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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는 상상력을 통해 가상을 만들어 낸다. 이 가상을 우리는 흔히 허구라고 하는데, 그 허구가 핍진성을 띠고 독자에게 실재감으로 전해질 때 소설가는 진정으로 소설적 공간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핍진한 공간감을 조형할 수 있느냐 여부는 소설가의 역량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우선 이 소설이 놀라운 소설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자. 고등학교 시절 <오감도>나 <날개>만을 접했던 이들에게 이 소설은 이상 문학만큼이나 난해한 지적 유희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상 문학의 진의를 교육할 수 있는 교사의 부재가 빚어낸 불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문학 교육이 문화적 감수성의 교육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 청소년들이 일궈갈 미래의 모습은 그리 밝다고 할 수 없다.
표준화된 해석조차가 채 소화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이상이 <오감도> 발표 당시 독자로부터 받았던 항의를 재연한 꼴이다. 사람들은 천재의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 이 소설에 접근했다가 심한 배신감만을 얻는다. 하지만 작가가 이상과 같은 전략을 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기존의 방대한 연구 성과를 지난한 시간을 들여가며 찾아 읽고 정리하여, 그로부터 그의 생애와 작품, 그에 대한 평가를 엄밀히 재구하고 그 속에서 비밀처럼 풀리지 않는 지점들에 착목하여 작품의 얼개를 짜고 있다. 사망시 남겨졌다고 알려진 데스마스크를 추적하는 기자, 그리고 이상 신화의 모방을 꿈꾸는 이상 추적자, 그리고 정체성 찾기의 필사적인 방편으로 이상 문학 연구에 몰두하는 재미교포 등은 이상 신화가 현실에서 가진 의미를 엿보게 하는 구성이다. 진본/위본이라는 얼개는 굳이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많이 보아온 것으로서, 작가의 독서체험과 90년대적 감수성이 결합된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성 찾기 모델로서의 문학 연구는 한국 대학에 유학온 교포 학생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것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부분은 이상 신화의 열렬한 탐구자/모방자로 등장하는 서혁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오감도 제16호>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위본을 제작하고, 이상의 마지막처럼 동경제대 병원을 찾아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이상 신화에 집착한다. 그의 삶은 이상의 행적을 추적하고 그것을 재현함으로써만 의미를 가지는 삶이다. 일상인의 관점에서는 피폐한 삶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상과 그의 문학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 때문이다.
지금 그 누구도 이상을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없으리만큼 그의 글쓰기는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일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병적이고 퇴폐적이고 우울한 인간이었으나 글쓰기와 관념의 세계에서만큼은 일세를 놀라게 할 만큼 앞서간 사람이었다. 따라서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신화적인 인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을 우리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자부심이다.
삶은 나르시시즘에 기반해 있다. 나르시시즘의 거울을 가지지 못한 존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이상은 찬란한 나르시시즘의 거울처럼 존재한다. 그 거울을 깨지 않고 생을 마감한 서혁민의 삶은 적어도 행복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상 리포트 수준을 몇 단계 넘어선 진지함과 상상력을 가진 작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