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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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른 위픽 시리즈다.
요즘 핫한 젊은 작가 중 한 분, 성해나라는 이름만 믿고 읽기 시작한다.

건축학과 4학년인 재서는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교수에게 “숙제”라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응용수학과에서 전과한 이본은 같은 교수에게 “귀감”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 이본과 재서는 한 학기 수업 내내 등고선만 그리게 한다는 악명을 듣는 문교수의 서머스쿨에 참여하게 된다.

경주 변두리의 이백 년 된 고택 개축을 위해 조사차 현장에 나간 둘은 서로 다른 성격 탓에 어울리지 못하고 시간만 흐른다.
교수가 지시한 바를 따르려는 재서와 더 편리한 방법을 택하려는 이본은 의뢰인의 의견과 달리 ‘개축‘이 아닌 ’재건‘으로 의견을 모은다.

그런 둘에게 문교수는 경주를 둘러볼 것을 제안하고 둘은 한여름의 경주를 샅샅이 살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다.
전혀 다른 성격의 같은 과 학생인 이본과 재서의 이야기는 재서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재서는 자신의 장점을 찾기보다 이본과 비교하며 자신의 약점에 몰두하며 힘들어한다.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도시 경주의 고택에 살면서도 주민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녀와 고택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이본과 재서는 닮은 듯하다.
어려움이 닥치자 고택에 살던 그들은 그동안 오해했던 주민들의 진심을 알게 되고 재서와 이본 역시 경주를 제대로 본 후 왜 고택을 개축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단점이었던 고택의 불편했던 점들이 어느 순간 보존해야 하는 것으로 달리 보이듯 조심성 많은 재서의 성격이 천천히 그려지는 등고선만큼 편안하게 느껴진다.
천양지차 다른 성격의 이본과 재서가 마주 잡은 손을 쉬 놓지 않을 것 같아 기분 좋아진다.
그나저나 여름날의 경주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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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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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황금가지 서평이벤트에 당첨돼 받았습니다.>

2001년 <13계단>으로 소설가로 데뷔한 작가는 데뷔작으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다.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과작의 작가인 그의 새로운 작품에 늘 목말라하던 차에 일본보다 한국에서 먼저 단편집을 출간한다는 소식에 기대가 컸다.

13년 동안 다녔던 회사에서 정리 해고된 사와키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 다니무라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이상한 ‘발소리’를 듣는다는 다니무라는 사와키에게 그 발소리가 진짜 들리는지 확인을 부탁한다.

표제작인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미야코가 괴한에 의해 살해당하자 경찰은 약혼자인 요네무라를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하지만 뚜렷한 물증을 찾을 수 없다.
고심 끝에 경찰은 사건 현장으로 요네무라를 데려가고 그곳에서 미야코의 유령과 마주치게 된다.

’세 번째 남자’는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남자가 되는 꿈을 꾼 마리코가 자신의 전생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꿈속에 등장했던 사고 장소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가장 끔찍했던 ‘아마기 산장‘은 전쟁이 끝나고 13년이 지난 1958년 경이 배경인 소설이다.
소설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미조로 박사가 전쟁 중 근무했던 부대가 생체 실험을 했던 731부대로 짐작되기에 그의 집념이 더더욱 공포스럽다.

‘두 개의 총구’는 밀폐된 건물에 총격에 의한 무차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찾아들고 그곳에 혼자 있는 이시야마는 어떻게든 그를 피해 숨어야 한다.
스스로를 ’제로’라고 이름 지은 남자는 자신에 대한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해변에서 깨어난다.

모두 6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작가의 전작인 <건널목의 유령>에서 접했던 심령 서스펜스와 같은 종류의 소설 등과 sf 소설로 이루어졌다.
표제작을 비롯한 네 편의 소설에는 유령 같은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

실제로도 범행 후 범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쫓기기도 하고 사건을 맡은 수사관의 꿈에 피해자가 등장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니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이해할 수 없는 심령 현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평범한 모습을 한 인간들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까닭에 읽는 내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가독성이 너무 좋아 후루룩 읽게 되지만 다 읽은 후 읽은 시간보다 더 오래 인간의 잔혹성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 계절에 읽기에 딱 좋은 소재의 이야기라 많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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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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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이덴슬리벨 출판사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제공받았습니다.>

소설은 작가인 줄리엣에게 어느 날 채널제도 건지섬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도시 애덤스의 편지가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연히 예전 줄리엣이 판매한 찰스 램의 책 안 쪽에 적힌 주소를 보고 편지를 보낸다는 도시는 자신을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회원으로 소개하고 현재 독일군이 점령했던 섬에는 서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런던에 있는 서점의 주소를 알아봐 줄 수 있는지 부탁한다.

