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한세상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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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수년에 걸쳐 쓴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지만, 독자들은 그 작품들을 마음만 먹으면 단 몇 시간 내에 읽어 낸다. 그리고 어제 밤 감동을 느끼며 읽은 소설을 오늘 아침에는 까맣게 잊고 또 다른 소설을 집어들며 탐독하게 된다. 이것은 소설가에게는 일종의 변덕이나 배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제 과거 위대한 작가의 작품처럼 오랫동안 독자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소설가란 기껏해야 수많은 읽을거리 중 하나를 제공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감안한다면 그리 서글플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무수한 읽을거리 중에서도 소설에 대해 독자로서 마지막 남은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에 대한 몇 마디 감회를 덧붙이는 일일 것이다

90년대에 탄생한 무수한 여성 작가들 중 동류에 놓기에는 가장 어색한 작가가 공선옥이 아닌가 한다. 은희경, 신경숙 같은 스타 작가들이 화려한 언론과 세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궁벽한 시골 벽지로 내쫓기고 가난과 싸우며 글 하나로 먹고살겠다는 오기를 부린 작가가 공선옥이다. 모든 것이 번성의 이미지로 뒤엉킨 이 초산업국가적 현실에서 공선옥만은 유독 가난의 문제를 끈질기게 붙안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가난은 생존의 최저 조건으로 그의 실존을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하고 미래의 지평을 넘보거나 타자와의 관계를 차폐하는 장막처럼 작가를 가로막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와의 관계를 청산할 때 여자에게 닥치는 삶의 어려움을 가장 절실히 느끼며, 그 고통을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 보이며 날 것의 생생함과 낮지만 깊은 절규를 토해 낸 작가가 공선옥이다.

<멋진 한세상>에는 이처럼 작가가 생의 조건처럼 붙안고 사는 가난의 시선, 홀로된 여성의 시선으로 펼쳐 보인 삶의 얘기들이 담겨져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의 고통을 신경향파적 감각으로 그려낸 <그것은 인생>이 고통의 극화와 타인의 무관심에 대한 비판 의욕으로 인해 다소 의외의 감각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가의 실제 경험을 통해 걸러 낸 삶의 얼개를 바탕으로 일상의 진실을 파악해 들어가고 있다. 이들 작품의 중심에는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여성이 존재하는데, 그녀는 조화롭고 평온한 가족상의 해체 모습을 여실히 증명하는 발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가정은 항상 남자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것은 가부장이라는 남성의 영역이 결여되어 있어 그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힘겨운 상황으로 그려진다. 그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때로 가족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위악적인 포즈를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주인공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통의 정직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여성 작가들은 여성성의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했고, 그것을 사회적 의제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항상 언론과 상업성의 맥락에서 적지 않게 그 의미가 희석되거나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여성성의 문제를 작품화함에 있어 여성으로서의 실존적 맥락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결혼을 비롯한 가부장제의 문제를 추상적 자유의 문제로 곡해하는 상황이 일반화된 점은 아쉬운 구석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공선옥은 90년대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여성 문학의 소외된 영역, 즉 가장 현실적 지반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안고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로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작품 활동의 실정적 조건 자체를 초월하여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선옥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곧바로 그녀의 문학적 성취의 산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작품 활동을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선옥의 작품이 특정한 테두리 내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은 작가가 깨트리고 나가야 할 멍에가 될 것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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