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 은둔형 외톨이 칸트에서 악의 꽃 미셸 푸코까지 26인의 철학자와 철학 이야기
저부제 지음, 허유영 옮김 / 시대의창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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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서양철학입문서다. 작가가 들어가는 말에서 밝혔듯이 철학을 공부하고 싶지만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가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에게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 책을 쓰겠노라고 건넨 농담이 이 책의 시작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쓰기 시작한 글이 호평을 받았고 덕분에 출간까지 하게 되었으니 인터넷의 수혜를 듬뿍 받은 책이다.

 

작가는 책이 가진 한계까지 밝혀둔다. 이 책은 통속서이며 독자들의 흥미를 높이는데 주력한 책이자 철학의 성대한 만찬을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마시는 식전주같은 내용이니 원서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이 책에 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토록 정직한 들어가는 말에 있다. 위선이나 허영을 싫어하고 정직 혹은 솔직함을 미덕이라 여기는 나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싶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기대 이상으로 웃겼고 명확했다. 유머가 넘치면서도 유려한 필력을 자랑하고, 또 그런 필력만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학자들의 핵심사상을 분명하게 요약해냈다. (서양철학전공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위대한 사상가의 이면에는 미치광이거나 루저이거나 찌질한 본성이 공존하고 있음 역시 놓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업적과 인격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위로를 받는다. 나만 미친 짓하고 찌질한 거 아니지? 너네 위대한 척하지만 니네들도 나보다 더 심하게 망가진 거 맞지? 그 어느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밤새 이불킥도 하는 거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우리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때 용기가 생긴다. 거, 나만 바보 클럽 아니잖아! 

 

완벽해 보이는 서양철학자들의 사상도 또다른 사상가들이 발견할 수밖에 없는 허점을 갖고 있다면 지금의 이 완전해 보이는 자본주의 시스템도 그 언젠가 무너질 허점을 안고 있겠지. 어쩌면 그 허점을 발견하고 싶어 서양철학을 뒤적이는지도 모르겠다. 서양의 역사, 철학, 시스템은 헤겔의 변증법이 그러하듯 --의 과정을 거쳐 왔으니 앞으로도 그런 과정의 연속이겠지.

 

서양철학은 인간이 가진 사유의 힘이 얼마나 큰지 배우게 하는 동시에 또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도 깨닫게 해 준다. 하이데거의 생각처럼 죽음의 가능성이 생존의 진정한 의의를 환기시킬 뿐이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해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일 테니. 그러므로 니체의 권유처럼 끊임없이 자아를 초월하는 인생관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이 가진 힘은 멈춰 서지 않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완벽할 수 없고, 아무리 높아 보여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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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게 제 블로그 링크만 걸어둡니다. ^^

http://blog.naver.com/dreamerfs/22091558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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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재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물만두님은 투병 중이었어요. 그래서 물만두님과 직접적으로 어울린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분 때문에 헌책방이나 중고매장에 갈 때 절판된 장르소설을 삽니다. 지금도 물만두님이 살아계셨다면, 책으로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연우주 2017-01-20 14:19   좋아요 0 | URL
물만두님은... 원래 투병 중이시다가 책을 읽으신 분이신데요.... 참 다정하시고 좋은 이웃이었어요.

감사한 분들이 언급한 분들의 두 배 이상 되지만, 지금은- 교류도 없는데... 감히 언급하기가...

알라딘의 경영 방식이나 경영 철학은, 참으로 싫어하지만 제가 아직까지 알라딘에서 책을 사는 이유는, 알라딘 서재로 알라딘에 빚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스24를 문제집 출판사에서 인수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ㅋㅋㅋ 늘 선택은 차악이죠.) 물론 여전히 좋은 서평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알라딘 온라인 서점을 초창기에 시작한 덕 참 많이 봤네요.

연우주 2017-01-20 14:20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저는 변덕 병이 있어서 알라딘에서 달인 된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cyrus님 대단하신 듯! ^^

cyrus 2017-01-20 15:48   좋아요 0 | URL
누구나 꾸준히 글을 쓰면 달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재에 남기는 글은 하루 동안 책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한 일기와 가깝습니다. 일기 대신에 리뷰를 쓰고 있는 거죠. ^^;;

연우주 2017-01-20 15:53   좋아요 0 | URL
네. 훌륭하십니다. ^^
 
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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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를 좋아한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재밌게 읽었다. <하류지향>은 오래 전에 신간 소개 기사에서 소개받고는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읽었다.

