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
배식한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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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터넷을 접할 때 당황스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중 제일 신기하고도 묘한 것 중 하나가 하이퍼텍스트라는 것이었다. 마우스를 가져다 대면 파란색으로 변하면서 마우스 모양도 변하면서, 클릭 하면 지금까지 보던 화면과는 다른 화면이 열리던 그 순간, 마치 지금까지와는 전혀 딴 세상으로의 이동을 경험하는 듯 했다. 그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기술적인 이해를 갖추지 못한 채 마냥 신기해하기만 했다. 검퓨터 모니터를 통해 글을 읽는다는 것조차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 한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로의 순차적 이동 방식의 글읽기 관습에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 화면 자체의 변화와 함께 전혀 다른 글로 빠져들고 이전 글로 제대로 귀환하지도 못하던 그 어리벙벙함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분명 그 순간은 하나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 기술적인 베이스에 대한 공부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이와 같은 거대한 혁명이 가능하게 된 역사와 배경,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사람들의 노고와 고투에 대해 한번쯤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로 대변되는 거대한 혁명이 현재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혁명이 우리의 인식론적 기반과 책으로 대변되는 지식 문화의 창조와 수용, 그리고 이해에 있어서 어떤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그 방향성을 한번쯤 검토해 보는 일도 그리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도로 접근하기에 가장 좋은 심플한 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하이퍼텍스트의 원리, 기능,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1장은 다소 지루한 감이 들지만, 하이퍼텍스트의 역사와 인터넷 초심자를 괴롭히는 각종 용어들(프로토콜, ,tcp/ip, dns)의 기원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는 장부터 책은 다소 흥미를 더해 가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 책의 종말론을 걸개로 놓고 펼치는 3장은 더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도로서 컴퓨터에 많은 관심을 쏟아온 사람이다. 철학도로서의 선입견에서 보면 한참 외도를 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런 시도는 낯선 것들간의 경계 허물기가 하나의 숙제처럼 되어 가는 요즘 추세에서라면 더욱 환영받을 만하고, 추동해야 할 경향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하이퍼텍스트가 아무리 흥세한다 하더라도 책의 종말은 불가능하다. 불가능으로서의 책의 종말을 사유하기, 그것은 실정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의 지평으로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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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과의 대화 한나래 시네마 3
프랑수아 트뤼포 지음, 곽한주 외 옮김 / 한나래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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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출생의 불세출의 영화인 두 명을 기억하시는가? 작달막한 키에 콧수염을 기르고 풍덩한 연미복에 지팡이를 들고 도시를 방황하며 고독과 애환과 웃음을 선사했던 찰리 채플린이 그 한 사람이다.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굴까? 평생 채플린의 공과와 영예를 은밀히 부러워했고 육중한 몸매에 열등감을 느꼈고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롭지만 자신은 경찰에 연행되어 그 세상과 격리되는 끔찍한 공포를 안고 산 사람, 그가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채플린과 히치콕, 두 사람은 만약 영화가 아니었다면 너무 작거나 너무 뚱뚱한 그 몸으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해서 그들에게 영화적 재능을 선사했고, 그 후광 아래서 가장 멋있는 남자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히치콕의 영화란 알고 보면 자신의 열등감을 딛고 일어서는 한 남자의 극적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이자 비평가 튀르포와 히치콕의 대담집 <히치콕과의 대화>는 히치콕의 54편 영화 제작 이면의 이야기와 히치콕적 영화의 방법론을 담고 있다. 흔히 히치콕적 영화의 흥미가 서스펜스를 조직하는 영화 형식의 문제로 알려져 온 것처럼 히치콕적 영화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를 조직하는 편집, 촬영, 음향 등 각종 시각적 양식화의 결과이다. 히치콕적인 시선으로 볼 때 우리 영화는 너무나 비영화적이다.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시각적 양식화는 문학적 인과율에 많이 기대어 화면 자체가 진부하고 영화적 긴장이 떨어진다.

