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이상 이상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지금은 2003년이니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도 꽤 나이를 먹은 편이다. 고전 축에 끼기에는 연륜이나 평가 면에서 아직 요원하고, 동시대적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철 지난 작품집이다. 이 작가나 이 작품집이 특별히 기억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극히 일부의 독자층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내가 이 소설집을 고르게 된 것은 다소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정확히 1달 전 2003년 5월 23일까지만 해도 나는 박성원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잘 몰랐다 해도 내 독서 편력 어디쯤엔가 이 작가가 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한 편의 아귀가 잘 맞는 스토리의 종결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 중 특히 초반부의 '유서'나 '크로키, 달리와 갈라'같은 것들은 읽기에 지루하고 다 읽고 나서도 특별한 감상이 떠오르지 않는 범작이다. 범작치고는 문장 구사력마저 시원치 않아서 이것이 작가의 미숙성을 말해 주는가 싶은 의혹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문장도 그렇고 구성력이나 주제 면에서 확실히 나아짐을 느낄 수 있다. '라이히 보고서'같은 작품은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다분히 통속성이 짙은 편이고, '해 뜨는 집'은 성에 대한 작가의 관념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작위적인 상황 역시 작가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효과적이라면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수록 작품들 중 내가 가장 눈여겨본 작품은 '이상 이상 이상'이다. '유서'도 그렇지만 화가 지망생으로 출발한 작가 이상의 삶과 작품을 상상력의 기초로 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으로, '유서'가 사실 범작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면, 이 작품은 범작을 넘어서 조금 더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김해경이라는 노 작가의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노 작가의 정체성의 비밀에 다가가려는 주인공이 겪는 노트북 속의 소설 내용과 주인공의 경험적 현실 사이의 혼돈, 그리고 그 혼돈을 이어주는 내밀한 욕망으로서의 성욕은 일찍이 허구와 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 지대 창출을 최대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았던 이상의 전략 바로 그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작품집 말미에 수록된 김태환의 해설은 박성원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로서는 본질을 벗어나 있거나 거기에 미달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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