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TORIL MOI / H.S MEDIA(한신문화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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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문학 비평이나 연구가 주로 하는 일은 남성 작가들의 연대기로 구성된 문학사에서 지워진 여성 작가들의 계보를 복원하는 일이 그 하나이고, 남성 작가들이 그려낸 여성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또 다른 하나이다. 편차와 성향이 다양한 작업들을 이 두 가지로 요약하는 건 실제 당사자들에게는 크나큰 폭력이 되겠지만, 기존의 페미니즘 문학 비평이나 연구는 크게 이 두 줄기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연구에 남/녀라는 성차 개념을 도입하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작업이다. 그것은 기존의 문학사를 남성의 주된 작업으로 규정함으로써, 주변화되고 배제된 문학 행위들의 위상을 복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과연 한국문학에서 배제된 여성 작가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쓴 작가가 있느냐, 문학 연구에 주관적이고 정치적 색채가 강한 의심스러운 작업을 하는 것이 문학 연구의 정도인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문학에 과연 성차 개념이 적절하게 위치지어질 수 있느냐 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미해결의 상태로 놓여 있다.

이러한 작업들을 주로 여성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수행해왔고, 남성 비평가나 연구자들마저도 그런 작업을 여성들의 몫으로 돌려버림으로써, 페미니즘 문학은 여성의 정체성 찾기, 권력 관계에서 주변화된 세력의 권력 찾기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그 과정은 엄격한 이론과 남성적 권력 질서 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 연구자들의 불안을 가져온다. '과연 이런 작업이 학문의 객관성이라는 규율에서 벗어나는 건 아닐까, 학문 연구 집단에서 배척되지는 않을까.'

페미니즘 문학 연구는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속으로는 전쟁 같은 격렬한 전장을 형성하고 있다. 여타 분야에 비해 다소 조용한 방식으로 수행되는 이 전쟁은 적과 우군이 구별되지 않은 안개 속의 싸움터이다. 페미니즘을 여권 신장, 여성 해방 등 남성의 권력 질서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여성 권력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의 지적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각종 의혹과 질시의 대상이다. 수많은 경향이나 흐름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동일한 개념 하에서 비판당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그에 대항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개념화는 또 다른 권력화라는 명제가 자기 검열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토릴 모이의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페미니즘 문학 이론으로 통칭할 수 있는 다양한 문학 연구 흐름들을 효율적이고 명료하게 개괄한 책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문학 연구나 비평의 흐름을 한눈에 짚어 내는 데 이만큼 적당한 책도 없을 듯하다. 번역된 지 10년이나 지나도록 그 명성이 지나지 않는 걸 보면 이 책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달리 보면 그만큼 번역이 활발하게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모이가 소개하는 책들 중 과연 몇 권이나 번역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자. 영미 페미니즘 문학 이론 파트에서 소개한 책 중 유일하게 번역된 것은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한 권뿐이다. 일레인 쇼월터, 아드리안 리치, 메어리 엘만은 없다. 그리고 프랑스 페미니즘 파트에서는 보봐르의 <제2의 성>, 이리가라이의 <하나가 아닌 성>, 크리스테바(페미니스트 여부가 논란이 되는)의 <시적 언어의 혁명>, <공포의 권력>이 번역되어 있다. 식수의 책은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고, 이리가라이의 그 유명한 <반사경>도 번역되지 않았다.

