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보기 - 시청에서 비평으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4
정준영 지음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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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은 가장 값싼 오락의 수단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지 않는다. 할 일도 없이 무료한 때 식상한 유머로 한 번 웃겨 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따라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해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시민 단체 모니터 요원들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시청률과 선정성을 앵무새의 판에 박힌 레퍼토리처럼 반복하는 텔레비전 비평에 신물이 나기도 한다. 시청률 지상주의만 벗어나면 괜찮은 방송이 될 것처럼 얘기하는 비평, 그리고 방송의 공익성, 유익성에 유념하고 있노라는 제작진의 판에 박힌 변명으로 이뤄지는 말들은 이젠 관성의 차원을 넘어 시청자들의 의식에 어떠한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죽은 말이 되어 버렸다.

텔레비전을 둘러싼 죽은 말들의 형해를 넘어 살아 있는 말들이 숨쉬는 곳은 시청자들의 거칠고 조잡하고 단순하고 직관적인 비평들이 쏟아지는 인터넷 게시판이다. 사회자를 교체하라는 요구에서 다음에는 이런 걸 다뤄 달라는 호소 조의 주문에 이르기까지 시청자들의 요구는 다양하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이와 같은 요구는 제작진의 고려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프로그램의 근본을 뒤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시청자들은 방송의 제작 여건과 제작 시 부닥치는 어려움들을 자신의 고려 요소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자체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한 프로그램의 제작 방향은 물론 존폐 여부도 결정된다. 따라서 제작진들은 이 시대 대중의 보편적인 정서와 이해도에 맞춘 프로그램으로 포맷을 맞추게 된다. 따라서 나처럼 대중적인 것에 신물난 사람은 늦은 밤 시간에 도둑처럼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나 케이블 채널을 탐색하기 마련이다. 그런 탓에 나는 텔레비전의 속물스러움과 천박함이 극에 달하는 프라임타임을 즐기지 않는다. 그 시간에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훨씬 더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텔레비전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별로 시청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텔레비전 비평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개인이 만족 여부를 떠나 텔레비전을 일상의 중요한 도구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있어 텔레비전 비평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업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비평은 전문가가 행하는 이론적 기반이 탄탄한 말이 아니라 순간적이고 단편적인 인상에서 비롯되는 판단의 수준에서 행해지는 비평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알게 모르게 비평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비평을 너무 좁은 개념으로 해석하여 자신이 특정 프로그램에 대해 던지는 말들을 비평에서 배제하고 있을 뿐이다. 유익한 비평은 자신의 사고력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고, 시청자의 요구로 통칭되는 추상적인 요구의 질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비평을 하자면 텔레비전이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산업으로서의 위상과 메커니즘, 프로그램 제작의 일반적 여건이나 고려 사항 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을 텔레비전 보기에 투자하며 인기 드라마에 대해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릴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프로그램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나 비판 이전에 텔레비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같다. 이런 경우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라는 책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텔레비전에 대해 고려해야 할 일반적인 여건보다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텔레비전의 의미에 관심을 가진 책이기에 지식인적 관점을 굳이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부르디외 책보다는 정준영의 이 책이 이런 용도로는 훨신 쓰임새 있게 구성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텔레비전에 대한 통념에서부터 시작해서 텔레비전이 처한 환경과 매체적 특성, 실제 제작 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단순한 시청에서 비평으로 넘어가야 할 필요성까지 주입하고 있어 계몽의 효과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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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한세상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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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수년에 걸쳐 쓴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지만, 독자들은 그 작품들을 마음만 먹으면 단 몇 시간 내에 읽어 낸다. 그리고 어제 밤 감동을 느끼며 읽은 소설을 오늘 아침에는 까맣게 잊고 또 다른 소설을 집어들며 탐독하게 된다. 이것은 소설가에게는 일종의 변덕이나 배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제 과거 위대한 작가의 작품처럼 오랫동안 독자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소설가란 기껏해야 수많은 읽을거리 중 하나를 제공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감안한다면 그리 서글플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무수한 읽을거리 중에서도 소설에 대해 독자로서 마지막 남은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에 대한 몇 마디 감회를 덧붙이는 일일 것이다

90년대에 탄생한 무수한 여성 작가들 중 동류에 놓기에는 가장 어색한 작가가 공선옥이 아닌가 한다. 은희경, 신경숙 같은 스타 작가들이 화려한 언론과 세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궁벽한 시골 벽지로 내쫓기고 가난과 싸우며 글 하나로 먹고살겠다는 오기를 부린 작가가 공선옥이다. 모든 것이 번성의 이미지로 뒤엉킨 이 초산업국가적 현실에서 공선옥만은 유독 가난의 문제를 끈질기게 붙안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가난은 생존의 최저 조건으로 그의 실존을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하고 미래의 지평을 넘보거나 타자와의 관계를 차폐하는 장막처럼 작가를 가로막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와의 관계를 청산할 때 여자에게 닥치는 삶의 어려움을 가장 절실히 느끼며, 그 고통을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 보이며 날 것의 생생함과 낮지만 깊은 절규를 토해 낸 작가가 공선옥이다.

