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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게 제 블로그 링크만 걸어둡니다. ^^

http://blog.naver.com/dreamerfs/22091558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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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재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물만두님은 투병 중이었어요. 그래서 물만두님과 직접적으로 어울린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분 때문에 헌책방이나 중고매장에 갈 때 절판된 장르소설을 삽니다. 지금도 물만두님이 살아계셨다면, 책으로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연우주 2017-01-20 14:19   좋아요 0 | URL
물만두님은... 원래 투병 중이시다가 책을 읽으신 분이신데요.... 참 다정하시고 좋은 이웃이었어요.

감사한 분들이 언급한 분들의 두 배 이상 되지만, 지금은- 교류도 없는데... 감히 언급하기가...

알라딘의 경영 방식이나 경영 철학은, 참으로 싫어하지만 제가 아직까지 알라딘에서 책을 사는 이유는, 알라딘 서재로 알라딘에 빚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스24를 문제집 출판사에서 인수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ㅋㅋㅋ 늘 선택은 차악이죠.) 물론 여전히 좋은 서평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알라딘 온라인 서점을 초창기에 시작한 덕 참 많이 봤네요.

연우주 2017-01-20 14:20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저는 변덕 병이 있어서 알라딘에서 달인 된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cyrus님 대단하신 듯! ^^

cyrus 2017-01-20 15:48   좋아요 0 | URL
누구나 꾸준히 글을 쓰면 달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재에 남기는 글은 하루 동안 책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한 일기와 가깝습니다. 일기 대신에 리뷰를 쓰고 있는 거죠. ^^;;

연우주 2017-01-20 15:53   좋아요 0 | URL
네. 훌륭하십니다. ^^
 
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땅콩문고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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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omn.kr/m0uh

- 오마이뉴스 책동네에 기고한 글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았다,라고 말하면 지루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셨는지 아버지는 내가 8살 때 이사를 택하셨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친구가 생기려고 할 무렵에 경기도에 있던 목장으로 이사를 갔다. 원래 사슴을 키우는 목장이던 곳이 수련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수련원의 식당에 손이 필요했던 이유였다. 아버지는 수련원 식당의 주방장이 되셨고 우리 남매들은 난데없이 시골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은 인근의 초등학교에서도 꽤 먼 곳에 있었다. 한 시간을 걸어서 이십여 분을 버스를 타고 내려야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오빠와 등교 시간이 겹치는 오전에는 오빠와 같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반이 되는 날-당시의 초등학교 저학년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었다-에는 혼자 한 시간을 걸어서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힘든 생활이었지만 닥쳤으니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와야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도 같다.

 

친구 사귀기 대신 책을 즐겨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책을 다 읽은 후가 문제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그렇게 책에 관한 수다를 떨고 싶은지 오히려 더 쓸쓸해졌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독후감도 쓰고, 일기도 썼다. 작품을 모방하며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런 시간을 거쳐 책을 읽고 나면, 글을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원석 작가의 <서평 쓰는 법>이 반가웠던 이유는 이런 내 삶의 이력이 있어서였다. 작가는 서평이 독서의 완성이라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잘 읽을 수 있고, 또 깊이 읽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읽어야 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책을 통해 나를 만들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읽은 책에 대해 서평을 쓰는 것입니다. 서평이야말로 독서의 심화이고, 나아가 독서의 완성입니다.”(9-10)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독서의 심화법을 배우고, 완성에까지 이르렀다는 칭찬을 받으니 이 책이 안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냥 책을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서평으로 흔적을 남기는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서평이야말로 제 독서의 결산인 셈입니다. 서평으로 독서가 일단락되는 것이지요.”(10)

 

어설펐지만 어린 시절부터 써 온 서평(혹은 독후감)이 있었기에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책을 오래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서평 쓰는 법>은 기존의 내 독서법이 독서를 할 때, 꼭 필요한 과정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서평과 독후감을 혼동해서 사용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작가는 이 부분을 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독후감과 서평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첫째, 독후감이 정서적이라면, 서평은 논리적입니다. <중략> 둘째, 독후감이 내향적이라면, 서평은 외향적입니다. <중략> 셋째, 독후감이 일방적이라면, 서평은 관계적입니다. <중략> 이렇듯 서평은 그 서평을 읽는 독자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서평 읽기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서평을 읽은 독자가 해당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 구체적인 반응으로 화답해 주어야 서평은 제 구실을 다한 것이 되며, 이로써 서평을 통한 대화가 완성됩니다.” (23-25)

 

1부 서평이란 무엇인가의 시작은 서평과 독후감을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서평의 본질과 서평의 목적을 짚어낸다.