줄리엣은 자신이 팔았던 책 덕분에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는 도시의 편지에 감동해 찰스 램의 다른 책을 보내고 편지로 교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시뿐 아니라 건지섬의 북클럽 회원들과도 편지를 주고받게 되면서 특이한 이름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 생긴 사연에 대해 듣게 되고 그 중심에 ‘엘리자베스 매케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당한 유일한 영국 영토였던 건지섬 주민들은 어린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고 고립되었다는 두려움과 기아에 허덕이며 이웃의 감시를 받기도 한다.
독일군 몰래 숨겨 키우던 돼지를 잡아 파티를 연 주민들은 통금시간이 가까워지자 각자 집으로 돌아가다 독일군의 검문에 걸리게 된다.
다행히 엘리자베스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독일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북클럽 모임을 시작하게 된다.

소설은 줄리엣이 건지섬 주민들과 친구 소피, 그리고 소피의 오빠이자 출판사 대표인 시드니, 그리고 줄리엣의 남자 친구인 마크와 주고받은 편지와 전보, 쪽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간체 형식이다.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차분하게 써 내려간 건지섬사람들의 편지는 줄리엣의 다음 작품의 영감을 주고 그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건지섬에 가게 된다.
섬 사람들의 환대를 받은 줄리엣은 더더욱 건지섬의 북클럽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엘리자베스의 일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전쟁 중 책이 사람들에게 주었던 위안과 하녀의 딸로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강인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던 여인이자 엄마였던 엘리자베스의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이다.
특별한 규칙이 없이 진행된 북클럽은 전쟁이라는 어려운 시절에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했고 부모 잃은 아이를 보듬게 한다.
천성이 착한 이들이었는지 아니면 독서를 통해 품이 넓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북클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살피게 된다.

소설은 서로 주고 받는 편지를 통해 섬의 역사와 한 사람의 인생, 그리고 전쟁의 공포는 물론 그 안에피어나는 절절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녹여 담는다.
특히 북클럽 회원들의 독서는 각자의 형편과 관심사에 따라 형식이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흥미롭게 펼쳐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의 작가가 등장할 때면 친근감과 반가움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은 십 여 년 전에 타 출판사에 다른 제목으로 출간된 당시 읽은 책으로 꽤나 인상 깊게 읽었기에 언젠가 꼭 재독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드디어 다시 읽게 되었다.
시간이 꽤 지난 탓에 소설의 자세한 부분까지 기억하지 못해 새로운 이야기를 읽은 기분이었지만 처음 읽을 때의 감동은 다시 찾아왔다.
이모와 조카 사이인 작가들의 사연도 소설 속 이야기만큼 가슴 아파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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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으로
김초엽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래빗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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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래빗홀출판사의 래빗홀클럽 활동 중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한국과 중국의 여성 작가 6명이 모여 sf소설을 썼다는 소식만으로도 놀라운데 참가한 우리나라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소위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이라 어떻게 이런 기획을 했나 싶어 반갑고 기대감이 커진다.
6명의 작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체”라는 주제로 각자의 개성을 담은 소설을 선보이고 있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소설의 1부는 ‘기억하는 몸‘으로 우리나라의 김초엽 작가의 <달고 미지근함 슬픔>과 중국의 저우원 작가의 <내일의 환영, 어제의 휘광>이 실려 있다.
2부는 ’조우하는 몸’으로 김청귤 작가의 <네, 죽고 싶어요.>와 칭징보 작가의 <난꽃의 역사> , 3부는 ’불가능한 몸‘으로 천선란 작가의 <철의 기록> 과 왕칸위 작가의 <옥 다듬기>가 수록되어 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은 몸을 버리고 데이터 세계로 이주한 인류의 이야기로 몸 없이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실제가 없는 세계의 허무를 잊기 위해 ‘몰두‘에 집중한다.
벌을 키우는 일에 몰두한 단하에게 곤충 연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규은이 찾아오고 여러 날 함께 하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규은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된 순간 단하는 자신이 몰두하는 일이 실체가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저우원 작가의 <내일의 환영, 어제의 휘광> 은 어느 날 이유도 없이 사람들 사이의 언어가 섞여버리는 점염병이 발생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잠깐의 대화에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탄생해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외국에 나와있던 샹잉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잊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통하지 않는 언어 때문에 비행기 운행도 불가한 상태다.