<멋진 한세상>에는 이처럼 작가가 생의 조건처럼 붙안고 사는 가난의 시선, 홀로된 여성의 시선으로 펼쳐 보인 삶의 얘기들이 담겨져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의 고통을 신경향파적 감각으로 그려낸 <그것은 인생>이 고통의 극화와 타인의 무관심에 대한 비판 의욕으로 인해 다소 의외의 감각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가의 실제 경험을 통해 걸러 낸 삶의 얼개를 바탕으로 일상의 진실을 파악해 들어가고 있다. 이들 작품의 중심에는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여성이 존재하는데, 그녀는 조화롭고 평온한 가족상의 해체 모습을 여실히 증명하는 발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가정은 항상 남자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것은 가부장이라는 남성의 영역이 결여되어 있어 그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힘겨운 상황으로 그려진다. 그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때로 가족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위악적인 포즈를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주인공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통의 정직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여성 작가들은 여성성의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했고, 그것을 사회적 의제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항상 언론과 상업성의 맥락에서 적지 않게 그 의미가 희석되거나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여성성의 문제를 작품화함에 있어 여성으로서의 실존적 맥락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결혼을 비롯한 가부장제의 문제를 추상적 자유의 문제로 곡해하는 상황이 일반화된 점은 아쉬운 구석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공선옥은 90년대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여성 문학의 소외된 영역, 즉 가장 현실적 지반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안고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로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작품 활동의 실정적 조건 자체를 초월하여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선옥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곧바로 그녀의 문학적 성취의 산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작품 활동을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선옥의 작품이 특정한 테두리 내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은 작가가 깨트리고 나가야 할 멍에가 될 것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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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
배식한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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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터넷을 접할 때 당황스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중 제일 신기하고도 묘한 것 중 하나가 하이퍼텍스트라는 것이었다. 마우스를 가져다 대면 파란색으로 변하면서 마우스 모양도 변하면서, 클릭 하면 지금까지 보던 화면과는 다른 화면이 열리던 그 순간, 마치 지금까지와는 전혀 딴 세상으로의 이동을 경험하는 듯 했다. 그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기술적인 이해를 갖추지 못한 채 마냥 신기해하기만 했다. 검퓨터 모니터를 통해 글을 읽는다는 것조차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 한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로의 순차적 이동 방식의 글읽기 관습에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 화면 자체의 변화와 함께 전혀 다른 글로 빠져들고 이전 글로 제대로 귀환하지도 못하던 그 어리벙벙함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분명 그 순간은 하나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 기술적인 베이스에 대한 공부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이와 같은 거대한 혁명이 가능하게 된 역사와 배경,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사람들의 노고와 고투에 대해 한번쯤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로 대변되는 거대한 혁명이 현재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혁명이 우리의 인식론적 기반과 책으로 대변되는 지식 문화의 창조와 수용, 그리고 이해에 있어서 어떤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그 방향성을 한번쯤 검토해 보는 일도 그리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도로 접근하기에 가장 좋은 심플한 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하이퍼텍스트의 원리, 기능,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1장은 다소 지루한 감이 들지만, 하이퍼텍스트의 역사와 인터넷 초심자를 괴롭히는 각종 용어들(프로토콜, ,tcp/ip, dns)의 기원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는 장부터 책은 다소 흥미를 더해 가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 책의 종말론을 걸개로 놓고 펼치는 3장은 더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도로서 컴퓨터에 많은 관심을 쏟아온 사람이다. 철학도로서의 선입견에서 보면 한참 외도를 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런 시도는 낯선 것들간의 경계 허물기가 하나의 숙제처럼 되어 가는 요즘 추세에서라면 더욱 환영받을 만하고, 추동해야 할 경향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하이퍼텍스트가 아무리 흥세한다 하더라도 책의 종말은 불가능하다. 불가능으로서의 책의 종말을 사유하기, 그것은 실정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의 지평으로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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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과의 대화 한나래 시네마 3
프랑수아 트뤼포 지음, 곽한주 외 옮김 / 한나래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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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출생의 불세출의 영화인 두 명을 기억하시는가? 작달막한 키에 콧수염을 기르고 풍덩한 연미복에 지팡이를 들고 도시를 방황하며 고독과 애환과 웃음을 선사했던 찰리 채플린이 그 한 사람이다.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굴까? 평생 채플린의 공과와 영예를 은밀히 부러워했고 육중한 몸매에 열등감을 느꼈고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롭지만 자신은 경찰에 연행되어 그 세상과 격리되는 끔찍한 공포를 안고 산 사람, 그가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채플린과 히치콕, 두 사람은 만약 영화가 아니었다면 너무 작거나 너무 뚱뚱한 그 몸으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해서 그들에게 영화적 재능을 선사했고, 그 후광 아래서 가장 멋있는 남자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히치콕의 영화란 알고 보면 자신의 열등감을 딛고 일어서는 한 남자의 극적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이자 비평가 튀르포와 히치콕의 대담집 <히치콕과의 대화>는 히치콕의 54편 영화 제작 이면의 이야기와 히치콕적 영화의 방법론을 담고 있다. 흔히 히치콕적 영화의 흥미가 서스펜스를 조직하는 영화 형식의 문제로 알려져 온 것처럼 히치콕적 영화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를 조직하는 편집, 촬영, 음향 등 각종 시각적 양식화의 결과이다. 히치콕적인 시선으로 볼 때 우리 영화는 너무나 비영화적이다.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시각적 양식화는 문학적 인과율에 많이 기대어 화면 자체가 진부하고 영화적 긴장이 떨어진다.