 

서평, 즉 북리뷰(Book Review)에서 리뷰는 책을 다시(re) 보는(view)' 겁니다. 새롭게 읽는 것이지요. 이는 해석의 주체인 독자가 각기 다른 자리에 서 있기에 가능합니다. 모든 서평은 독자/서평가의 다시 읽기입니다. 나아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를 제안합니다.” (33)

 

서평 쓰기의 일차 가치는 독자 자신의 내면 성찰에 있습니다. 서평 쓰기는 작성자가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독서 자체가 그러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서평 쓰기는 심화된 독서 행위입니다. 더욱 깊게 책을 읽는 가운데 자신을 더욱 깊게 읽는 것이지요.” (44)

 

자아 성찰이 서평 쓰기의 결론은 아닙니다. 진정한 종결은 어디까지나 삶을 통한 해석이자 실천입니다. 이는 물론 서평이 보여 주는 가능성을 극대화한 이상적인 논의일 겁니다. 그렇더라도 이상은 중세의 선원이 기준으로 삼던 밤하늘의 북극성과도 같습니다. 항해를 통해서 북극성에 다다를 수는 없어도 북극성을 보며 항해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는 있습니다. 서평이 독서의 완성이라면, 그 완성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47)

 

이에 대한 확장으로 2부에서는 서평을 어떻게 쓸 것인가로 이어진다. 작가는 서평의 전제, 서평의 요소, 서평의 방법으로 구분하여 서평 쓰는 법을 꼼꼼하게 안내한다. 고추장 만드는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여느 떡볶이집 할머니의 명언을 무시라도 하듯, 오랜 독서가이자 서평가로서 작가가 찾아낸 서평 쓰기의 정수를 모두 알려준다.

 

서평을 잘 쓰기 위해서는 우선 독서의 목적독서의 태도(69)”를 제대로 점검(서평의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평가는 무엇을 위해 책을 읽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목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각각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읽고 독자와 공개적으로 소통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읽느냐보다는 왜 읽느냐에서 도출되는 질문인 무엇을 소통하려 하느냐가 중요합니다.”(70)

 

왜 읽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읽느냐입니다. 방법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책에 대한 태도가 양가적이어야 합니다. 한 면으로 숭배자가 되고, 다른 한 면으로 비판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서평을 쓰려면, 다루는 책이 뭐가 됐건 이런 이중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책에 매료되어 다가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으로부터 냉철하게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물론 책에게 다다가 흠뻑 빠져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공감의 해석학이 선행되어야, 이어서 비판의 해석학도 충분히 제 몫을 하게 됩니다.”(74)

 

서평의 전제를 점검했다면, 서평의 핵심 요소 역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그 핵심을 요약과 평가”(85)에서 찾는다.

 

요약 없는 평가는 맹목적이고, 평가 없는 요약은 공허합니다. 맥락화에 기초한 평가가 없다면 서평은 의미가 없지만 그 평가의 근간에는 충실한 요약이 자리해야 합니다.”(85) 

 

이를 토대로 요약과 평가가 필요한 이유를 제시하고 평가의 의미와 요소를 짚어낸다.

 

좋은 서평은 바른 맥락 속에 책을 자리매김합니다. 하나의 책을 다른 책과 연결해 특정한 자리를 찾아 주는 것이 서평의 역할입니다.”(100)

 

이 과정은 서평을 쓰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독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독서의 완성이 서평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책을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원석 작가가 제시한 평가의 요소-제목, 목차, 문체, 지식과 논리, 번역, 감정 이입-를 살피라고 권하고 싶다. 평가의 요소는 서평을 쓸 때뿐만이 아니라 책을 고를 때와 책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평의 방법에 와서는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일단 생각하라. 지금 바로 글을 쓰라. 첫 문장에 대해서 고민하되 지나칠 필요는 없다. 문단은 하나의 생각을 중심으로 축약하라. 인용은 전채일 뿐이고 서평의 주체는 서평가임을 잊지 말라. 마무리 역시 부담을 가지지 말되 서평을 썼던 이유를 잊지 말라. 다 쓰되 고쳐 써라. 어려우면 좋은 서평을 참고하되, 분량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라.’

 

간단하게 요약했지만, 책은 내 방식의 요약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서평 쓰기에 관해서 이토록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저자가 말미에 언급하듯, 이 책이 앞으로 나올 책들의 디딤돌이 되(165)”도록 포문을 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내가 작가에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책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었던 시절, 쓸쓸했지만 덤덤하게 걸어온 길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이제는 네 마음을 알아줄 지침이 있으니 함께 같이 가자고.