일본이 메이지 이후 가장 역점을 들인 근대화 사업의 하나가 국가 번역 기관을 통한 번역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수용의 태도를 차치한다면 번역은 중요한 사업이다. 그런데도 해당 분야를 좀 더 심도 있게 들어가 보려 할 때마다 부딪치는 건 번역의 문제이다. 번역이 안 되어 있거나 엉망이라고 느껴지는 경우. 고작 몇 백만원 받고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정성스럽게 번역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서관도 필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도서관을 채울 책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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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돌림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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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돌림병>은 지젝의 주저로 꼽히는 책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책이다. 그런 탓에 사이버 세계에서의 주체의 문제 등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토픽이 등장한다. 이전의 저서들에서 그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여러 개념들의 정체와 외연적 확장 가능성에 대해 품었던 의문이 조금 더 명료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좀 더 자유롭다고 할까, 지젝은 가능한 자유롭게 개념의 확장을 시도하는 듯하다. 그건 그만큼의 성과 못지 않게 독자로 하여금 곤혹스럽게 만든다. 과연 어떤 개념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하는... 이는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아는 것으로 가정된 주체'로서의 지젝 앞에 놓인 피분석자의 의혹과 마찬가지는 아닐지...

지젝의 다른 책에서도 그렇지만 본장의 뒤에 붙어 있는 보론은 본장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지젝은 철학적인 구심을 보여줄 수 있는 글들을 보론으로 빼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글을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독자와 출판계를 위한, 말하자면 '타협 형성물'인 셈이다. 하나 아렌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깊이있게 심문한 칸트 윤리학과 나치의 상관성 부분을 읽으면서, 그리고 '근본적인 악'과 '악마적인 악'의 대비 부분을 읽으면서, 아니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전체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이런 담론들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환상의 돌림병>의 보론 부분을 읽으면서 이것이 80년대를 살아낸 우리의 기억에 대한 재심문을 위한 좋은 기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며칠 전 모 케이블방송의 80년대 관련 프로를 보면서 마치 그 악몽같은 공기가 내 주변을 꽉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직 국가와 각하를 위한 행동을 지고의 선으로 생각하며 노동자를 무차별 탄압했던 '그들'의 완연하고 선연한 태도...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오역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의 오역 중 핵심은 각 영역의 전문 용어들(영화 제목도 그럴 수 있다면)을 특별한 참조 과정 없이 자의적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제목의 경우, 지젝의 담론 상당수가 영화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영화에 대한 참조를 방해한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를 모르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서 그 영화에 도달하기 쉽지 않다.

번역은 지난한 과정이다. 그리고 특히 지젝의 책이 그 대상인 경우, 기진맥진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적절한 참조 과정 없는 번역은 역자에게는 의도하지 않은 비난과 원 저자를 비롯한 출판 시스템이라는 초자아로부터의 죄의식을 면할 수 없게 한다. (이 중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역자가 '긍정적'이라고 번역한 용어의 관행적 역어는 '실정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원서 대조를 거치지 않은 의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비단 오역뿐만 아니다. 이 책의 이해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통사 구조의 불명확함이다. 용어의 오역은 참조를 통해서 적절히 해결할 수 있지만, 통사 구조상의 혼란은 개념상의 오해와 더불어 이 책을 파국으로 밀어넣는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역자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 문장으로서 모호한 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이것이 라깡의 말이냐 지젝의 말이냐 아니면 지젝이 언급한 xx의 말이냐...)

그러나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독파했다. 최근 지젝의 이름을 걸고 두 권의 저서와 편집서가 번역되었지만, 그것은 지젝 번역사에 있어서는 별 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번역되어야 할 책은 출판계에서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부정태와 체재하기>, <불가분의 잔여>, <이데올로기 지도 그리기>, <불안정한 주체>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이런 책들에 대한 참조가 빠진 지젝은 허황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와 더불어 라깡이 빠진 지젝도 문제가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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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덴탈리즘
샤오메이 천 지음, 정진배 외 옮김 / 강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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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은 서구적 시선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가상이다. 동양은 서양의 탄생과 맞물리는 동시적 사건이지만, 동양의 탄생은 철저히 서구적 기획의 산물이다. 서양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동양을 상정하고, 자신들이 억압하거나 부정한 모든 것들을 동양에 투사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동양 침투로 인해 서구적인 동양관은 새롭게 날조되었으며, 동양의 식민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권력 담론으로 이식함으로써 동양인의 내면을 식민화된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물들여 놓았다. 우리처럼 근대화와 일제에 의한 식민화 과정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 사정은 좀 더 복잡해진다.