 

조금 더 빨리 읽었으면, 학교에서 왜 배워요?”, “뭐에 써 먹어요?”라는 식의 질문에 대해 부드럽게 응대했을 수 있었겠다. 2005년에 강연을 하고 2007년에 이 책이 출판되었으니 10년이나 지났다. 일본이 한국보다 몇 십 년 앞서 있다고 하니 현재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 유용한 책이다. 2013년에 쓴 우치다 타츠루의 서문에 의하면 그도 절판되었던 이 책을 다시 출간하는 것을 보니 한국에서도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유효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일본 번역서들이 대체로 그렇듯 쉽게 잘 읽힌다. 우치다 타츠루는 필력이 좋은 저자인 덕도 있겠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몇 대목 있지만 대부분은 우치다 타츠루가 가진 문제의식과 분석에 공감했다. 신자유주의는 공부와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세대를 양산했고 자본화되지 않는 것들은 유효하지 않게 만들었다. 공장의 레일이 돌아가듯 24시간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시간성은 사라지고 없다.

 

몇 년 전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을 공약으로 걸었던 정치권의 후보(이 사람은 싫어한다)가 있었을 만큼 우리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일본과도 너무나도 흡사한 한국 상황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노동조건이 나쁜 나라이기 때문이다.

 

햄버거 세트 하나 맘 편하게 사 먹기 힘든 최저시급, 언제 짤려도 이상하지 않은 계약직 노동자, 쉴 공간이 없어 화장실 한 켠에서 쉬어야 하는 청소 노동자. 그런 생각을 하니 우울함이 밀려든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살게 할 것인가. 자꾸 되물을 수밖에 없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정치와 사회에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대답이다. 우치다가 말했듯, “주제넘은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청년 실업에도, 최저시급에도, 청소 노동자 문제에도, 세월호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한 사람이 없도록. 그에 대한 관심이 나에 대한 관심이므로.

 

무지는 죄이다. 늘 그렇게 믿었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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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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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선생님(존경하는 분들을 언급할 때 반드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을 두 번 뵈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을 따라 '홍명희 문학제'에 갔을 때와 2009'한국작가회의'에서 주최한 '젊은 작가와의 대화 -김사이 시인'에서 였다. 홍명희 문학제 땐 아주 잠시 뵈었다. 내 앞을 먼저 걸어가던 선생님이 문을 여시곤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주신 기억이 오래 남았었다. 나보다 앞서 홍명희 문학제에 참석했던 선후배들이 도종환 선생님을 뵙고는 친절하시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평가를 했었는데 나도 그 말에 공감을 하게 되었었다.

 

2009년에는 길게 뵈었다. 당시 도종환 선생님은 '한국작가회의'의 간사셨다. 용기를 내어 따라간 뒷풀이 자리에서 여러 명의 작가들과 함께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역시 도종환 선생님은 따뜻하시고 유쾌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선생님이 정치인이 되다니. 여전히 놀랍다. 하지만 어느 일면 이해도 된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정치를 바꾸어야 하니까.

 

인간적으로야 도종환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선생님의 시를 많이 좋아하진 않았었다. 시의 매력은 역시 은유와 상징, 멋들어진 언어에 있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송경동 시인처럼 도종환 선생님의 몇몇 시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오늘 하루>라는 시는 자주 읽는 시들 중 하나다.

 

며칠 전, 선생님이 시집을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외였다. 정치를 하시는 선생님이 시집을 내시다니. 사월 바다를 산 이유는 시인이자 교사이던 시절의 선생님의 시 경향과 정치인이 된 후의 선생님의 시 경향이 달라졌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말부터 읽었고, 작가의 말에 반했다. 왜 하필 정치를 택했을까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골집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 수련 한 포기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련에게 왜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존재의 바탕이요 수련의 현실이며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

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찍으려면 몸에 흙이 묻습니다. 집을 고쳐 지으려면 흙먼지를 뒤짚어쓰게 됩니다. 지난 사년간 온몸에 흙을 묻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시들을 썼습니다.

 

구도의 길과 세속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해 가고자 하는 길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201610월 도종환"

 

사람들의 우문에, 이보다 명쾌하고 현명한 대답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런 대답을 듣고 있노라니, 정치인으로서 선생님의 시가 달라졌을까 싶었던 생각도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랬듯, 사월 바다의 시들도 정직하고 분명했지만 깊었다.

 

슬픔의 통로

 

별들이 유난히 가까이 내려오는 밤이 있다

그믐이 다가올수록 어둠은 더 많은 별을 내보낸다

동굴 속에서 몇날 며칠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킨

한 사내를 생각한다 불씨를 만든 것은

얼어터진 두 손이었을까 혹독한 한파였을까

삼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게 한 것은 거친 물결

지도를 만든 것은 오랜 방황과 잃어버린 발자국

기도를 알게 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가르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경전을 쓰게 한 것은 해결할 길 없는 고뇌

시인을 만든 것은 열망이 아니라 슬픔 아니었을까

이 통증의 끝에는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삶과 죽음이 완만한 속도로 임무를 교대하듯

