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사람의 차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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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이가 멀어지고 국화가 휴학하고 나서 몇 달도 되지않아 내 머릿속에서는 국화가 잊혔다. 하지만 술자리가 있던 어느 밤 선배는 나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다 나는 아직도 국화 에 관해 지속된 생각을 해, 라고 잔뜩 취해 더 꼬부라진 영어로 말 했다. 걔가 자기는 뭐가 되든 앞으로 이기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던 걸 기억해. 그 말은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진로 이야기를 하면서 선배는 사실 자기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나는 NGO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 국화는 난데없이 자기는 이기는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기는 사람,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강심장이 되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그게 아니고 이기는 사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 정확히 뭘 이기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게지만 국화는 냉정하고 무심하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노아 선배는 그 말이 뭐가 그렇게 감동적인지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며 뭐 그런 말이 있냐,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다 해선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리게 걸으면서 나는 걔가 이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 라고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걔가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응원해, 정말 확실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거기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앞으로 걔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해, 그것은 어떤 오류의 가능없이 확실해.

"아저씨, 아저씨가 앞으로 오십 년을 산다면 오늘이 가장 불행한 날일 거예요. 더 나빠지지는 않을거예요.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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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어떤 말에 설득당해 어떤 행동을 하게나 어떤 경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어떤 말을 자신의 어떤 결정이나 경향을 설득시 키는 도구로 이용하는 이런 습성은 아주 일반적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설득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누군가의 결정이나경향을 지원, 혹은 해명하는 데 유리한, 그럴듯한 어떤 말을 하기 때문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신 이 많은 사람을 설득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면 그것은 당신이 많은 사람의 결정이나 경향 을 지원, 혹은 해명하는 데 유리한, 그럴듯한 어떤, 그러니까 매우 범속한 말을 하기 때문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말을 통해 자기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은, 주로 직업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착각이다. 이 착각은 자기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이들에 의해 주어진다. 실은 영향을 끼치고있는 것이 아니라 이용을 끼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착각과 이용은 워낙 은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로 눈치채지 못한다. 착각하는 자는 착각인 줄 모르고 이용하는 자는 이용하는 줄 모른다. 서로는 서로의 무지를 필요로 한다.

과거는 입이 크다. 입이 큰 과거는 현재를 문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 이 묽은 치명적이다. 입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이빨이 날카롭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이 이빨은 현재가 알지 못하고추측하지 못하는 이빨이다. 현재는 과거가 제자리에 멈춰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멈춰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 혹은 짐작, 혹은 기대이다. 현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과거는 움직이고, 자라고, 변하고, 그래서 몰라보게 달라진다. 현재를 삼킬 만큼 커지고 현재를 물어뜯을 만큼 날카로워진다. 현재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달라진다. 현재를 무는 과거의 이빨은 현재가기억하지 못하거나 짐작하지 못하는 이빨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달아났기 때문이고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현재의 숙명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기를 원치 않는 현재는 없다. 과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오만이다. 오만하지 않은 현재는 없다. 과거의 변신과 보복을 예감하고 대비할 만큼 겸손한 현재는없다. 과거를 땅속에 묻었다고 안심하지 말라. 관뚜껑을 열고 나오는 과거는 더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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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문구 - 나는 작은 문구들의 힘을 믿는다 아무튼 시리즈 22
김규림 지음 / 위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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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나는 굳이 수고를 들이는 일들을 좋아한다. 칼로 연필을 깎고, 매일 시계의 태엽을 감고, 일력을 뜯고, 전기포트를 놔두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인다. 이런 비효율성을 감내하는 건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걸 뜻한다(바쁠 땐 일력도 밀리고 시계도 멈춘다). 그래서 나는 내 일상 속에 항상 쓸데없는일들이 조금씩 자리하고 있기를 바란다.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 수고로운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있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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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황세연 지음 / 마카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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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게 살해당한 사내의 이야기가 이렇게 유쾌하고 아름다울 일인가요? 😉