일제의 서구적 시선에다 일본적 시선을 중첩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일본은 추구해야 할 서구적 근대화의 목표이자 지양해야 할 또 하나의 동양적 억압자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동양의 근대화 논리 속에는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의 자기 내면화라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자국의 해방을 열망하는 근대주의자의 기획 이면에는 서구적 자기 합리화와 우월감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근대화 추구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담론/이론은 억압적 근대화와 수동적 근대화 과정을 걸어야 했던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라보는 유효한 관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서구에 의해 날조된 동양 이미지를 유포한 오리엔탈리즘은 일방적인 억압/피압, 가해/피해의 논리일까. 적어도 우리에게 오리엔탈리즘은 억압적이고 피해망상적인 논리일 수밖에 없다. 비록 서구 본국의 지배가 아닌 아제국주의 국가 일본에 의한 지배를 받았다고는 하나, 일본 역시 서구와 다를 바 없는 아서구로서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일방적 추종자로서 숨가쁘게 헐떡여 온 지난 시간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독약이 묻은 약, 상한 부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에 넣기 바쁜 처참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하고 취사선택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옥시덴탈리즘> 속의 중국은 어떠한가.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우리의 완전한 식민화 이상으로 중국에는 엄청난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서양적 권력을 일방적으로 추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서양의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오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마련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옥시덴탈리즘의 과정 중 상당수가 문화혁명기 이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그 오독의 역사가 20세기초부터 비롯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이런 현상이 문화혁명 이후의 서구화 과정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닌 듯하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항적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이다. 지배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저항적 타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양의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오독하여 이를 실행의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 저항적 옥시덴탈리즘의 개념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근대화 초기 수많은 지식인들이 서양을 탈봉건의 무기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서양적 시선에 깊이 침윤된 오리엔탈리즘의 무비판적 수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다.

어떻게 보면 역사라는 것 역시 저자의 관점과 관심에 따른 허구적인 서사라고 할 수도 있다. 역사는 저자가 자료더미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 구성한 서사이다. 따라서 주체에 따라서 역사는 무한히 다양한 이야기로 흝어질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저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오리엔탈리즘이나 관변 옥시덴탈리즘의 역사 속에서 저항적 주체성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관심과 욕망이 아니라면 이런 책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우리의 역사마저 다시 쓰도록 상상력과 관심을 발동시키는 놀라운 관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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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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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그가 등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어느 계간지에 실린 단편 하나를 읽었고, 장편으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곳에서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수군수군한다는 것, 그리고 tv에서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극화한 프로그램을 한 편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라디오 프로를 진행할 정도로 말재주가 꽤 있는 사내라는 것, 이런 것 등등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거나 체험한 모든 것이다. 여기에다 단편 <호출> 이후로 <포스트잇>이라는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기해 두어야 하겠다.

연배로 따질 때 그는 80년대 세대에 가깝다. 그런데 글을 읽어보면 이 사내는 90년대 중반 이후까지를 자신 속으로 포섭하는 감각을 지닌 특이한 사람이다. 감각이란 지식처럼 배워서 체득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자기 몸에 맞지 않으면 몸밖으로 튕겨 끝내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까지 내쳐 버리는 인간의 이상한 능력이다. 김영하는 자신의 감각과 맞지 않는 세대를 지나 갈수록 자신과 화합되는 그런 시대를 사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건 분명히 부러운 일이다. 나는 그보다 분명 후세대이지만 김영하에 비해 세상과 부딪치는 면이 적은 것은 분명하다.

물론 작가에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세상을 깊은 안목으로 보든가 아니면 오지랖 넓은 체험을 가졌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같은 것을 보되 남들과 다른 독특한 관점으로 보고 그 기발한 착상을 글로 풀어낸다든가. 그렇게 볼 때 김영하는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듯하다. 그는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하찮은 물건들에서 미묘한 상상력을 끌어내어 독자들을 도발하고 선동한다(야쿠르트나 말표구두약) 난 고뇌에 찬 지성의 거대 담론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새롭고 깊은 의미를 끌어내는 사유가 마음에 든다. 더더군다나 그가 작가라면 말이다.(거대 담론은 철학자나 사상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김영하는 재주꾼임에 분명하다.