슬픔 속에서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시간이 오리라

지금은 다만 천천히 깊은 슬픔의 통로를 걸어나갈 것

서둘러 눈물을 닦지 말고 흐르게 둘 것

여기까지 우리를 밀고 온 것이 좌절의 힘이었듯

약초를 알게 한 것이 상처와 고통이었듯

패배를 딛고 처절하게 한발 한발 걸어나갈 것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다스려 온기로 바꿀 것

지금은 따뜻한 위로의 물 한잔을 건넬 시간

남을 찌르지 말고 피 묻은 분노의 칼을 거둘 것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마음의 안부를 물어볼 것

그리고 창을 열 것

그러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되리니

그쪽으로 갈 것

그러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가시리니

 

"시인을 만든 것은 슬픔"이었을지 몰라도 "통증의 끝에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좌절의 힘""한발 한발 걸어나갈" "온기"이자 "위로"가 되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쪽으로" 가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간다. "슬픔의 통로"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 되어 우리뿐만 아니라 신도 안내한다. 그러니 섣불리 절망하지 말 것.

 

정치인으로서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어도 희망을 놓치 않는 시인의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현실이 암울해도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 시는 현실의 어두움에 오래 좌절했었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뿐이 아니다.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 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

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

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이 시는 사월 바다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도종환 선생님의 가치관을 깨닫는다. 선생님이 끝까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의 음성"으로 "새 한마리의 목숨""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고 말하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겠다.

    

​『사월 바다를 읽으며 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그동안 도종환 선생님의 시를 폄하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한다. 시의 힘은 문재(文才)가 없는 범인(凡人)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빼어난 언어적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손을 잡고 나아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의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점검한다. 어둠이 짙게 깔린 여기, 지금,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음성이야말로 시가 아닐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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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땅콩문고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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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omn.kr/m0uh

- 오마이뉴스 책동네에 기고한 글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았다,라고 말하면 지루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셨는지 아버지는 내가 8살 때 이사를 택하셨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친구가 생기려고 할 무렵에 경기도에 있던 목장으로 이사를 갔다. 원래 사슴을 키우는 목장이던 곳이 수련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수련원의 식당에 손이 필요했던 이유였다. 아버지는 수련원 식당의 주방장이 되셨고 우리 남매들은 난데없이 시골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은 인근의 초등학교에서도 꽤 먼 곳에 있었다. 한 시간을 걸어서 이십여 분을 버스를 타고 내려야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오빠와 등교 시간이 겹치는 오전에는 오빠와 같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반이 되는 날-당시의 초등학교 저학년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었다-에는 혼자 한 시간을 걸어서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힘든 생활이었지만 닥쳤으니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와야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도 같다.

 

친구 사귀기 대신 책을 즐겨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책을 다 읽은 후가 문제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그렇게 책에 관한 수다를 떨고 싶은지 오히려 더 쓸쓸해졌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독후감도 쓰고, 일기도 썼다. 작품을 모방하며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런 시간을 거쳐 책을 읽고 나면, 글을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원석 작가의 <서평 쓰는 법>이 반가웠던 이유는 이런 내 삶의 이력이 있어서였다. 작가는 서평이 독서의 완성이라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잘 읽을 수 있고, 또 깊이 읽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읽어야 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책을 통해 나를 만들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읽은 책에 대해 서평을 쓰는 것입니다. 서평이야말로 독서의 심화이고, 나아가 독서의 완성입니다.”(9-10)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독서의 심화법을 배우고, 완성에까지 이르렀다는 칭찬을 받으니 이 책이 안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냥 책을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서평으로 흔적을 남기는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서평이야말로 제 독서의 결산인 셈입니다. 서평으로 독서가 일단락되는 것이지요.”(10)

 

어설펐지만 어린 시절부터 써 온 서평(혹은 독후감)이 있었기에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책을 오래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서평 쓰는 법>은 기존의 내 독서법이 독서를 할 때, 꼭 필요한 과정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서평과 독후감을 혼동해서 사용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작가는 이 부분을 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독후감과 서평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첫째, 독후감이 정서적이라면, 서평은 논리적입니다. <중략> 둘째, 독후감이 내향적이라면, 서평은 외향적입니다. <중략> 셋째, 독후감이 일방적이라면, 서평은 관계적입니다. <중략> 이렇듯 서평은 그 서평을 읽는 독자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서평 읽기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서평을 읽은 독자가 해당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 구체적인 반응으로 화답해 주어야 서평은 제 구실을 다한 것이 되며, 이로써 서평을 통한 대화가 완성됩니다.” (23-25)

 

1부 서평이란 무엇인가의 시작은 서평과 독후감을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서평의 본질과 서평의 목적을 짚어낸다.