김청귤 작가의 <네, 죽고 싶어요> 에서 ‘나‘는 무너지는 싱크홀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고 몸을 던졌고 신체가 반투명한 상태로 눈을 뜬다.
현재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나‘는 백중날에만 열린다는 다방에 도착해 그곳에서 다양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구하려 했던 아이를 만나게 된다.
청징보 작가의 <난꽃의 역사>는 sf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타임슬립을 다룬 이야기로 1980~90년대의 중국의 실상과 다채로운 중국의 문화를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천선란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고통과 혼란이 없는 무감각의 세성에 사는 신시민들을 옴니아가 지배한다.
사람들은 무감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데 주인공에게 틈이 생겨 감각을 느끼기 시작하고 자신과 비슷한 어린 신시민을 구하게 된다.
마지막 왕칸위 작가는 감각을 조절하고 지각을 최적화해 신체의 고통을 통제하고 영혼의 기쁨까지 얻을 수 있는 ‘위’를 뇌에 이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6편의 소설은 지금까지 읽어오던 sf소설과 달리 먼 우주가 배경인 이야기는 한편도 없다.
저우원 작가의 이야기는 2026년이 배경이고 천선란 작가의 소설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날짜를 세는 방식이 아닌 세상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인간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존재하는 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몸이라는 소우주와 세계라는 대우주를 그려낸 한 권의 책으로, 이 안에 담긴 다양한 목소리와 몸짓 그리고 풍경이 독자를 새로운 우주로 데려다줄 것이다.” (옮긴이 김이삭의 말 중에서)

소설 속에는 몸이 주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무감각해지는 세상을 택하기도 하고 몸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데이터만 존재하는 세상도 존재한다.
몸이 막고 있는 불편을 털어낸 이후 인간의 자유가 무한대로 실현될 것 같은 세상은 생각과는 다르게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몸이라는 그릇이 존재하기에 인간은 존재한다는 진리는 현재의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 따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깊이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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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안에서
아드리앵 파를랑주 지음, 신유진 옮김 / 보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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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보림출판사 서평이벤트에 당첨돼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새벽부터 태양이 뜨겁게 타오르던 날, 한 여자아이가 터벅터벅 걸어옵니다.
그리고 작은 바위가 만든 그늘에 앉아 태양을 피합니다.

뱀 역시 바닥이 뜨겁지 않은 곳을 찾아 그늘 안으로 들어와 여자아이와 마주 앉습니다.
잠시 후 혀를 축 늘어뜨린 여우가 도착해 그늘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후가 되자 토끼가 오고 고슴도치 그리고 멧돼지가 뒤따라옵니다.
그 후 염소와 여러 마리의 새들까지 오자 그늘 안은 점점 북적입니다.

그림책은 더운 날 작은 바위가 만든 작은 그림자 속에 많은 동물들이 쉬어 간다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만약 누군가 그늘에서 함께 쉬기가 아닌 자신의 힘을 믿고 다른 동물들을 쫓아냈거나 먼저 도착한 동물들이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게 못마땅해 바위의 그늘을 없애려 노력했다면 그 그늘은 아무도 쉴 수 없는 곳이 돼 버렸을 겁니다.

어디인지 모를 곳에 덩그렇게 놓인 바위와 태양이 만든 그림자로부터 시작한 40페이지 남짓되는 그림책에 사용된 배경색은 똑같은 색상이 하나도 없이 시간에 따라 조심스레 조금씩 다른 색으로 변해 갑니다.
특별한 배경이 없는 그림책은 변해가는 배경색, 그림자의 길이와 위치만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게 합니다.

“책의 물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가의 그림책은 보통 보아오던 그림책과는 다르게 가로로 긴 판형입니다.
또한 그림책 속 그림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노출제본 방식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그림은 새로운 친구들이 도착할 때마다 반기는 동물들의 몸짓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정확합니다.

등장하는 동물들은 그림책 속이 아니라 생태계에서 만났다면 함께 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라 작은 그늘을 나누는 모습에서 우리는 공존과 연대를 봅니다.
혹시 나는 지금 나만 더 큰 그늘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밀어내고 그늘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 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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