 

물론, 지금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온라인에 글을 쓸 공간이 생긴 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책에 관한 소감을 나누면서 블로거끼리 교류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원석 작가처럼 조근조근 서평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다. 서평을 어떻게 써야 작가, 서평가, 독자 사이의 교류를 끈적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독서법이 궁금한, 독서를 통해 깊이 교류하고 싶은, 책을 깊이 이해하고 싶은, 글을 잘 쓰고 싶은... 수많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일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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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

                                     - 동생에게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미'(美)자는'양'(羊) '대'(大)의 회의(會意)로서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 고기를 먹고 그 털을 입는 양은 당시의 물질적 생활의 기본이었으며, 양이 커서 생활이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곧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모든 미는 생활의 표현이며 구체적 현실의 정서적 정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바깥에서 미를 찾을 수는 없다. 더욱이 생활의 임자인 인간의 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용모나 각선 등 조형상의 구도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없음은 마치 공간을 피해서 달아나거나 시간을 떠나 존재하거나, 쉽게 말해서 밑바닥이 없는 구두를 생각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너는 먼저 그녀의 생활목표의 소재를 확인하고 그 생활의 자세를 관찰하며 나아가 너의 그것들과 비교해보야야 할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알 만 하다'는 숙지(熟知), 가지(可知)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미의식의 형성과 미적 가치판단의 훌륭한 열쇠를 주고 있다. 이를테면 너의 머리 속에 들어앉은 이러저러한 여인상이 바로 너의 미녀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기실 너는 사제(私製)의 도량형기(度量衡器)로써 측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네게 아름다운(可知) 여자가 어머니께는 모름다운(不知) 여자가 되는 차이를 빚는다.

  여기서 말해두고 싶은 것은 너의 여성미 기준이 혹시 매스컴이나 부침(浮沈)하는 유형의 침윤(浸潤)을 당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문이다. 스스로의 착소(窄小)한 시야에 대한 반성이 있다면 인생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노인들의 달관과 그 관조의 안목을 낡았다고 비양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는 또한, 신선미 즉 미의 지속성을 그 본질로 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거니와 부단히 자기를 갱신하지 않는 한 미는 지속되지 않는다. 정체성은 미의 반어(反語)이며 권태의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녀가 어떠한 여자로 변화·발전할 것인가를 반드시 요량(料量)해봐야 한다.

  착한 아내, 고운 며느리, 친절한 엄마, 인자한 시어머니, 자비로운 할머니 등 긍정적 미래로 열려 있는 여자인가 현재 속에 닫혀 있는 여자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은 현재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완결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연관 속에서 변화발전의 부단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철학적 태도이며, 현실성보다는 그 가능성에 눈을 모으는 열려 있는 시각이다.

   나는 이 편지로 네게 여자를 고르지 말라거나 미녀를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결혼에 임하여 미의 의미를 새로이 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잘 뿐이다. 사실이지 사람이란 사과와 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반려이며 생활을 통하여 동화·형성되어 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면밀한 선택으로부터 좀 대범해져도 좋을 것이다. '부모나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가'라는 현문(賢問) 앞에서는 답변이 없어진다.

   너는 아직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같은 가격이면 그 염색료만큼 천이 나쁜 치마이기 십상이다. 어쨌든 금년에는 네가 결혼하기 바란다.

 1975.1.13


 오가며 지하철 안에서 오랜만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꺼내들었다. 역시나 신영복 선생님의 사색의 깊이는 따를 수가 없다.

 아름다운 여자란 어떤 여자인가, 를 저리 풀어낼 수 있는 그 분의 사색 앞에 또 한 번 감탄을 한다.

 뭐, '착한 아내, 고운 며느리, 친절한 엄마, 인자한 시어머니, 자비로운 할머니' 대목에서 살짝 거슬렸지만 1975년에 쓰셨다는 것을 감안할 때 불편한 마음은 버릴 수 있겠다.

 마음을 흔드는 구절이 너무 많아 종종 멈칫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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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6-2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되는 구절이 너무 많아 읽은 책중 가장 많은 밑줄이 쳐진 책이죠. 읽자마자 바로 책의 처음으로 넘어가 다시 읽기 시작한 유일한 책이기도 하고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소장책 1호입니다.

연우주 2006-06-3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에겐 미치는(?) 코드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랍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나, 처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어요. 그때 그 깊이에 매료되었지요. 오랜만에 꺼내들었어요. <나무야 나무야>는 매년 두세번 이상 보는데 이상하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자주 안 꺼내지더라구요. 아마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해서 그럴 거예요...

