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우리가 독서에 대하여 생각했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
탕누어 지음, 김태성.김영화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해야 하는가. 읽으며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문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책이 별로여서 그러냐고 묻는다면 정색을 하며 '그럴 리 있겠냐'고 대답할 것 같다.

 

"명함은 없지만 누군가가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전문 독자(professional reader)'라고 대답"(485쪽)하는 탕누어가 쓴 '열독 이야기(이 책의 원제다.)'가 어떻게 별로일 수 있겠는가. 그는 내가 만난 '가장 치열한 독서가'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들먹이며 독서에 대해 안 들어도 되는 말(글)을 떠들지만, 탕누어는 '내공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그의 글에는 '독서 내공'이 촘촘하게 담겨 있다. 번역자의 말대로 "다소 뇌를 지치게 만들 수도 있"(487쪽)을 만큼 깊다. 대만에서는 10년 전(200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번역되는 것이 이상할 만큼 '특별한 책'이다.

 

이런 탕누어의 책을 누구에게 권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유는 이렇다.

 

이 책을 '깊이 있게' 이해 혹은 공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탕누어처럼 유년기부터 계속 치열한 독서를 이어와야 하고, 탕누어가 수도 없이 언급하는 '마르케스,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작가만큼 알기 때문에 읽는 것은 아니다. 또 작가만큼 알아야 그 책을 독해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탕누어 역시 이 책의 예상 독자를 '독서에 관해 궁금한 성인 독자면 누구나'로 잡았을 것도 같다. ("이 책을 쓰게 된 의도는 원래 사람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하면서 그 과정에서 곧잘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5쪽)이며 "도대체 독서가 필요한 것인지 필요치 않은 것인지 스스로 자세하고 분명하게 생각하는 이야기로 써낼 수 있을 뿐"(6쪽)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각장마다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이 인용하면서 글을 전개하고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수시로 호출하는 그의 글쓰기 기법은 독자를 다소 피로하게 만든다. 쉴 틈 없이 빡빡하게 들어찬 탕누어의 독서 내공은 독서 초보일수록 읽기의 피로감을 과중시킬 것 같다. 의도치 않게 '전문독자'로서의 내공이 넘치게 드러났을 뿐이다. (아마 탕누어는 이런 것이 문제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런 피로감을 이겨낼 수 있는 독자라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탕누어의 독서 내공'이 궁금한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탕누어'야말로 (연구자가 아닌) '순수 독자'가 '독서'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토록 치열하게 읽는 독자가 말하는 독서론은 '스스로를 독서가라 칭하는 한국의 어설픈 독자 백 명'이 떠드는 이야기를 전부 가져다 조합해도,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줄 테니까.

 

이 책은 머리말과 부록을 제외하고 0장을 포함하여 총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와 책, 독서의 지속 문제,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독서의 곤혹, 독서의 시작과 그 대가, 독서의 시간, 독서의 기억, 독서의 방법과 자세, 독서의 전문성, 유년의 독서, 마흔 이후의 독서, 독서의 한계와 꿈, 소설 읽기, 독자로서의 생각'이 각장의 (소)제목이다. 독서에 관하여 궁금하게 생각할 법한 이야기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는 "0장 서와 책 -벤야민적인, 정리되지 않은 방"에서 독서가 안정된 행위가 아니라 탐닉성과 도약성을 동시에 지니는 변화무쌍한 행위에 가깝다고 말한다.

 

"독서는 물이 흐르듯이 날과 달, 계절과 세월의 교체에 따라 들쭉날쭉 변화무쌍하면서도 출퇴근과 삼시 세끼 식사에 융화된다. 잠이 오지 않거나 어딘가 바삐 가야 한다면 읽던 책을 바닥에 내려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서 자체가 탐닉성과 도약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항상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나타난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으로 인해 다른 책을 펼치게 되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게 다반사다. 매일 심경의 미묘한 변화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을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할 테고, 글을 쓰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겨 한꺼번에 열 권 내지 스무 권의 책을 뒤적이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독서의 상황과 유형은 한없이 다양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독서란 깨끗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22쪽) 

 

독서의 여정에서 우리가 따라갈 것은 의문이라고도 말한다.