<포스트잇>은 지하철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읽은 책이다. 제목처럼 내용도 경쾌하고 날렵하다. 그리고 지하철 정거장 숫자에 맞춰 읽기에 제격이다.(3정거장 당 한 편!) 이 책을 통해 나는 그가 작가로서 가진 문학에 대한 애정, 그의 사생활, 일상에 대한 감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그의 심층들에 대해서 조금 엿본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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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회고록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 / 강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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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지성계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아울러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한 학자임이 분명하다. 이후 등장한 푸코, 데리다, 라캉, 바르트 등 구조주의의 효시로 알려진 레비스트로스는 정작 구조주의라고 통칭되는 사상의 흐름에 자신이 계보학적 선구자로서 대중에게 알려지는 일에 대해서 대단히 불쾌한 감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야콥슨, 방브니스트와 같은 언어학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구조주의자라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도 레비스트로스와 이후 일군의 사상가들 사이의 친연성이 별반 없어 보인다. 일평생을 친족과 신화 연구에 바친 이 유태계 민족학자의 사상에 다가가기란 무척 낯선 일이다. 우리에게는 구조주의 사상의 근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교재로, 아니면 문화상대주의의 교리를 재확인하는 교재로서만 그는 존재한다.

그의 주저 <슬픈 열대>는 과학적 체계를 가진 글이 아니다. 그런 탓에 이 책은 학문의 과학성에서 멀찍이 벗어난 기행문쯤으로 소개되고 읽힌다. 그러나 책장을 펴 들고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제목의 이국적 감수성과는 동떨어진 민족학적 언술 구조에 사람들은 가슴이 막히는 듯한 답답증을 느끼며 책장을 덮는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는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세밀한 기억력을 가진 한 학자의 학문적 인생과 사상을 대담이라는 엿듣기 형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대담집이라는 형식은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서구에서는 흔한 출판 형식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낯설고 그만큼 매력적인 출판 형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이런 형식의 책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뭔가를 술회하고 종합할 가치가 있는 학문적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탓은 아닐까. 그만큼 우리의 학문 역사는 짧고 학자 개인의 이력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대학 교수도 정년을 마치면 학문 인생을 접고 유유자적한 노후를 즐기는 것을 일종의 멋으로 여기는 풍토는 학문이 단순한 직업 이상의 열정으로 확대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 아닐까.

그런 풍토에서 바라본 레비스트로스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책을 쓰며 학문적 인생을 지속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 성과나 개인적 이념이나 사상과 무관하게 이처럼 거대한 지적 열정을 발휘하며 한 나라의 학문 풍토를 조성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적 측면에서 볼 때 방법과 사상을 엄밀히 구분하며 마르크스를 읽은 처세술 밝은 인간이었고, 어떻게 보면 학자로서는 지나치게 생활력이 강하고 변화에 무딘 인간이었으나,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제외하고 순수한 학자로서 그를 바라볼 때 그는 감히 그 누구도 그 경지를 넘보지 못할 순수한 지적 열정을 가진 프로메테우스적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대담집은 난해한 사상가의 지적 사유 과정을 대담이라는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간혹 신문 지문에 저명한 학자와의 대담이 실리는 경우가 있으나, 신문 지면이라는 제약 때문에 단순한 질문과 압축적인 답변이 오가기 마련이다. 비록 신문과 비교할 것이 못되지만 이 대담집은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여타의 대담집 이상의 내용을 갖추고 있다. 훌륭한 대담의 비결은 진행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다. 진행자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대담이 성공할 리는 없다. 이 대담의 진행자 에리봉 디디에는 치밀한 준비를 통해 잊혀진 기억들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대담자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사실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일방적으로 떠받들기 위한 대담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대담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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