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문제들 - 인간과 철학
버트란드 러셀 지음, 박영태 옮김 / 이학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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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한 가장 좋은 리뷰는 이미 출간되었다. <곁에 두고 읽는 철학가이드북>의 20-23쪽에 실려 있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http://blog.naver.com/dreamerfs/220883300855 의 가장 아래 사진 부분만 참고하시면 된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섯 번에 걸쳐 <철학의 문제들>을 읽었기에 뭐라도 적어두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적으라고 한다면, 이 책에 관한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는) 리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철학의 문제들>과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같은 책인데 번역자만 다르다. 후자의 책을 먼저 샀다가 번역 문제로 전자의 책을 다시 샀다. 전자의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 대신 원문에 가까운 만큼 한국어는 지저분해졌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철학의 문제들>이 더 읽기 편하다. 다만 드물게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더 나은 번역이 있을 때가 있다. 두 권을 함께 두고 읽으면 더 좋다. (당연하게도, 영어의 원문을 읽으실 수 있는 분들이라면 원문을 추천한다.) 대체로 <철학의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읽은 만큼 이 리뷰는 <철학의 문제들>의 리뷰로 한정해도 상관없다.

 

이 책은 '지은이의 말'에서 목표를 분명하게 한정한다. "나는 이 책에서 주로 긍정적이면서도 건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철학적인 문제들에 국한시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만 논의한 이유는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한 부정적인 비판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이 책에서의 논의는 형이상학보다 인식론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으며, 다른 철학자들이 많이 논의한 그 밖의 문제들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소개하는 데 그쳤다.(7쪽)"

 

앞뒤의 내용을 바꿔보자면 이 말은 곧 '형이상학은 부정적이면서도 건설적이지 않다'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러한 입장에 서서 러셀은 관념론자들을 비판한다. 이 책에 언급된 관념론자는 버클리,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칸트, 헤겔인데 러셀은 줄곧 이들을 비판한다.

 

​이 책이 (서양)철학입문서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서양 철학의 근원인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시작하지 않고, 인식론적 입장에서 바라 본 철학입문서임을 알아야 한다. 분석철학의 창시자인 러셀이 쓴 만큼 분석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 역시 알고 읽어야 한다.

 

​목차는 총 1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문장은 "이성을 가지고 사리에 맞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신할 수 있는 지식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러셀이 우리를 철학적 사고로 초대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1장에서 14장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넘겨왔지만 실은 당연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에겐 이 과정이 1+1=2인 이유를 증명하는 수학적 공식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1+1=2라고 믿고 있지만 막상 왜 1+1=2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학창 시절에 배웠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증명해봤자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결론이 2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과정을 충실히 밟아간다. 독자는 그 증명을 따라가면서 논리적(혹은 철학적)인 사고 없이 믿을 수 있는 것들은 실상 아무것도 없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 범위 역시 생각만큼 당연하지 않으며 확실한 것조차 없다.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증명을 거쳐 확정된 것들밖에 없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조차 확실한 것이 없는데 인식할 수 없는(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더더욱 알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러셀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토록 확실한 것이 없는데도 증명(혹은 사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15장에서 밝힌다. "철학적 사유의 가치"라는 제목의 15장은 14장까지의 피로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한다. (15장이 없었으면 나 역시 러셀을 좋아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앞에 실려 있는 '책의 내용 소개'에 의하면 비스겐슈타인은 이 책을 싫어했고 특히 15장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지만, 내가 비스겐슈타인까지 알 바 없지 않은가!!! 과감하게 지른다.)

 

"철학이란 무지한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으나, 하찮고 세세한 문제들을 따지며 어떤 지식이 불가능한가에 관한 문제를 놓고 쓸데없이 따지는 논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경향(200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철학적 사유의 가치"를 감동적으로 설파한다! 15장까지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읽은 것이 마치 대단히 뿌듯한 일을 한 것과 같은 착각까지 생길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 감동은 1-14장까지 충실히 읽은 독자만이 느껴야 할 몫이다!

 

형이상학(혹은 관념론)을 과감히 무시('칸트, 헤겔 따위야 우습지'로 가볍게 무시)하는 러셀의 무례함에 너그러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덧1- 러셀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여타의 철학자와 다르게) 장수했고, (여타의 철학자와 비슷하게) 결혼도 여러 번 했으며, (놀랍게도)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사회참여(촌스러운 용어지만)에도 열성적이라 반전운동도 했다. (<철학의 문제들>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면) 거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 같다.

 

덧2- 리뷰의 허접함을 <곁에 두고 읽는 철학 가이드북>을 읽으며 용서하시길.

 

덧3- <철학의 문제들>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보다 별로였던 점(몇몇 번역 제외하고)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쓸데없이 앞 부분에 "책의 내용 소개"를 넣어두었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또 하나는 중간중간에 '옮긴이의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없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 같다. 두 가지 모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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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16-12-27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아닌 알라딘 메인에서 보면 왜 자꾸 문단 앞에 물음표가 붙는 것인가. ㅜㅜ

cyrus 2016-12-2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보라빛우주님이 소개한 리뷰도 잘봤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연보라빛우주님의 글을 참고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연우주 2016-12-28 01:48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리뷰는 이미 나와서... 별로 크게 도움이 안 될 거에요. ^^ Cyrus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