이런 문제는 <오아시스>처럼 올해의 최고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오아시스>는 일상 현실을 판타지적 양식화로 재창조해 낸 새로운 멜러 내러티브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존의 시각적 양식화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다. 이처럼 영화적 실험 의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한국 영화가 과연 어떻게 영화로서의 창의력를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적어도 지금 한국영화에 좋은 의미에서 스타일리스트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결코 최신작이라고 해서 호평 받고 예전 작품이라고 해서 무시당하는 상품과는 다르다. 영화가 영화다운 재미와 긴장을 줄 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도를 내포한 시각적 양식화를 거칠 때 가능하다. 같은 이야기라도 히치콕적인 시선을 투과할 때 그 이야기는 긴장을 형성하고 관객을 영화적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히치콕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히치콕은 그의 영화만큼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복잡한 계산을 머리 속에 넣고 다니는 엄밀하지만 기괴한 눈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그 부와 명성만큼 성실하고자 했던 히치콕은 영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성실의 표상처럼 느껴진다. 장선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기점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이 그 종말을 본 한국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히치콕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히치콕은 만약 자신이 영화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다면 학생들에게 무성영화를 만들도록 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무성영화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인데, 엉뚱하게 느껴지는 이 말은 일종의 비꼼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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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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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에서 두 인물들 앞에 놓여져 있는 일그러진 형상과 관련이 있다. 그 형상은 정면에서 보면 화가가 잘못해서 찍어놓은 일종의 오점처럼 보이지만 사각지대에서 보면 해골 형상을 하고 있다. 이로써 지젝이 의도한 바는 그 해골이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왜상이라는 것이고, 그 이데올로기의 응시를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삐딱하게 보기라는 것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은 불가능한 실재를 중심으로 구성된 일종의 환상 구성물로서 현실의 비일관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지만 예의 그림의 해골처럼 그 균열을 두드러지게 하는 실재의 응답으로 대상 소문자 a가 현실에 틈입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론을 바탕으로 지젝은 영화와 소설에서 실재의 침입을 보여주는 예를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모더니즘 소설가 카프카, 그리고 좀 덜 알려진 SF, 미스테리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루스 랜덜, 그리고 위대한 영화 작가로 칭송받는 히치콕을 비롯한 친숙한 영화들을 통해 그가 풀어내는 담론들은 그동안 난해하기만 여겨지던 라깡의 논의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라깡을 전유한 지젝의 논의가 일종의 고급 지적 유희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동안 우리에게 불가사의하게만 여겨졌던, 흔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고 지칭해온 것들이 우리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해왔고, 어쩌면 지젝에 와서야 그 정체가 명료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적 담론이라고 하면 딱딱한 형식으로 서구 이론가들의 담론에 대한 메타적 주석 달기 식으로 흘려왔던 저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대중문화에서 친숙한 예를 통해 난해한 문제의식을 풀어내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지젝의 글쓰기 방식은 우리의 지적 풍토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리라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지젝의 책으로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번역이 깔끔하다는 것이다. 정작 번역할 때는 말못할 고통을 겪어 놓고 정작 그 결과는 형편없는 경우도 종종 있는 학술 번역에 있어 이 책만큼 번역이 깔끔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치 국내 저자의 책인 것처럼 술술 읽히는 것은 순전히 번역자의 역량과 노고 탓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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