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5
박병상 지음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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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제를 둘러싼 최근 소식들을 접하면서도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황당한 사건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라엘리언 무브먼트니 하니 유사종교 집단의 황당한 모습까지 덧대어져 인간 복제는 심각한 이슈가 아니라 인간을 가지고 벌이는 하나의 유희 같은 인상마저도 심어 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이전에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채식주의 관련 서적들, 그 외 <가타카>나 <A.I>같은 생명공학의 문제성을 다룬 영화들을 봐 왔지만 읽거나 볼 때 외에는 사실 그 전과 큰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거기에는 유전공학, 생명공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 생명공학이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생명공학에 걸었던 막연한 기대가 말 그대로 막연한 기대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지금보다 조금 느린 삶이 맥락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되었다.

생명공학이 결국 자본의 잉여가치 창출과 과학기술자의 명예와 욕심에 기여하는 비윤리적인 과학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저자는 강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주장은 다소 편협해 보이고 부정적인 면을 침소봉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또 다른 그의 말마따나 사회 전반의 막연한 기대감의 거품을 빼자면 이와 같은 침소봉대는 전략적으로 필요한 전술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이 책 한 권을 통해 새로 정립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릇 좋은 책이란 읽는 이의 경험과 사유에 새로운 지평을 마련해주고, 종합적인 비전을 마련해주는 책일 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앞으로 첨예화될 이슈에 접근할 비판적 시각을 제공해주는 좋은 지침서라 하겠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든가, 그가 들인 공력에 치하의 염을 품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서는 감사와 치하를 아끼지 않고 싶다. 저자가 계속 정진하여 이 분야에서 흔들림 없는 파수꾼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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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지배 동문선 현대신서 67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용숙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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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성 지배라는 테마는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꾸준히 문제 제기되어 온 사회학적 테마이다. 현실 사회의 질서가 남성 중심적으로 재편되어 있다는 명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굳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이제는 진부한 느낌마저 드는 영역에, 남성 사회학자가 개입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부르디외라는 저명한 사회학자의 이런 개입은 그 자신의 진보성을 충분히 신뢰하는 독자 측의 입장으로 봐도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지배 질서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지배 질서 내에 존재하는 입장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숲 한 가운데에서 숲 전체를 조감할 수 없다는 사실, 어느 특정 시대 안에서는 그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사실과도 비슷한 논리다. 그렇게 볼 때 남성 지배라는 테마는 적어도 지배 질서 내의 수혜자(비록 그 정도가 약하겠지만)인 남성이 개입하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한 그 무엇임이 틀림없다.

부르디외는 이 책에서 남성 지배라는 테마를 카빌 사회의 제식(ritual) 전통을 근거로 해서 한 사회의 상징적 질서 내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이 어떻게 상징적 위임을 떠맡으면서 배제되는지를 추적한다. 특히 성별에 따른 노동의 구분과 의미 부여의 전통은 비단 특정 시대의 특정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보편성을 갖는 상징 질서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성별에 따른 위임과 배제의 원칙이 한 사회의 제식 활동을 통해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는 부르디외의 이런 주장은 최소한 그 어느 곳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제사 의식만 보더라도 남성과 여성은 제사 노동에서 명백히 구분되고 있다. 남성은 지방을 쓰고 여성은 음식을 만든다. 그리고 남성은 세살 짜리 손자조차 제사 의식에 참여하지만 여성은 한 집안의 대모라 할지라도 제사 의식에서 명백히 배제된다. 이런 현상은 그 속에서 남성 지배라는 상징적 위임과 배제의 논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재생산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 관해서 페미니즘이 제기해야 할 문제는 제사 노동, 즉 음식 장만이라는 수준에서 제사라는 의식의 상징적 폭력을 인식하며 제사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제사 폐기 주장은 엄청난 반발을 가져올 것이 분명한데, 이것은 어찌 보면 궁극적인 대립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리라.