 

서평, 즉 북리뷰(Book Review)에서 리뷰는 책을 다시(re) 보는(view)' 겁니다. 새롭게 읽는 것이지요. 이는 해석의 주체인 독자가 각기 다른 자리에 서 있기에 가능합니다. 모든 서평은 독자/서평가의 다시 읽기입니다. 나아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를 제안합니다.” (33)

 

서평 쓰기의 일차 가치는 독자 자신의 내면 성찰에 있습니다. 서평 쓰기는 작성자가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독서 자체가 그러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서평 쓰기는 심화된 독서 행위입니다. 더욱 깊게 책을 읽는 가운데 자신을 더욱 깊게 읽는 것이지요.” (44)

 

자아 성찰이 서평 쓰기의 결론은 아닙니다. 진정한 종결은 어디까지나 삶을 통한 해석이자 실천입니다. 이는 물론 서평이 보여 주는 가능성을 극대화한 이상적인 논의일 겁니다. 그렇더라도 이상은 중세의 선원이 기준으로 삼던 밤하늘의 북극성과도 같습니다. 항해를 통해서 북극성에 다다를 수는 없어도 북극성을 보며 항해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는 있습니다. 서평이 독서의 완성이라면, 그 완성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47)

 

이에 대한 확장으로 2부에서는 서평을 어떻게 쓸 것인가로 이어진다. 작가는 서평의 전제, 서평의 요소, 서평의 방법으로 구분하여 서평 쓰는 법을 꼼꼼하게 안내한다. 고추장 만드는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여느 떡볶이집 할머니의 명언을 무시라도 하듯, 오랜 독서가이자 서평가로서 작가가 찾아낸 서평 쓰기의 정수를 모두 알려준다.

 

서평을 잘 쓰기 위해서는 우선 독서의 목적독서의 태도(69)”를 제대로 점검(서평의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평가는 무엇을 위해 책을 읽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목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각각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읽고 독자와 공개적으로 소통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읽느냐보다는 왜 읽느냐에서 도출되는 질문인 무엇을 소통하려 하느냐가 중요합니다.”(70)

 

왜 읽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읽느냐입니다. 방법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책에 대한 태도가 양가적이어야 합니다. 한 면으로 숭배자가 되고, 다른 한 면으로 비판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서평을 쓰려면, 다루는 책이 뭐가 됐건 이런 이중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책에 매료되어 다가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으로부터 냉철하게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물론 책에게 다다가 흠뻑 빠져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공감의 해석학이 선행되어야, 이어서 비판의 해석학도 충분히 제 몫을 하게 됩니다.”(74)

 

서평의 전제를 점검했다면, 서평의 핵심 요소 역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그 핵심을 요약과 평가”(85)에서 찾는다.

 

요약 없는 평가는 맹목적이고, 평가 없는 요약은 공허합니다. 맥락화에 기초한 평가가 없다면 서평은 의미가 없지만 그 평가의 근간에는 충실한 요약이 자리해야 합니다.”(85) 

 

이를 토대로 요약과 평가가 필요한 이유를 제시하고 평가의 의미와 요소를 짚어낸다.

 

좋은 서평은 바른 맥락 속에 책을 자리매김합니다. 하나의 책을 다른 책과 연결해 특정한 자리를 찾아 주는 것이 서평의 역할입니다.”(100)

 

이 과정은 서평을 쓰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독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독서의 완성이 서평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책을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원석 작가가 제시한 평가의 요소-제목, 목차, 문체, 지식과 논리, 번역, 감정 이입-를 살피라고 권하고 싶다. 평가의 요소는 서평을 쓸 때뿐만이 아니라 책을 고를 때와 책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평의 방법에 와서는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일단 생각하라. 지금 바로 글을 쓰라. 첫 문장에 대해서 고민하되 지나칠 필요는 없다. 문단은 하나의 생각을 중심으로 축약하라. 인용은 전채일 뿐이고 서평의 주체는 서평가임을 잊지 말라. 마무리 역시 부담을 가지지 말되 서평을 썼던 이유를 잊지 말라. 다 쓰되 고쳐 써라. 어려우면 좋은 서평을 참고하되, 분량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라.’

 

간단하게 요약했지만, 책은 내 방식의 요약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서평 쓰기에 관해서 이토록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저자가 말미에 언급하듯, 이 책이 앞으로 나올 책들의 디딤돌이 되(165)”도록 포문을 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내가 작가에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책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었던 시절, 쓸쓸했지만 덤덤하게 걸어온 길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이제는 네 마음을 알아줄 지침이 있으니 함께 같이 가자고.

 

물론, 지금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온라인에 글을 쓸 공간이 생긴 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책에 관한 소감을 나누면서 블로거끼리 교류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원석 작가처럼 조근조근 서평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다. 서평을 어떻게 써야 작가, 서평가, 독자 사이의 교류를 끈적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독서법이 궁금한, 독서를 통해 깊이 교류하고 싶은, 책을 깊이 이해하고 싶은, 글을 잘 쓰고 싶은... 수많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일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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