이런 문제는 <오아시스>처럼 올해의 최고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오아시스>는 일상 현실을 판타지적 양식화로 재창조해 낸 새로운 멜러 내러티브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존의 시각적 양식화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다. 이처럼 영화적 실험 의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한국 영화가 과연 어떻게 영화로서의 창의력를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적어도 지금 한국영화에 좋은 의미에서 스타일리스트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결코 최신작이라고 해서 호평 받고 예전 작품이라고 해서 무시당하는 상품과는 다르다. 영화가 영화다운 재미와 긴장을 줄 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도를 내포한 시각적 양식화를 거칠 때 가능하다. 같은 이야기라도 히치콕적인 시선을 투과할 때 그 이야기는 긴장을 형성하고 관객을 영화적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히치콕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히치콕은 그의 영화만큼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복잡한 계산을 머리 속에 넣고 다니는 엄밀하지만 기괴한 눈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그 부와 명성만큼 성실하고자 했던 히치콕은 영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성실의 표상처럼 느껴진다. 장선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기점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이 그 종말을 본 한국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히치콕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히치콕은 만약 자신이 영화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다면 학생들에게 무성영화를 만들도록 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무성영화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인데, 엉뚱하게 느껴지는 이 말은 일종의 비꼼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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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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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에서 두 인물들 앞에 놓여져 있는 일그러진 형상과 관련이 있다. 그 형상은 정면에서 보면 화가가 잘못해서 찍어놓은 일종의 오점처럼 보이지만 사각지대에서 보면 해골 형상을 하고 있다. 이로써 지젝이 의도한 바는 그 해골이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왜상이라는 것이고, 그 이데올로기의 응시를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삐딱하게 보기라는 것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은 불가능한 실재를 중심으로 구성된 일종의 환상 구성물로서 현실의 비일관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지만 예의 그림의 해골처럼 그 균열을 두드러지게 하는 실재의 응답으로 대상 소문자 a가 현실에 틈입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론을 바탕으로 지젝은 영화와 소설에서 실재의 침입을 보여주는 예를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모더니즘 소설가 카프카, 그리고 좀 덜 알려진 SF, 미스테리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루스 랜덜, 그리고 위대한 영화 작가로 칭송받는 히치콕을 비롯한 친숙한 영화들을 통해 그가 풀어내는 담론들은 그동안 난해하기만 여겨지던 라깡의 논의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라깡을 전유한 지젝의 논의가 일종의 고급 지적 유희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동안 우리에게 불가사의하게만 여겨졌던, 흔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고 지칭해온 것들이 우리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해왔고, 어쩌면 지젝에 와서야 그 정체가 명료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적 담론이라고 하면 딱딱한 형식으로 서구 이론가들의 담론에 대한 메타적 주석 달기 식으로 흘려왔던 저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대중문화에서 친숙한 예를 통해 난해한 문제의식을 풀어내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지젝의 글쓰기 방식은 우리의 지적 풍토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리라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지젝의 책으로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번역이 깔끔하다는 것이다. 정작 번역할 때는 말못할 고통을 겪어 놓고 정작 그 결과는 형편없는 경우도 종종 있는 학술 번역에 있어 이 책만큼 번역이 깔끔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치 국내 저자의 책인 것처럼 술술 읽히는 것은 순전히 번역자의 역량과 노고 탓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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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슬라보이 지젝 엮음, 김소연 옮김 / 새물결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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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사 중 주목할 만한 영화 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알프레드 히치콕을 그 맨 윗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총화된 하나의 성좌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가 그 자체의 매력으로 우리를 압도해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매체, 즉, TV 드라마, 소설, 뮤직비디오, 연극, 공연 등을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독보적인 영역, 그 득의의 지점은 어디일까? 특히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라깡을 경유한 히치콕 읽기와 히치콕을 경유한 라깡 읽기라는 이중적이면서도 아주 매력적인 착상에 비할 때 이 책은 우리 주변에 널리 퍼진 영화 읽기의 경험과는 무척 다른 지적 배경을 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하는 관심사에 따라 그에 걸맞는 지적 배경을 갖출 필요가 있다. 라깡이 목적이라면 히치콕 영화를 최소한 5편 정도는 봐 둬야 할 것이고 히치콕이 목적이라면 최소한 라깡 개론서쯤은 읽어 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처음부터 깨끗이 읽기를 포기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내 경우 라깡과 히치콕 둘 다 관심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은 적잖이 행복하고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특히 책의 첫 부분을 장식하는 편집자 지젝의 글은 한동안 이 책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힘들게 봐 나가자 다른 필자들의 글은 한층 쉽게 다가왔다. 물론 쉽다는 건 표준적인 글이었기에 코드 조합이 용이했다는 것일 뿐 그 외 다른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대중 문화가 대체로 비주얼 텍스트 위주로 구성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응시(gaze)의 문제를 주체와 욕망을 얽어내는 키워드로 삼을 수 있게 하는 지젝의 히치콕을 경유한 라깡 읽기는 그 문화이론적 활용 가능성이 풍요로워 보인다는 측면에서 요즘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깡의 주장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는 생소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서양 학문의 지적 성과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적 후진성과 조급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라깡적 표현을 전유하자면 주체에 빗금 치기를 용납하지 않는, 즉 무의식을 압살함으로써 주체의 위치에 설 것을 강요해 온 이 땅의 정치적 무의식의 귀결처럼 보인다.

