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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과의 대화 ㅣ 한나래 시네마 3
프랑수아 트뤼포 지음, 곽한주 외 옮김 / 한나래 / 1994년 10월
평점 :
절판
런던 출생의 불세출의 영화인 두 명을 기억하시는가? 작달막한 키에 콧수염을 기르고 풍덩한 연미복에 지팡이를 들고 도시를 방황하며 고독과 애환과 웃음을 선사했던 찰리 채플린이 그 한 사람이다.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굴까? 평생 채플린의 공과와 영예를 은밀히 부러워했고 육중한 몸매에 열등감을 느꼈고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롭지만 자신은 경찰에 연행되어 그 세상과 격리되는 끔찍한 공포를 안고 산 사람, 그가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채플린과 히치콕, 두 사람은 만약 영화가 아니었다면 너무 작거나 너무 뚱뚱한 그 몸으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해서 그들에게 영화적 재능을 선사했고, 그 후광 아래서 가장 멋있는 남자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히치콕의 영화란 알고 보면 자신의 열등감을 딛고 일어서는 한 남자의 극적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이자 비평가 튀르포와 히치콕의 대담집 <히치콕과의 대화>는 히치콕의 54편 영화 제작 이면의 이야기와 히치콕적 영화의 방법론을 담고 있다. 흔히 히치콕적 영화의 흥미가 서스펜스를 조직하는 영화 형식의 문제로 알려져 온 것처럼 히치콕적 영화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를 조직하는 편집, 촬영, 음향 등 각종 시각적 양식화의 결과이다. 히치콕적인 시선으로 볼 때 우리 영화는 너무나 비영화적이다.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시각적 양식화는 문학적 인과율에 많이 기대어 화면 자체가 진부하고 영화적 긴장이 떨어진다.
이런 문제는 <오아시스>처럼 올해의 최고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오아시스>는 일상 현실을 판타지적 양식화로 재창조해 낸 새로운 멜러 내러티브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존의 시각적 양식화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다. 이처럼 영화적 실험 의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한국 영화가 과연 어떻게 영화로서의 창의력를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적어도 지금 한국영화에 좋은 의미에서 스타일리스트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결코 최신작이라고 해서 호평 받고 예전 작품이라고 해서 무시당하는 상품과는 다르다. 영화가 영화다운 재미와 긴장을 줄 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도를 내포한 시각적 양식화를 거칠 때 가능하다. 같은 이야기라도 히치콕적인 시선을 투과할 때 그 이야기는 긴장을 형성하고 관객을 영화적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히치콕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히치콕은 그의 영화만큼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복잡한 계산을 머리 속에 넣고 다니는 엄밀하지만 기괴한 눈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그 부와 명성만큼 성실하고자 했던 히치콕은 영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성실의 표상처럼 느껴진다. 장선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기점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이 그 종말을 본 한국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히치콕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히치콕은 만약 자신이 영화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다면 학생들에게 무성영화를 만들도록 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무성영화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인데, 엉뚱하게 느껴지는 이 말은 일종의 비꼼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