이처럼 성별 위계를 강화하는 상징적 위임과 재배치는 제식 문화를 통해 완강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언어를 통해서도 강화되고 있다. 특히 '여성적'이라는 형용사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이 말에는 다양한 상징적 폭력이 개입해 들어간다. 여성은 사회 속의 지위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여성적'이라는 형용사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굳이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제식 전통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성 지배의 패러다임은 우리 모두가 경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고용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영역에서의 수치적 평등을 통해서 이뤄질 수는 없다. 수치적 평등은 하나의 전술적인 주장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상징 질서이며, 그것을 떠받치는 상징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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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속의 내 정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247
박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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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전을 벌이는 듯한 현대소설의 세계와는 달리 현대시의 세계는 어떤 원형적 공간을 계속 맴도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시 특유의 그 기동성으로 말미암아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가장 먼저 포착할 수 있는 장르였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제 시는 현대성과의 본격적인 접점을 형성해가며 시대적 실존의 문제를 포착하기에는 너무나 지쳐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시는 그 나름의 방식을 통해 현대성의 문제를 맥락화하지만, 소설과는 달리 현대성의 지표들을 예시하는 시대적 사물보다는 바람, 별, 꽃같은 원형적 사물들을 주로 다룬다. 그래서 흔히 소재라고 지칭되는 것만을 놓고 해당 시의 시대성을 가늠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하루가 멀게 급격히 인식론적 지도를 변화하는 광폭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더 이상 시는 그것과의 고투에 애를 쓰기보다는 시 고유의 영역에서 시적 후광 뿜어내기에 애쓰고 있는 듯하다.

박라연의 시는 그 연륜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작 경력이 그와 맞먹는 시인들에 비해 한층 깊고 절실한 울림을 가져다주는 게 특징이다. 현대를 시인으로 살면서 갖가지 삶의 경험을 거치게 마련인데, 시인은 그것에 경험적 차원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그의 삶은 시적인 구성의 의지로 표백되고 걸러져 깊은 맥락을 제공한다. <공중 속의 내 정원>에 담긴 시들도 시적 세계 그 자체로만 놓고볼 때 여타의 시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그닥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비슷한 삶의 인식에 다가가면서도 그 과정은 사뭇 다르다. 삶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작용을 느끼며 사는 현대인의 의식을 부조하면서 박라연은 단순히 자연의 사물들과의 감정 이입을 통하는 일차원적 방식을 벗어나 사물들을 주체로 세우거나 그 사물들이 마련한 세계에 화자의 의식을 하나의 개체로 끌어들임으로써 전도된 구성틀을 가지고 작업한다. 따라서 시에 대한 전통적 형태가 시적 화자를 강한 주체로 설정하고 외부 대상을 그 주체의 의식이나 욕망을 표백하는 하나의 스크린화한다면, 박라연은 그 자신을 객체를 위한 스크린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박라연의 시는 범상한 시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는 부자연스러움의 세계를 펼쳐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현대인의 영혼의 병이 근본적으로 주체로서 겪는 장애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색다른 방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시에 있어 현대성이나 동시대성은 결코 그 소재적 차원에서 확보될 수 없다. 시는 분명 하나의 원형적 공간이자 무시간적 정지 상태를 창조하는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공간을 창조하는 시적 방법의 새로움, 적절성만이 시의 현대성을 담보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박라연의 시는 천편일률적인 시세계에 작은 틈을 내면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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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한길컬처북스 23
바트 무어-길버트 지음, 이경원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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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비평과 이론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해방을 달성한 국가의 지식인이나 미국의 학계 내 이민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되어왔다. 서구에 의해 타자로 규정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막심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프리카나 카리브해 흑인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서구의 지배적 담론 규칙을 부정하며 서구의 지배 서사의 권력성을 비판하는 탈식민주의 담론은 어느새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하나의 담론 현상으로 정착되었다. 90년대 초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틀로 제기되어온 탈식민주의 담론은 그 지향이나 의도, 그리고 여타 담론과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측면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계급 편향으로 설정되어 온 기존의 담론 구역내에 다양한 규정 인자들이 순식간에 틀입함으로써 새로운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 식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민족주의 편향으로 해석해온 근현대사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학적 관심을 유발했다는 점, 그리고 비단 역사나 문학이라는 제한된 영역이 아니라 학제적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이는 물론 90년대 들어 불기 시작한 근대성 담론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맥락과 연계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을 대중들이 선명하게 포착하기에는 우리의 지식 구조는 매우 지체적이어서 탈식민주의의 정점에 놓인 사이드의 저서를 제외하고는 그 이전의 탈식민주의 비평 담론이나 이후의 스피박이나 바바의 저서들은 원서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물론 이런 사정의 전후에는 흑인의 글쓰기에 대한 편견이나 해체주의 이후 서구 담론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나, 탈식민주의를 유행을 타는 인기있는 고급담론쯤으로 치부하고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이해하려는 현 시점의 풍토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같다. 물론 하나의 유행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극도로 경계해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면 담론의 국적을 따지면서 배척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론의 이점이라면 무엇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을 풀어줄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며, 갈피를 잡지 못한 등산객에게 숲의 지형도를 마련해준다는 점이다. 탈식민주의에 대한 개론서인 이 책은 이런 개론의 가치를 충분히 보증한다는 느낌을 준다. 탈식민주의는 단일한 지향과 방법론을 가진 단일 이론이 아니라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과 지향을 가진 복합적 산물임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읽는 이의 관심사에 따라 향후 더 궁구해볼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번역서답지 않게 우리 말의 어법을 비교적 훌륭히 살려낸 번역이야말로 이 책이 무난히 읽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원저자의 균형감 있고, 때로는 신랄한 비평적 언급도 읽는 이의 감식안을 계발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물론 개론에는 개론 나름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개론을 읽고 만족하는 일은 우습다. 차후 다양한 탈식민주의 관련 서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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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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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세고 파편적인 이미지들과 대립적이고 분열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격렬한 사회학적 상상력의 산물로서 시를 대하던 시대는 이제 멀찍한 곳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역사와 전망이 거세된 시들이 들어앉아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대해 비통해하거나 고뇌하는 사람은 없다. 한때 격류처럼 흘러가던 물이 이제는 드넓은 하류에 도달해 더 이상 굽이칠 일도, 몸을 거침없이 뒤섞으며 아파할 일도 없어졌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참 기이한 일이다. 용량이 정해진 하드디스크를 주기적으로 비우듯이 우리의 하드디스크는 몇 번이나 지워져 이제 데이터복구 프로그램을 돌리지 않으면 그 희미한 기억마저도 가물가물해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사태 앞에 놓인 우리는 이제 거친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좀 더 부드럽고 속으로 가져가며 안으로 깊어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듯하다.