 

"의문은 독서 전에 생긴 것이든 독서 과정에서 생긴 것이든 모두 독서를 이끌어주는 동시에 종종 독서의 여정에서 유일한 지도 역할을 한다. 책의 세계에는 이로 인해 독특한 경로가 생겨나고 책 읽는 사람은 그 경로의 부분적인 모습만 펼쳐게 된다."(30쪽)

 

굳이 0장을 넣은 이유는 이 책의 가장 큰 줄기를 설명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전문 독자 탕누어는 의문을 따라 정리되지 않은 독서의 길을 갔고, 또 그런 과정으로 독서를 안내하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1장부터는 실제로 독서에서 부딪히는 문제로 들어가 이야기한다.

 

사실 독서를 '시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독서를 지속하는 일이다.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독서가 순전히 심심풀이가 되는 시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 극복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없애버릴 수는 없는 어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문 밖에는 꽹과리 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찌르며 사람들을 공격하는 괴로운 세계가 존재한다. 독서와 심심풀이가 서로를 배척하면서 용납하지 않고 있지만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항상 없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일부 사람은 분명하게 묘사할 수 있지만 대개는 몹시 애매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책을 읽는 이들은 세계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꺼지지 않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지나치게 체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혐오한다. 다시 말해 그들과 이 세계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소박한 연계, 그윽하고 미묘한 대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자 세계의 일부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수시로 회의를 품지만 시종 손을 놓치 않는다.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반드시 볼리바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계와 사람들을 바꾸려는 큰 꿈을 추구하면서 그 해답과 방법 그리고 역사적 결함을 찾아야 한다."(61쪽, 1장 좋은 책은 갈수록 줄어드는 걸까? - 독서의 지속 문제)

 

물론 이런 독서도 "가능성이지 해답은 아니다." "이런 가능성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하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가능성이야말로 절망의 반의어다. 가능성은 영원히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포착할 여지를 남겨준다."(62쪽)

 

그렇다면 계속 독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독자들은 책 속의 세계에서 더 큰 유혹을 받을수록 상대적으로 눈앞의 현실 세계에서 더 멀어지고, 책 속의 갖가지 훌륭한 세계를 이해하면 할수록 눈앞 세계의 빈약함과 초라함, 무미함과 불의를 더 쉽게 알아차리며, 심지어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더 자극적인 사실은, 독자들이 보고서 보물처럼 여기는 더 좋은 세계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대개 하나하나 '패배당한 세계'라는 것이다. <중략>

 

책 속의 세계가 더 훌륭하며 그 안에 사는 것들이 더 즐거울수록 혼탁하고 오염된 현실 세계의 공기 중에서는 살아가기가 더 힘들어진다. 결국 독자는 두 배의 속도로 눈앞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셈이다. <중략>

 

독자는 확실히 자연스럽게 어떤 고독감을 느끼고 좀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더 선명하고 구체적인 것을 감지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의 언어란 원래 이처럼 간단하고 초라하며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실 세계에 내놓아진 유한한 우리가 실제로 보는 풍요로운 세계를 우리는 아예 묘사할 수 없을 것이고, 설득하거나 변론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82-83쪽, 2장 의미의 바다, 가능성의 세계 -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남들이 지금 이 순간의 '이 세계'만 갖고 있을 때 그는 하나 또 하나 교차되고 호응하며 계속 파생되는 다른 세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주 깊고 무거운 풍요로움의 행복이지만 이렇게 많은 행복을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로서 상당한 인내력과 체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처럼 많은 행복으로 충만한 마음과 몸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한밤중에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외롭고 고독하다.

 

이리하여 이렇듯 힘들고 고독한 일이 수시로 독자들 마음의 지혜와 인내심을 시험하고, 눈앞의 세계 및 사람들에 대한 독자들의 제한된 동정과 그리움을 느끼도록 시험한다. <중략> 독자는 자신의 익숙한 실존 세계에 서 있지만 자신을 이방인이라 느끼게 된다. 언어마저도 이방의 언어다."(84쪽, 2장 의미의 바다, 가능성의 세계 -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내가 왜 항상 이방인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 언어는 소통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한 글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외로워서 시작한 독서가 끊임없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탕누어만큼은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나쁜 책은 왜 이렇게 많아서 나를 분노케 하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탕누어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세계는 만신창이가 된 실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독의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책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전부 스린에 있는 폐지 공장으로 보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는 가려지지 않는 질병의 증상으로서 진실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이 세계를 얼마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는지를 증명하는 증거물이 될 수도 있다."(136쪽, 4장 첫번째 책은 어디에 - 독서의 시작과 그 대가)

 

 

