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연애의 90%는 이해가 아닌 오해란 사실을…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특히나 여자는 더 그래. 왜 그런지 모르면서도... 그래서 일단 전반적으로 좋거나 싫어지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분의 여자들... 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꿈같은 사랑이란 것도 별다른 게 아니지. 그냥 살아가듯이 그냥 사랑하는 거야. 기적 같은 사랑이란 그런 거라구. 보잘것없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인간과 더불어... 누구에게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 얘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한 줌의 드라마도 없이... 어디 좋은 곳 한번 가보지 못한 채... 어딜 가봐야 눈에 띄지도 않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이..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치유의 과학은 파괴의 과학 앞에서 어찌 할 줄 몰랐다.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들과 달리, 얼굴 특징이 훼손된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은 연민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만, 얼굴이 훼손된 사람은 거부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감정이나 의도를 담는 그릇으로써 얼굴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우리 언어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면목이 있다>나<면목이 없다>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누군가가 믿음직하다면, <얼굴값>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거짓말쟁이는 <철면피>,<뻔뻔한 얼굴>, <두 얼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누워서 침 뱉기의 영어 표현은 <제 코를 잘라 자기 얼굴을 망가뜨리기cut off hisnose to spite his face〉인데 현실과 비유, 양쪽 차원에서 걸맞은 말이다.
처음부터 길리스는 병사의 얼굴 손상을 꿰뚫어 보는 탁월한 능력을 드러냈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가 환자들을 그저 군번 숫자로만 보지 않는 <훌륭한 마음씨와 강철 같은 신경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했다. 33 올더숏에서 길리스의 치료를 받은 병사의 형제인 D. M. 콜더컷 스미스는 그 의사가 <친절한 인간적인 면모로가득하다고 기억했다. 34 레지널드 에번스 중사도 <평범한 병사가장교 못지않게 간호를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그는 길리스가 <내 상처에 직접 붕대를 감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내가 괜찮은지 밤에 보러 왔다>고 썼다. 에번스는 훗날 자신이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길리스의 재건 치료가 성공한 덕분이라고 했다. <내 행복의 많은 부분은 그 덕분이다.>
상처는 전쟁터에서만 입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길리스가 그렇게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병원에서 회복 중인 병사들의 호감을 얻은 것은 그의 개구쟁이 같고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그곳에 환자로 있었던 한 사람은 이렇게 회고했다. <길리스 소령 자신이 《소년 중 한명》이었다. 그는 그들의 언어로 말했고,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 길리스는 환자들이 몇 달, 몇 년을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사기를 잃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병사의 얼굴을 재건하는 일은 어려웠지만 부상으로 생긴 심리적 손상을 치료하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신체 손상이 잠재의식에 입히는 손상은 언제나 치료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시도하지 않은 것은아니었다.
성형 수술의 기본 원리가 옳았음을보여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사라진 조직을 채우는 첫단계는 정상적인 위치에서 정상적인 상태가 유지되도록 하는것이었다>라고 썼다. <벨 사병의 사례에서는………… 조직을 원래의 정상 위치로 돌려보내어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었다.>그는 이것이 낯선 신기술의 주춧돌이라고 믿었다.
길리스는 이렇게 썼다. <좋은 양식을갖추면 다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술 양식은 손가락의 움직임을 통해 드러나는 성격과 훈련의 표현이다. 능숙함과 부드러움의 지표다.> 해럴드 길리스가 시드컵에서 계속하여 보여 주었듯이 그 성형외과 의사는 단지 유능한 장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가였다.