한국 문학에서 이상의 자리가 명확히 하나의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가 뚜렷하지 않은 오점처럼 존재하듯, 상징적 질서로 통합할 수 없는 균열과 공백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호명하려는 라깡의 기획은 이 땅에서는 오점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그 낯섦, 생소함을 용감히 무릅쓸 필요가 있는 것은 라깡이 열어 놓는 세계가 프랑스의 지적 사기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진실에 다가가는 인식론적 혜안으로의 길을 제시하는 하나의 길(way)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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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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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문학적 체험의 원형질로 돌아가는 언덕길처럼 다가온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고 뒤돌아 보기도 뭔가 어색한 그런 시간의 저편들이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외상들의 흔적들 속에서 나는 그 시간들의 아리고도 간지러운 기억들을 다시 만난다. 그 기억들 속에서 익숙한 이미지와 말들이 다시 내 의식 속으로 기어들어 오지만 이제 더 이상 격렬한 흥분이나 그에 부수되는 죄의식, 공포, 두려움은 없이 다만 알 듯 말 듯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회한이랄까 그런 해묵은 통증만이 전해져 온다.

그의 첫 작품집 <객지>들의 작품들 예를 들면 표제작 <객지>, 그리고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등을 숨가쁘게 읽어 내려가며 문학이 이 닫힌 사회에서 얼마나 큰 감동으로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제치던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객지>와 비슷하게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백무산의 <동트는 미포만을 새벽을 딛고>같은 시집들, 김영현의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그리고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 김한수의 소설들이 내 의식에 새겨 놓은 깊은 상처를 기억한다. 싸움으로 전이된 그 힘들이 소진되고 나비가 된 뒤 남겨진 누에고치처럼 남겨졌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내 의식 속에 생생히 살아 움직일 것이다.

80년부터 시작된 계몽과 신화의 역사는 이제 황석영이 <오래된 정원>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정리가 된 것같다. 황석영 이전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더 이상 이런 류의 작품은 쓰여지지도, 쓰여질 수도 없을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간 허영과 욕망의 상징처럼 이리 저리 휘둘린 문학장에서 돌아온 수인 황석영이 여전히 한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치 성난 사람처럼 그곳에서 매몰차게 돌아선 나에게 위안이 된다. 물론 황석영은 그가 거쳐온 지난 시간들을 부질없는 미망으로 사로잡고 시대착오적인 계몽의 깃발을 다시 올리려 하지 않는다. 이제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계몽의 깃발을 꽂을 만한 곳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트로츠뎀!)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듯한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나직이 되뇌고 있을 뿐이다.

그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우리 역시 그 역사의 시간들을 외상처럼 간직하며 살고 있다. 우리들은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미아처럼 묵직이 간직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듯 오늘의 안락과 평화만을 간구하며 일상의 깊은 수렁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 무엇이 그 무엇일 수 있고 그 무엇이 그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알고자 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이 심연의 허무 속에서 그 무엇이 희망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이 10여 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이런 혼돈 그 자체는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외면하거나 섣부른 대답으로 희망을 갈음하고자 하지 않는 그 정직함이 아직 미약하기는 하나마 우리에겐 희망의 작은 씨앗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황석영에게 지금-여기는 낯설다. 그래서 그는 지금-여기를 건너뛰고, 오래된 정원이 존재하는 갈매와 그 갈매의 기억을 붙안고 생존의 고투를 벌인 감옥과 이념의 붕괴와 새로운 혼돈을 보게 되는 독일과 러시아를 에두르고 있다. 그에게 2000년을 경과한 지금-여기의 모습은 아직 낯설고 그는 조심스럽다. 아직까지 황석영의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건 그에게 있어 지금이 단식 이후 찾아오는 복식의 시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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