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제목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에서 두 인물들 앞에 놓여져 있는 일그러진 형상과 관련이 있다. 그 형상은 정면에서 보면 화가가 잘못해서 찍어놓은 일종의 오점처럼 보이지만 사각지대에서 보면 해골 형상을 하고 있다. 이로써 지젝이 의도한 바는 그 해골이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왜상이라는 것이고, 그 이데올로기의 응시를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삐딱하게 보기라는 것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은 불가능한 실재를 중심으로 구성된 일종의 환상 구성물로서 현실의 비일관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지만 예의 그림의 해골처럼 그 균열을 두드러지게 하는 실재의 응답으로 대상 소문자 a가 현실에 틈입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론을 바탕으로 지젝은 영화와 소설에서 실재의 침입을 보여주는 예를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모더니즘 소설가 카프카, 그리고 좀 덜 알려진 SF, 미스테리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루스 랜덜, 그리고 위대한 영화 작가로 칭송받는 히치콕을 비롯한 친숙한 영화들을 통해 그가 풀어내는 담론들은 그동안 난해하기만 여겨지던 라깡의 논의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라깡을 전유한 지젝의 논의가 일종의 고급 지적 유희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동안 우리에게 불가사의하게만 여겨졌던, 흔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고 지칭해온 것들이 우리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해왔고, 어쩌면 지젝에 와서야 그 정체가 명료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적 담론이라고 하면 딱딱한 형식으로 서구 이론가들의 담론에 대한 메타적 주석 달기 식으로 흘려왔던 저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대중문화에서 친숙한 예를 통해 난해한 문제의식을 풀어내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지젝의 글쓰기 방식은 우리의 지적 풍토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리라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지젝의 책으로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번역이 깔끔하다는 것이다. 정작 번역할 때는 말못할 고통을 겪어 놓고 정작 그 결과는 형편없는 경우도 종종 있는 학술 번역에 있어 이 책만큼 번역이 깔끔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치 국내 저자의 책인 것처럼 술술 읽히는 것은 순전히 번역자의 역량과 노고 탓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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