<재건 수술은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이고, 미용 수술은 정상을 넘어서려는 시도다.>
이토록 뾰족하고 거친 이야기를 어쩜 이토록 아름답고 귀엽게 쓸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위악을 부리고 있으면서도 눈은 시옷자로 기울어져 애처로운 빛을 보일 듯 합니다. 나보다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나 나보다 나을 듯한 사람에게서도 모두 나를 마주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맹범씨는 네 시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얼토당토않다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방금 경험한 네 시간은 그가 여직껏 살아온 고르고 유연하게 흐르던 시간과는 전혀 단위가 다른 시간이었으므로. 그건 돈의 단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지금 필요한 이백원의 가치를 그가 여직껏 쓰거나 모아온 재산과 같은 단위로 헤아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 무렵엔 참으로 당당한 사람이 귀했다. 그녀가 거침없이 잘난 척하는 게 밉살스럽다가도 문득 부럽고 보배로워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일상의 바퀴에 기름을 치는 일은 하나도 표가 안 나서 남들은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겐 여간 중요한 씀씀이가 아니고, 물론 안 아까워요
우리는 마치 새끼를 낳고는 탯덩이를 집어삼키고 구정물까지 싹싹 핥아먹는 짐승처럼 앙큼하고 태연하게 한 죽음을 꼴깍 삼킨 것이 었다.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고, 조상객을 치르고,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웃어른과 아랫사람과 말다툼도 치르고, 차례에 제사에 또 제사를 치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고 진저리가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지긋지긋해지면서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비로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여자에게는 ‘육감‘이 있다고 하는 경우가 있지요, 또는 어떠한 사건에 대해 남자와 다른 감상을 말하게 될 때면 ‘여자들은 너무 예민하게 받아 들여‘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셔터우의 세자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을 알아채고 본인이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보이지 않는 능력, 냄새를 알아차리는 능력, 소리를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매들입니다. 하지만 읽을수록 책 표지의 광고멘트처럼 단순히 ‘초능력’이라고 뭉뚱그려 치부할 수 있을까요? 그저 조용히 살면서(작가의 말대로) 자신이 태어난 가부장제 속에 살다가 다른 가부장제로 옮겨가 살던 구시대의 여성들과 다르게 세상과 사람을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 느끼는 그녀들이 좀 유별나 보일 수는 있었겠지요. 소설의 초반에 그녀들의 능력을 초능력이라 생각할 때는 ‘환상소설‘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고 질문이 해결되며 얽혀 있던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풀리면서 그녀들은 단순한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타인의 감정을 깊게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할 인간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주인,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그러나 엘렌은 어머니로부터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노예소유자들이 무엇을 훔쳐 가거나 빼앗든 간에, 그녀가 가져온 사랑은 그녀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엘렌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 자신의 힘을 발견하고, 필요하다면 스스로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배웠다. 엘렌에게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갈 힘을 준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엘렌에게 이 경험은 또 하나의 중요한 승리였다. 그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영리한 변장이나 행운, 우연만이 아니라 낯선 이와 쌓은 선의로도 이겼다. 그녀는 조금씩 나눈 대화로 젊은 장교를 설득해, 그녀가 그와 같은 계급에 속한 인물이라고 믿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단 한순간에 그녀의 노력이 보람을 거두었다. 엘렌의 성공은 그녀가 속한 세상의 위선과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그러나 침묵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 있었다. 엘렌은 그녀만의 것인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낯선 자들이 자제하지 않고 끔찍한 질문을 던지며 그녀의 상처를 더듬지 않도록 말이다. 어쩌면 엘렌은 그냥 신물이 난 걸지도 모른다. 전략적인 선택일 수도 있었다. 엘렌은 삶에서나, 북부로 여행할 때나 반복해서 자신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해방을 설계하고 실행했으며,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을 꾀로 이겼다. 그녀의 침묵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말하기를 금지당한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같은 주제에 대한 하나의 변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녀의 침묵은 일등석 기차를 탔던 것만큼이나 능동적인 저항 행위였을지 모른다.
마차 안이든, 밖이든, 여자든, 남자든, 승객이든, 운전사든, 백인이든, "유색인"이든, 결국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더러워지고 놀라고 멍들었다. 모두가 갈색으로 변한 바지와 젖은 치마를 입고, 핼리팩스까지 최소 11킬로미터에 걸쳐 흙과 비로 이루어진, 질척거리는 길을 걸어가야 했다.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크래프트 부부가 받은 반응을 보면, 이들이 앞서 한 여행이 성공한 이유는 엘렌이 백인 행세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돈이 많고 장애가 있는 백인 남자 행세를 했기 때문임을 잘 알 수 있다. 크래프트 부부가 그렇게 여행할 수 있었던 건 서로 친밀한 관계나 남편과 아내라는 점,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적인 친족 관계’라는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드러난 지금, 크래프트 부부는 조지아주를 떠나 이동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편견에 마주하게 되었다. 남부를 벗어나고 미국을 벗어났는데도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인과 노예, 그건 아니라도 주인과 하인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졌는데도 말이다.
어느 기자는 크래프트 부부가 해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참석한 만찬에서 엘렌이 "노예들이 해방될 경우, 자신을 보살필 수 있을 만큼 일반적으로 지적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엘렌의 답은 이랬다. "현재 노예들은 자신을 돌보고 그 주인까지도 돌보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노예들은 자유로워지면 얼마든지 자신을 돌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즉흥적인 재치는 대단히 중요했다.
"여왕과 노동자가, 왕자와 상인이, 귀족과 거지가", 온갖 피부색의 사람들과 다양한 삶의 경로를 걸어온 인물이 서로 부딪히고 동등한 지평에서 만난 이 특별한 공간에는 엄청나게 큰 자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계급의 융합이 이루어졌고, 이해관계가 친절하게 뒤섞였으며, 지위와 등급에 관한 냉정한 격식은 잊혔다. 이 점이 브라운에게는 박람회 자체만큼 아찔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