그래.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그런 책들은 계속 출간될 것이다. 그렇다면 탕누어처럼 생각하는 편이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유리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 시간에 한 권'을 읽는 '독서법'이 많이 팔리는 상황에 탕누어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죽어버린 부호를 하나하나 깨우고 그 시의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원저자가 걸었던 길을 반복하면서 그가 본 것을 보고, 그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며, 그가 고민했던 것을 고민해야 한다."(187쪽, 5장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면 - 독서의 시간) 

 

"아무리 훈련이 잘되어 있고 소질이 있는 중량급 독자라 해도 갑자기 책을 펼쳐 읽으면서 처음부터 텍스트를 전체적으로 충분히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따라서 어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그 책과 저자로 하여금 계속 말이 없는 죽음의 상태에 남아 있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아니라면 반드시 다시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준비가 자신을 정확한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책을 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의 말에 담긴 진정한 함의일 터이다. 그는 일찍이 「책」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글에서 자신의 독서와 관련하여 "나는 늘 광범위하게 책을 읽는 것보다 몇 권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편이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폭넓게 읽는 것보다 몇 권의 책을 새롭게 다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시 읽기 위해서는 먼저 한 번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213쪽, 6장 외워야 할까 - 독서의 기억)

 

그렇다면 탕누어는 '재미있어서' 계속 읽는 것일까.

 

"독서에는 본질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통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중요한 것들은 곤경 속에서만 발생하고 잔존한다. 이를 일부만 조금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260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전문적인 독서에는 부득이하게 강제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스스로 감지한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초점과 색깔이 있다고 해도, 이는 장시간 형성된 사유의 전통에 포함된다. 이런 사유의 전통이 그 문제에 모종의 견고함과 엄숙함을 부여하기 때문에 개인의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이를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이다. 전문적인 독서에는 또 상당히 무미건조한 부분이 있다. 전문적인 독서를 위해선 사유의 전통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고 이 사유의 흐름 가운데 자신은 어디쯤 서 있는지, 남들은 또 어디쯤 서 있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 사유의 전통이 지니는 가설과 언어, 방법 및 역사의 연혁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과거에 실패한 사례와 그 내용도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실패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 어떤 계시(예컨대 어떤 잠재력을 갖는 실패)이든 아니면 교훈(이 길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또다시 뼈아픈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해주는 것)이든 간에, 보통 이것은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대등한 다른 사유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부분도 집착과 병적인 증상까지 포함하여 이 영역의 현상들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우리의 이해에서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274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뒤를 돌아보면서 '학점을 보충'하는 일, 너무나 황급히 서둘러 쫒아가느라 놓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의 틈들을 견고하게 메우는 일, 과거에 다른 사람들(다른 사람들이라서 다행이다)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경험을 주워 모아 가슴에 새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타이완의 독서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다."(274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 타이완을 '한국'으로 바꿔 넣어도 될 것 같다.

 

탕누어는 "전문적인 독서"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 대신 "독서를 계속 지속해가는 것"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탕누어의 생각처럼 나 역시 애시당초 독서는 '재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의문'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가. 사회는 정말 바꿀 수 없는가. 아니. 나는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그런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서를 이어가는 힘이 되게 한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 것인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옮긴이의 말'을 포함하여 487쪽에 달하는 이 빡빡한 책을 누가 읽었으면 좋겠는가.

 

'독서'가 '자기계발'이라 믿는 사람들, 독서를 많이 하면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지적 허영심'으로, '재미'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유년기부터 독서를 했든 안 했든, 마르케스,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몰라도. 이 책이 '독서 판타지'를 깰 희망이기에 서두에 내가 쓴 모든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서평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미완의 글로 남는다고 해도.

 

덧- 옮기고 싶은 구절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줄이고 줄였다. 탕누어라는 전문 독자가 있는 한 그가 멈추지 않고 계속 읽는 한, 나는 조금 덜 외로울 것 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우주 2017-07-2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엔 글이 안 붙어 있는데 책으로 가면 왜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ㅜㅜ

cyrus 2017-07-2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는 이의 뇌를 지치게 만들고 싶을 정도의 좋은 글을 쓰고 싶군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쓰면 읽기 힘들어서 안 읽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연우주 2017-09-06 14:34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답변을 답니다. ^^;;; 뇌를 지치게 하는 글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글 같아요. 다만 그럼에도 좋은 글은 읽히는 것 같습니다. ^^