장석남의 시를 읽는다. 정석남의 시를 읽든 그 누구의 시를 읽든 이제 시인의 이름 석자는 해당 시인들의 시적 경향을 변별하는 기호로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정석남이 아닌 그 누구의 시라 할지라도 큰 의미는 없다. 다만 시라는 것을 읽는 행위 그 자체만이 그 외의 행위가 변별성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기나긴 역사를 뒤적거려볼 때 가장 최근 들어 빚어진 특이한 일이다. 다 합쳐봐야 단편소설 한 편 분량밖에 되질 않는 말들을 가지고 세상의 심오한 비의를 드러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지극히 사사로운 경험틀 내에서 시적 주관으로 걸러진 단편화된 세계와의 교섭 상황을 언어로 담아내는데 시의 자리가 할당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는 시로서 받아들여지고, 시인은 관행처럼 가장 사사로운 감각에 언어를 던져버리고, 묻고, 그것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시인의 하드디스크를 채워버릴 때 한 권의 시집으로 청소해버린다. 시인의 분비물은 역설적으로 시인의 양식이 되고, 그 분비물은 그 아닌 타자에게 건네질 때 가장 찬란한 생성의 질료가 된다. 그것이 시인의 시인된 영광이자, 시가 살아가며 또 새로운 시를 잉태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원형적 시의 웅덩이가 깊고 넓을수록 그곳에서는 진액을 고이 간직한 시들이 탄생하며, 때로 다른 웅덩이에서 탄생한 시들과 교접하여 돌연변이 형질을 획득한다.

그러나 시가 근친상간적 금기를 버릴 때 시는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원형질의 웅덩이에서 태어난 시들의 근친교배에 다름 아니다. 장석남의 시든 누구의 시든 그런 욕망을 발견하게 될 때 시는 자멸하는 언어, 죽음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언어가 되고 만다. 이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읽으며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도 이것이다. 그의 시는 부드럽고 여리고 가늘다. 그의 시는 원형의 공간 주변을 맴돈다. 그의 시는 타자와의 교섭을 벗어난 세계에 존재한다. 물론 그의 시에 미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정석남의 세계는 정적이고 식물적이다. 속도와 감각의 시대에 그의 시는 영혼의 치유제 역할을 할 수 있고, 그것의 그의 몫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 감각과의 적절한 접점을 찾지 못할 때 시는 오히려 현실 위에 올려진 한 겹의 또 다른 부담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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