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슬라보이 지젝 엮음, 김소연 옮김 / 새물결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영화 역사 중 주목할 만한 영화 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알프레드 히치콕을 그 맨 윗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총화된 하나의 성좌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가 그 자체의 매력으로 우리를 압도해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매체, 즉, TV 드라마, 소설, 뮤직비디오, 연극, 공연 등을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독보적인 영역, 그 득의의 지점은 어디일까? 특히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라깡을 경유한 히치콕 읽기와 히치콕을 경유한 라깡 읽기라는 이중적이면서도 아주 매력적인 착상에 비할 때 이 책은 우리 주변에 널리 퍼진 영화 읽기의 경험과는 무척 다른 지적 배경을 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하는 관심사에 따라 그에 걸맞는 지적 배경을 갖출 필요가 있다. 라깡이 목적이라면 히치콕 영화를 최소한 5편 정도는 봐 둬야 할 것이고 히치콕이 목적이라면 최소한 라깡 개론서쯤은 읽어 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처음부터 깨끗이 읽기를 포기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내 경우 라깡과 히치콕 둘 다 관심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은 적잖이 행복하고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특히 책의 첫 부분을 장식하는 편집자 지젝의 글은 한동안 이 책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힘들게 봐 나가자 다른 필자들의 글은 한층 쉽게 다가왔다. 물론 쉽다는 건 표준적인 글이었기에 코드 조합이 용이했다는 것일 뿐 그 외 다른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대중 문화가 대체로 비주얼 텍스트 위주로 구성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응시(gaze)의 문제를 주체와 욕망을 얽어내는 키워드로 삼을 수 있게 하는 지젝의 히치콕을 경유한 라깡 읽기는 그 문화이론적 활용 가능성이 풍요로워 보인다는 측면에서 요즘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깡의 주장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는 생소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서양 학문의 지적 성과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적 후진성과 조급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라깡적 표현을 전유하자면 주체에 빗금 치기를 용납하지 않는, 즉 무의식을 압살함으로써 주체의 위치에 설 것을 강요해 온 이 땅의 정치적 무의식의 귀결처럼 보인다.

한국 문학에서 이상의 자리가 명확히 하나의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가 뚜렷하지 않은 오점처럼 존재하듯, 상징적 질서로 통합할 수 없는 균열과 공백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호명하려는 라깡의 기획은 이 땅에서는 오점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그 낯섦, 생소함을 용감히 무릅쓸 필요가 있는 것은 라깡이 열어 놓는 세계가 프랑스의 지적 사기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진실에 다가가는 인식론적 혜안으로의 길을 제시하는 하나의 길(way)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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