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제 2외국어는 일본어였습니다. 문과생은 불어라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이과생에게는 오직 일본어였기에 자의가 반도 되지 않고 완전 타의로 시작한 공부였으니 (어떤 공부가 그렇지 않을까합니다만) 성적은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역시 히라가나, 가타가나는 어느정도 쉽게 넘어갔으나 동사의 활용과 한자에서 막혀버리고 말았지요.대충 그렇게 고등학교수준의 일어를 마치고 졸업후에는 일본어를 접할 일이 전무하였으나 왠걸? 일본문화가 개방되고(네. 제가 고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일본영화는 극장에 걸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영화들은 너무 재밌고, 도쿄며 교토며 일본의 도시들은 어찌나 매력적이었는지요. 일본어를 알았다면 더 깊이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미 맛본 일본어의 괴로움에 다시 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은 걸려온 전화에 대고 능숙하게 일본어를 구사했습니다. 그친구도 학창시절의 수준은 저와 비슷했으나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선임이 일본어를 모른다며 너무 구박을 해서 냅다 회사를 관두고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역시 칼을 갈며 도전하니 금새 목표를 이루었고 일본바이어를 상대하는 위치가 되었더라구요. 뭔가 획기적인 동기가 있다면 마스터 할 수도 있을 외국어지만 그 동기를 찾기도 저의 의지를 찾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라고 아쉬워 하면서도 풀썩!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옥(한지민)의 언니는 다운증후군입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장애인이 직접 연기자로 등장하는 장면은 흔치 않기에 (전 처음입니다만) 그녀의 등장은 놀라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옥이의 애인인 선장도 놀라워했고 후에는 “아무도 다운증후군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 지 알려 주지 않았어”라고 말합니다. 저도 이 책을 읽는 중에 이 장면을 만나게 되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우리는 매일 작던 크던 어떠한 불편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생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는 재벌은 드라마마다 나오지만 잠깐 외출만 해도 만날 수 있는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 지는 배우지 못합니다. 기껏 배우는게 ‘자꾸 쳐다보지마’정도가 아닐까요? 그렇게 자꾸 쳐다보지 말라고 배우니까 그들을 자꾸 안보이는 곳에 숨겨 두려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자꾸 보고 익숙해 져야 그들도 이 사회에서 익숙하게 살 수 있을 텐데요. 사실 저도 몸이 불편하니까 시설에서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몸은 편하겠지요.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밥먹고 자야하는 시간을 누리지 못한 다는 것은 너무나도 괴롭지요. 저는 평일 출퇴근 시간도 맞추기 힘들어하고 주말에 만끽하는 자유를 최대로 누리기 위해 애쓰면서 말입니다. 그들만의 집에서 그들만의 시계로 생활하는 삶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싶습니다.
김윤자는 그 여자들이 자기보다 잘나지 못했다는 데서 위안을받았다. 그래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김윤자 같은 부류의 여자는 더더욱 그랬다.그리고 그 여자들이 감히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않는 세계의 일원이라는 데 은밀한 기쁨을 느꼈다. 영어와 일어와불어로 된 소설을 구해서 읽는 일 같은 것들. 자기 전 이불에 누워나보코프는 영어로, 카뮈는 불어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어로읽으며 행복감에 젖었다. 또 작은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아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이나 물건을 사 모으고, 아는 사람들만 아는 영화를 보러 가는 그런 일
20년 전,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는 사회구조의 잔인함에 마음을 다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나아질 거라고희망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했다. 지난 20년 동안 세상이 조금이나마 나은 쪽으로 변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 목숨을 내놓기도 했다.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미 충분히가졌으며 더는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불편하게하지 말고 민폐 끼치지 말고 예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라는 이들을 본다. 누군가의 불편함이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을 본다. 더 노골적으로, 더 공적인 방식으로 약한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인간성의 기준점이 점점 더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많은 것들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힘을 더해야한다.
동물들은 아무것도 배우지않고 사는데도 저렇게 아름답구나.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될만큼 완전하구나.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괜히 한번 더 말해두자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한 나의 이름은 한국 판소리 역사에 아주 중요하게 남을것이니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이라도 내 작품을 직접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나 이자람 공연봤어! 나 이자람 살아 있을 때 객석에서 같이 추임새 했어!" 하고 자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사건 때문에, 어떤 순간의결정 때문에 인생이 뒤바뀌고 사람이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그 순간이 너무 강력하니까. 하지만 좋은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실 인생을 바꾸는 건 삶의 이면에 쌓인,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이다. 옳지 않게 쌓여버린 시간의 축적은 어느새 인간과 사회를 비뚤어지게 만들고 세대를 병들게 한다. 옳게 쌓인 시간의 축적은 그렇게 휘어지는 사회 속에서도 버티며 살아가다가 필요한 순간 빛을 발하는 단단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