"너무 깨끗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잖유. 도로에 침도 좀뱉고, 술을 마셨으면 주정도 좀 하고, 가벼운 범죄 정도는 슬슬 저질러가면서 속 편하게 사는 게 최고 아니유, 술 마시고 집에 가다 오줌싸게 생겼는디도, 줄줄이 서 있는 전봇대를 그냥 지나쳐 집까지 참고달려가려면 얼마나 힘들겠슈. 안 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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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서 벗어나 영혼이 언제든 홀로 여행할 수 있다면그것은 바람직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엔 안 좋은 점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손가락 화상이 그 예다.
평소처럼 난 나의 동물성에게 아침 준비를 맡겼다. 빵을 구워서 자르는 건 그의 몫이다. 그는 커피도 훌륭히 끓여 내 는데 이 모든 일을 대부분 혼자서 한다. 영혼으로서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볼밖에 달리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장치‘를 다룰 때 보면, 우리는 쉽게 딴생각 에 빠져 정작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는 주의를 잘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의거하여좀 더 부연하자면, 나의 영혼에게 나의 동물성이 하는 일을주시하면서 그가 하는 일에 끼어들지는 말고 그냥 바라보게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수행하기엔 경악하리만치 어려운 형이상학적 과제다.
나는 빵을 굽기 위해 화덕 위에 부집게를 올려 놓았었다.
잠시 뒤, 나의 영혼은 홀로 여행을 떠났고, 그 틈에 나의 동물성은 달구어진 장작을 화덕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우둔하기 짝이 없는 나의 동물성은 손을 뻗어 뜨거운 부집게를 그냥 잡아 버렸고 결국 나는 손가락을 데었다.

같이 지낸 지는 햇수로 6년인데 서로 데면데면한 적이 한 버도 없다. 소소하게나마 투닥거렸을 때, 언제나 내 쪽에 더크 허물이 있었음에도 먼저 화해를 청한 건 그였다. 전날 저녀에 내게 한 소리 들으면 그는 애처롭게 물러나 끽소리도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다소곳이내 침대 곁에 와서 기다렸던 것이다. 주인이 몸을 뒤척이거나 깰 기미가 보일라치면 침대 협탁을 꼬리로 살랑살랑 치면서 제 존재를 알렸다.
우리가 같이 지낸 이래 나에 대한 사랑이 단 한 번도 식지않은 다정한 그를 어찌 예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다 열거할 순 없어도 한때 나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까마득히 잊은 이들이 있다. 한때 나의 친구였거나 연 인이었거나 혹은 지인이었던 그들에게 이제 나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뇌리에선 나의 이름도 가물가물할터다.
그토록 사랑과 우정을 맹세하고 후의를 기약했건만! 경제적으로 의지해도 되고 허물없는 영원한 우정을 기대해도 좋다고 했건만!
사랑하는 나의 로진은 내게 그런 후의를 약속한 바 없으 나 인간이 받을 수 없는 최상의 후의를 내게 베풀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오늘도 나를 사랑한다.그리고 나도 일말의 주저 없이 그에 대한 사랑은 내 벗들에 대한 사랑 못지않다고 말한다.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변덕스런 여신이 있어 내가 경험한 이 두 세계를 다시는 잊지 않도록 해 주고, 다시는 이 위험한 연금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내 여행을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나를 방에 가두는 게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간직한 이 멋진 공간에서 말이지? 쥐를 광에 가두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제 나는 내 자신을 이중적 존재로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나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상상으로 누리던 즐거움이 그리울 때면 나는 어떤 힘으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을 느낀다. 그 은밀한 힘은 나를 인도한다. 그는 내게 속삭인다. 내겐 탁三인 대지와 하늘이 필요하고 고독은 죽음과 같다고 말이다. 채비는 끝났다. 나의 문은 열렸다. 포 가街의 널따란 회랑 밑을 거닌다. 수많은 정겨운 유령이 내 눈앞에서 오간다.
그래, 이건 저택이고, 문이고, 계단이다. 벌써부터 짜릿한기분이 든다.
레몬을 자르기만 했을 뿐인데 이미 혀에서 신맛이 도는것과 같다.
오, 나의 동물성이여, 몸조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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