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아

방금 너와 통화했다. 엽서 버린 거 얘기하고 나니까 쓰고 싶다.

덕분에 시골밤이란 낙서가 새끼를 쳤는데 여기 적을 수 있겠다.


= 시골밤 1 (시골 온 첫째 날 밤) =

폭풍을 기다리는 하늘이 별을 감추고

눈을 뜬 것인지 모를

어둠 속에 앉은

풀벌레 소리


= 시골밤 2 (두번째 날 밤) =

어둠을 한 국자씩 떠낸 자리에

가만히 앉은 빛

땅의 별, 하늘의 별

어둠을 제외하곤 온통 별


나무마냥

팔을 환히 벌렸더니

확 안겨드는

바람


짙은 고요가 풀벌레를 깨운다.


=시골밤 3 (역시 두 번째 날) =

이 낡은 다리에서 그와 손잡고

듣고픈

황토빛 강물소리



= 아기와의 대화 - 바람 =

바람이 세게도 분다. 그치?

말똥말똥, 두리번 두리번

아니, 바람은 안보여

저 감나무 봐

막 흔들리고 감이 떨어지구 그러지.

바람이 그러는거야

말똥말똥, 두리번 두리번

아이, 참.

바람은 안보인데니까.


미연아, 편지란 때론 참 편한 것 같다.

만약에 이런 낙서들을 너한테 들려주겠다고 하면 아마도 네가 싫다고 했겠지?

시골에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해가 뜨면 사람도 눈을 뜬다. 난 6시면 일어나는데 그땐 이미 외삼촌은 밭에 가고 안 계신다.

저녁 7시 까지 냇가에서 놀다가 8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지. 그때가 어두워지는 때니까.

동례리 외갓집엔 늦게까지 구판장을 여는데 (구판장 알지? 마을 공동 가게로 개인 소유가 아니지) 병산에선 가게 있는 사람 식사하러 가면 문을 닫는다. 일정한 시간도 없이 그 사람이 배고프면 구판장 문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왜 얘기 하냐 하면 방금 모기향 사러 구판장 갔다가 허탕치고 왔거든.

여기저기의 벌레와 모기들에게 내 몸을 공양한 덕택에 가렵다.

그 공양한 부분을 바꿀 생각은 없는데 내 배는 거의 지속적으로 포화상태다. 아마 올 여름들어 제일 많이 먹어 대고 있는 때일 거다. 밥, 수박, 옥수수, 밥, 토마토, 옥수수...

으아, 배 부르다. 지금도 그득한 배를 하늘로 향하게 비스듬이 누워 끄적거리고 있다.

너무 열심히 논 조카 둘이 내 옆에서 자고 있고 마루에선 아버지와 형부, 언니, 사촌이 수박을 먹으며 (또 먹는다. 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넌 지금 뭐하고 있는지 통화할 때 물어 볼 걸 그랬다. 궁금하군 피곤해서 졸고 있었을까?

내일 ‘사람들’에 갈게. 동례리 친구집에서 따온 꽃사과 갖다 줄게. 참 귀여운 과일인데 난 시큼해서 못 먹겠더라. 예뻐서 갖구 왔는데 비닐에 넣어 둬서 좀 시들었을거다.

내일 보자. 차 한 잔 사줘.

카마 내일 보재이.


1994.8.2.화. 거창 가조 병산서

tjsgml (,,,꽃잎 다섯,,,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왈로 2005-10-3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 뽈록하게 나와 있을 니 모습 상상이 되지? 읽는 나도 즐거워지는 편지였어.

이누아 2005-10-3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내 글에 추천 눌렀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아버지와 언니 친구들과 고향에 간 적이 있었다니...94년에! 편지도 낯설다. 지금 보니 글도 이쁘다. 저거 내가 쓴 거 맞나? 큰나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어둠을 떠낸 자리에 별을 놓아두듯 어둔 내 기억에 별을 수놓는구나. 나도 즐거워지네. 내 서재에 가져가서 두고두고 볼란다. 니 이름 있어도 괜찮지?

이누아 2005-10-3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낙서들을 너한테 들려주겠다고 하면 아마도 네가 싫다고 했겠지? "
하하하, 저 말은 맞다. 저런 내용으로 너와 대화 했더라면 저 당시의 너는 아마 확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을 게다. 이젠 나이가 좀 들었나 보다.^^

왈로 2005-10-3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네가 기대 이상을 보이니 탄력이 붙는데. 내일이나 모레 쯤 한판 더 올리꾸마. 근데 네 기억력 정말 놀라웠는데 이젠 '빠이빠이'냐? 내 못난 모습들도 빠이빠이 해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