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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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낯선 무덤들 사이에서 그들의 주검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녀가 즐겨 공원묘지를 찾았던 이유는 이곳에서는 모두가 동등했기 때문이었다. 힘 있는 자나 약한자나, 가난한 자나 부자나, 사랑받는 자나 무시당하는 자나, 성공을 거둔 자나 실패한 자나, 그 사실은 영묘나 천사상이나 거대한 비석도 바꾸지 못했다. 모두 다 똑같이 죽었을 뿐이며 아무도 더 위대해질 수도 없고 위대해지려고하지도 않았다. 너무 위대하다는 것은 전혀 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명예의 공원묘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명예의 공원묘지는 너무 크고 과도한 명예치레야. 사실은 모두가 함께 누워 있어야해, 유대인이든, 농부든, 베르크프리트호프에 묻혀 있는사람들까지도."
그들은 함께 누워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음에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동등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어야 했다. 차별과 선호, 분리로 얼룩졌던 삶이 끝나고 죽음이 모두를 똑같이 만들어주는 엄청난 것이라고 해서 죽음이 그 경악스러운 성격을 잃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한 삶이 계속될 때 죽음은 그 경악스러운 성격을 잃는다.
나는 그렇게 살았던 영혼들이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 속으로 방랑하는 건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영혼의 방랑에 대한 생각은 인간에게서 죽음에 대한공포를 덜어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평등의 진리에 대해 이해한 뒤라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농부의 공원묘지에 있는 큰 참나무 밑 벤치에 앉아 그것을 내게 설명했다. 그러더니 웃었다. "나는 평등에 대해 말하는 거야. 내가 네게 말을 놓는 것처럼 너도 내게 말을 놓아야 해. 그리고 올가라고 불러."

그녀는 눈을 떴다. 눈길이 잠시 무언가를 찾다가 나를 발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사랑으로, 기쁨으로 빛났다.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고내가 온 것을 그토록 기뻐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나 때문에 그렇게 기뻐한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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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간힘
유병록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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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책을 읽다가 눈물을 참느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이제 작가님은 슬픔을 덮어두고 (자주 꺼내어 보시긴 하지만) 옆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앞을 향해 안간힘을 쓰며 살고 계신듯 하여 다행입니다. 저도 힘을 좀 더 내보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위로가 멀리서 내게 다가오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그것이 다가와야 한다고 믿었나보다. 내 아픔이크니까, 나는 여기 주저앉아 있으니까, 여기서 울고있으니까, 위로가 알아서 나를 찾아 곁으로 와주길기다리고 있었나보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괜찮아진척하며 속으로는 누가 나를 일으켜주길 바라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 을 보며, 어쩌면 위로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일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위로에게 다가가고 내가 위로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은 내가 슬픈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지기를, 그래서 준비해둔 위로를 건넬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났다.
새삼 깨닫지만 위대한 예술은 나 같은 어쭙잖은이가의 편견을 가볍게 부서뜨리면서도, 따뜻하게 감싸 안을 만큼 품이 넓다.
위로가 필요하다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으러 가야 한다. 위로가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위로는 주변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수도 있고, 새로 만나게 될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마주칠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산책로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
나는 이제 위로를 찾아서 한 발을 내딛는다.

나는 눈물을 참지 않기로 했다. 부끄러움은 내팽개치고 그저 소리 내어 크게 울기로 했다. 혼자 있는 누구와 함께 있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울음은, 화산처럼 폭발하는 울음은, 마음에 담긴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아무래도 울음은무엇으로 대체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울음이 필요하다면, 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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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파리행 - 조선 여자, 나혜석의 구미 유람기
나혜석 지음, 구선아 엮음 / 알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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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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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미셸 포르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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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수고스러운 일이죠. 저는 글쓰기를 위한 글을쓰는 것이, 해야 할 말이 안이함 속에 지워지는 것이 두려워요. 그저 책을 한 권 더 쓰는 것에는 관심 없어요. 그런 경우라면 절필을 하는 것이 낫겠죠. 앙드레 브르통은 평소 습관대로 큰소리를 치며 이런 말을 했어요. <아무 할 말이 남지않았다면,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책을 쓰는 일은 늘 하나의 큰 사건이어야 하고, 책의 마지막까지 써 내려가야 하죠. 그래야 무언가를 했다는느낌을 받게 돼요. 저는 이 <한다>는 욕망이 저의 어린 시절과 큰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상 지적인 작업을 한다는 것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요.부모님에게 저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었죠. 그 둘은 전혀 달라요. 일을 한다는 것은 손으로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주변에서 손으로,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보지 못했죠.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책이 강도 높의 결과물이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다고 여기는「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MP : 그렇지만 역시, 흔적을 항상 남기고 싶다는 욕구이기도 하죠?
A.E. : 글을 쓰는 것은 이름이나 사람으로서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니에요. 시선의 흔적을 남기는 거죠. 세상에 대한 시선이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가진 현재의 욕망을 이해하고있어요. 자신들의 삶을 쓰고 싶어 하죠. 예술적인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변화하는 불확실한 세상에 자아의 분산과 공동의 기억의 소멸이 각자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만들어요. 이 땅에 머물렀다 간 것을 증언하고 싶은 거죠. 생물학적인 의미로 생명을 물려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생각과 이미지, 하찮은 것까지도 보존되기를 원하죠. 단지 그것이 일어난 일이었다는 이유로, 이미 지나간 것이니까. 저도 그런 욕구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지식의 욕구와 분리하지는 않아요. 글쓰기는, 정말 글을 쓴다는 것은 지식을 겨냥하는 일이죠.
사회과학, 철학, 역사, 정신분석학 같은 지식이 아니라,감정과 주관성을 통과하는 또 다른 지식이요. 예전에 우리가 문체라고 불렀던 것에 누가 의존하나요? 더는 문체라고부르지 못하죠. 문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깊은 내면의 목소리 그리고 언어, 언어 자원 사이의 협정이에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자신의 이야기가 만든 이 목소리를 언어에 주입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글을 쓰면 느껴져요. 심리학이나 사회학 혹은 정신분석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죠. 저도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할 때가 있긴 하지만요. 부르디외의 사회학에 많은 것을 빚졌지만 제가 부르디외가 되려고 하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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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의 차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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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이가 멀어지고 국화가 휴학하고 나서 몇 달도 되지않아 내 머릿속에서는 국화가 잊혔다. 하지만 술자리가 있던 어느 밤 선배는 나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다 나는 아직도 국화 에 관해 지속된 생각을 해, 라고 잔뜩 취해 더 꼬부라진 영어로 말 했다. 걔가 자기는 뭐가 되든 앞으로 이기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던 걸 기억해. 그 말은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진로 이야기를 하면서 선배는 사실 자기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나는 NGO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 국화는 난데없이 자기는 이기는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기는 사람,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강심장이 되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그게 아니고 이기는 사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 정확히 뭘 이기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게지만 국화는 냉정하고 무심하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노아 선배는 그 말이 뭐가 그렇게 감동적인지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며 뭐 그런 말이 있냐,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다 해선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리게 걸으면서 나는 걔가 이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 라고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걔가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응원해, 정말 확실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거기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앞으로 걔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해, 그것은 어떤 오류의 가능없이 확실해.

"아저씨, 아저씨가 앞으로 오십 년을 산다면 오늘이 가장 불행한 날일 거예요. 더 나빠지지는 않을거예요.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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