식 집계에 포함되지 않는 요양원에서의 환자들의 죽음 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병원에서 사망한 환자만 집계한다).그러나 그 숫자가 어떻게 되는지, 그 양상이 어떤지에 대해서 뉴스는 침묵한다. 


내가 어저께 확인한 것을 기준으로 말하면 영국의 일일 검사량은 사람 기준 12000명 수준이다. 그리고 확진률은 40%가 넘는다. 그러므로 영국의 코로나 곡선은 당분간 상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전문가를 대동하고 나와서 기자회견을 할 때, 어떤 전문가가, 검사한다고 다 양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국 자료를 보면 95% 이상이 음성으로 나온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할 말은 무지 무지 많지만 ... 밥 먹을 시간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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