그나저나 잉크냄새님의 댓글 너무 반갑네요!
 

사람들은 다 소통을 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생각을 교류하고 싶어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하고 지식을 나누고 싶어한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하고 함께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어한다. 사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더불어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주의, 나아가서 이기주의를 권장한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외롭다. 어딘가에서 그 외로움을 채우고 싶어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쌓여가면서 사람들은 점차 서로간의 의사소통보다는 내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들리게 할 것인가, 혹은 내 이야기를 얼마나 잘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인터넷 문화가 바로 그런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동호회 형태의 클럽이나  카페가 아닌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가 인터넷 문화에 주류를 이룬 것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 혹은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에 대해 어떤 방식의 코멘트를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요즘의 소통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서글펐다.

정작 소통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고 온라인 상에 글을 쓰고 위안받기를 원하는 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반영은 아닐까.

사람 간에 거리를 두고 진짜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닐까. 내 일,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나와 타인을 처절하게 구분하면서도 타인에게 위로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그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상처는 받고 싶지 않지만 사랑은 받고 싶은 어린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삶은, 생각보다 공평해서 사랑이 있으면 상처가 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다. 건강함이 있으면 아픔이 있다. 강인함이 있으면 연약함이 있다. 웃음이 있으면 눈물도 있다. 그래서 상처를 받더라도 다가서야 하고 말해야 하는데, 다들 악역은 맡고 싶지 않은 거다.

아주 잠깐 어울리지 않는 악역을 맡았었다. 하지만 그 악역을 맡은 사람의 슬픔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음도 이해받을 수 없다.

잘, 모르겠다. 살면서 가끔 방향성을 잃을 때가 있다. 아니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지향점은 분명하지만 그 지향점을 향해 가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기 고지가 보이는데, 내 바로 앞에는 뭐가 있는지 볼 수가 없어서 배를 타야 할지, 버스를 타야 할지, 걸어야 할지, 비행기를 타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고 있는 그 지향점의 동료는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을 산다는 건 그래서 즐겁다고도 말을 하지만 때때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참으로 암담하다.

나는 글쓰기보다는 말로 소통을 하고 싶고, 온라인 상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고, 때로 상처를 받더라도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삶을 채워나가서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진실하게 사랑하고 싶다.

비록 내 말하기 방식이 서툴러도. 늘 그렇듯 글쓰기가 훨씬 명확하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잘 전달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글이 아닌 말로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했으면 싶고, 내가 서 있는 삶의 현장에서부터 진실을 실천해나가고 싶은 것이다.

이해(利害) 관계, 그리고 접점이 없기 때문에 쉽사리 위로하고 쉽사리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온라인 상의 관계보다는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랑하기 힘들고 늘 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 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면으로 돌진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은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정말 그럴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비겁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 과정 속에서 마음은 너덜너덜 다 떨어지고 찢겨져 걸레가 되어도 어느 순간은 그 찢겨진 마음 사이로 진실이 스며든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패잔병처럼 쓸쓸하고, 외롭고, 아프고, 그래서 또 어떤 방식의 위로든 친절함이든 너무 쉽게 기대고 싶을 뿐이다. 그런 나약함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희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홀로 튼튼해져야 할 시기일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그냥 사실은 잘 모르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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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당에 매달 1만원을 내면서 나는 내가 정치참여에 적극적인 인간이라 위안받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속해있는 학교의 장학회에 소속되어 매달 1만원씩 내면서 그래도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위안받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노력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은 결국 1만원 어치는 아니었을까.

십일조를 하기 때문에 나머지 90%는 어떻게 써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처럼 나 역시 1만원을 기부(?)하고 있기에 나머지 99만원은 마음대로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 사랑의 깊이도 결국은 만원 어치는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만원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치 않다. 나는 위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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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6-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 보다는 나아요. ^^

waits 2006-06-23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비, 후원금으로 자기위안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 가치를 부러 절하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는 건, 우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
나머지 99만원이라니, 부럽습니다..;; 전 그냥 즐겁게 욕심껏 냅니다만, 거지랍니다. ㅎㅎ

연우주 2006-06-2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그렇게 위안을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어요. 쨌든 감사한 댓글입니다. ^^

나어릴때님/ 음, 그냥 왜 사람들은 더 애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나 봅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들,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런 식으로 사고를 확대해나가다보면 바로 그런 무관심이 사회를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두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차원에서 사랑해야 한다, 라는 원론적인 생각, 그걸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함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하고 있는 건 역시 만원어치는 아니었을까 싶었답니다. 그리고 99만원이라는 건 그냥 100%를 기준으로 한 은유법이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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