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런던 태생 극작가 해롤드 핀터가 금년치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대한 영국 언론, 문단, 연극계의 반응은 환영 일색이다. “꼭 받아야 할 사람,” “탁월한 선택,” “너무도 적절하고 훌륭한 결정” 등등의 기사와 논평으로 신문들은 이구동성 핀터의 업적과 노벨위원회의 결정을 칭찬한다. 칭찬의 요지는 스웨덴 한림원 노벨위원회가 이번에는 “제대로 찍었다”는 것이다. <가디언> 신문의 한 논평자는 “늘 엉뚱한 작가에게 잘못 상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노벨위원회가 이제 그 빼어난 명성 덕에 구출받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핀터가 수상 통보를 받고 있던 지난 13일 낮 12시, 영국의 한 방송이 “극작가 해롤드 핀터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가 잠시 뒤에 “아이구 아니네요, 노벨상을 받았답니다”로 수정하는 촌극도 벌어진다. 그 며칠 전 75살의 핀터가 더블린 방문길에 넘어져 입원한 일이 있는데 방송이 잘못 알고 오보를 낸 것이다. 즐거운 날에는 오보도 유쾌하고 반응도 유쾌하다. 핀터 왈, “덕분에 난 죽었다 살아났지 뭐야.”
나는 지금 노벨문학상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해롤드 핀터가 유쾌한 오보로 죽었다 살아나 유쾌한 농담을 던지고 있을 시간,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어떤 일 때문에 사람들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북두칠성에 고하려는 게 내 관심사다. 한 대학 교수가 썼다는 몇몇 칼럼의 내용을 놓고 온 동네 시끄럽게 벌어진 실랑이가 그것이다. 이른바 ‘강정구 사건’이라 불리는 그 실랑이의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어서 여기 재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록을 위해 강 교수 고발자와 비판자들의 주요 주장을 적자면 대개 이러하다. 강 교수의 글은 ‘김일성과 북한을 고무찬양’하면서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미국을 ‘주적’으로, 맥아더를 ‘원수’로 규정한 명백하고도 용인할 수 없는 반국가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강 교수는 ‘마땅히 구속수사 해야 할 공안사범’이고 ‘현행범’이다. 그런데 그 현행범을 잡아넣어 수사하겠다는 검찰에 대고 법무장관이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것은 또 뭐냐, 검찰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북한을 찬양 추종하는 세력들을 용인하자는 거냐, 그런 장관은 당장 해임해서 집으로 보내야 할 것 아니냐?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애국심과 충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애국심은 북두칠성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천지개벽 이후 지금까지 일곱 개의 반짝이는 눈으로 이 지상에 일어난 모든 일과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지켜보아온 북두칠성 아닌가. 그러니까 이럴 땐 그 북두칠성에 자초지종을 고하고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다. “칠성님, 강 교수가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했다고들 하는데, 잡아넣어야 합니까?” 북두칠성이 눈을 깜박이다가 대답한다. “설혹 부정했다고 해도 다 수갑을 채우는 건 아니지, 이 미련한 친구야.” “어째 그렇습니까?” “몰라서 물어? 삼신할미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걸 낳았을 때부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지 않았느냐?” “자유민주주의는 삼신할미가 준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인간들끼리의 약속인뎁쇼?” “인간들끼리 약속한 것이 곧 하늘과 약속한 것이니라.” “자유민주주의라 해도 체제를 부정하는 자유까지 허용하는 건 아니라는데요?” “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자도 관용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그게 그 체제의 짐이고 영광 아니더냐? 그 짐을 질 자신이 없거든 일찌감치 걷어치워라. 너희가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 안달이냐?”
칠성의 이 대답은 충격적이다.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인데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죠, 칠성님.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려다 보니까….” “자유민주주의의 알맹이를 빼고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너희들의 특징이야. 너희가 전부터 헛껍데기 쭉정이만 쥐고 놀더니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렸구나.” “아닙니다. 쭉정이는 싫고 삼팔광땡이 좋습니다요.” “삼팔광땡을 쥐려거든 남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하는지 보고 좀 배워라.” “체제가 위협당해도 가만있어야 합니까? 그게 삼팔광땡인가요?” “아니지. 위협 당하면 맞서고 막아내야지.” “그러면 강 교수를 잡아넣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강정구가 체제를 위협할만한 조직과 수단을 가지고 있더냐?” “가족이 있지요. 펜도 쥐고 있고.” “가족만 데리고 체제 엎는 놈 봤냐? 펜이 힘을 갖는 건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움직일 때야. 강정구 펜이 그렇게 세냐? 그가 폭력꾼이냐? 내 보기론 그 친구, 파리 한 마리도 제 손으로는 못 때려잡을 위인 같던데?”
파리 한 마리도 제 손으로 못 때려잡아? 들어본 소리 같다. 영국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에 나오는 토비 아저씨, 그렇다. 그가 그런 위인이다. “아이구 칠성님, 그건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죠. 강 교수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인물입니다.” “한국이 인권국가로 올라서는 건 돈 몇 푼 더 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야. 너희 나라 인권위원회가 애는 많이 쓰더라만, 너희가 인권국가로 존경받자면 아직 한참 멀었어. 그런데 이 판에 백면서생 하나 잡아넣어 동네 망신 하고 싶은 거냐? 아까 자네 해롤드 핀터 얘길 하는 것 같던데 그 핀터가 누구냐? 자네도 영국 사정 좀 알 것 아닌가.”
핀터가 누구냐고? 스물아홉 편의 희곡을 쓰고 또 그만큼의 영화대본을 쓴 사람, 상 받았다고 온 영국이 축포 터뜨리고 ‘아주 아주 영국적인 작가’라며 영국 신문들이 떠들어대는 사람, 그가 핀터다. 그런데 그 핀터는 격렬한 반미주의자, 영국비판자, 전쟁 혐오자, 조지 부시를 ‘인간 백정’ ‘대량살인광’이라 부르고 자기 나라 수상 토니 블레어에게 ‘얼빠진 백치’라는 칭호를 준 사람이다. 우리라면 골백번도 더 감방에 처넣었을 그 핀터를 ‘아주 아주 영국적인 작가’라며 추어주고 존경하는 것이 영국이다. 영국인들은 아무래도 제 정신 아님이 틀림없다. 그 핀터를 두고 “인권을 위해 싸워온 사람” “억압의 닫힌 문을 박차고 들어간 사람”이라며 상을 준 노벨위원회도 제 정신 아님이 틀림없다. 그 핀터가 “미국의 히스테리, 무지, 오만, 우둔성, 호전성”을 노상 비판했다고 보도한 미국 신문 <뉴욕타임스>도 정신나간 신문임에 틀림없다. 이런 것이 자유민주주의고 그 체제의 활인지계(活人之計)다. 무엇이 나라 망치고 사람 숨통 조여 창조의 힘을 고갈시키는지, 우리나라 애국자들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